여름방학이 여름휴가가 될 때 나는 어른이 됐다.
기나긴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휴가시즌이 시작됐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에 줄고 국내 여행객이 증가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더 휴가스럽게 쉴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 더 잘 쉬자라고 생각하니 '잘'한다는 부사가 나를 더 피곤하게 한다. '잘 쉬자'라고 생각하면 휴가도 '잘'해야만 할 것 같다. 잘 쉬려면 계획에서 틀어져도 안 되고 어딜 못가도 안 되며 제대로 못 쉬면 더더욱 안될 것만 같다. 항상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휴가에도 따라오면 푹 쉬어야 하는 휴가마저 강박으로 망칠 것 만 같다. 그래서 이번 휴가는 여름휴가가 아닌 여름방학으로써 보내고 싶다.
여름방학과 여름휴가가 주는 어감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여름휴가는 해외, 비행기, 맛집, 책 등 사전에 계획한고 그 계획에 맞게 움직이며 여기서 변수가 생기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휴가를 망쳐버릴까 예민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름방학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여름방학은 제철과일, 낮잠, 옥수수, 집밥, 물놀이와 같이 별 계획 없이 그날그날 오늘 뭐하지?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오른다. 비가 오면 집에서 부침개도 부쳐먹고 제철 복숭아에 옥수수를 간식으로 먹는다. 해가 쨍쨍 나면 산 바다 호수 등 야외로 나가 그냥 땀 뻘뻘 흘리며 뛰어놀고 배부르게 무엇이든 먹고 푹 쉬면 된다. 이제 성인이 됐으니 일기 검사하는 사람도 없고 방학숙제도 없다. 오히려 어른이 돼 즐기는 여름방학은 더욱 자유롭다. 왜 진작 여름을 휴가가 아닌 방학으로 즐기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딜 가고 무엇을 하는 생각은 애초에 접었다. 바이러스는 재유행에 국가 전역이 비상인 상황에 지역 간 이동은 꿈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이번 방학은 아주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아침을 먹고 혼자 또는 가족들과 호수에 나가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호수가 없다면 산이, 산이 없다면 숲, 공원 등 가급적 자연일수록 좋을 것 같다. 함께 나가돼 누구는 산책, 누구는 파워워킹, 누군가는 스트레칭 등. 나는 주로 달린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운동하다 보면 어느새 어디선가는 마주치게 된다. 그럼 하나 둘 합세해서 다시 온 길로 돌아간다. 이런 게 가족이 아닐까. 규칙을 정한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자연스러워서 좋다.
집에 도착하면 순서를 정해 빠르게 샤워를 한다. 모두 샤워를 하고 그날그날 먹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 점심을 준비한다. 딸이 주방에 들어가면 올리브 오일이, 아빠는 고추장, 엄마가 주방에 들어가면 들기름 향이 퍼진다. 가족 내에서도 서로의 경험 취향이 요리에 그대로 나타나는 게 흥미롭다. 며칠은 엄마가 오랜만에 집에 온 날 먹일 생각에 집밥을 푸짐하게 하셨다. 부재료보다 본재료가 듬뿍 들어간 요리는 집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엄마는 원가를 생각하지 않는 유일무이 요리사, 셰프다. 푸짐하게 한 끼 먹고 나면 세상 감사하다. 배불리 먹고 텔레비전 앞에서 늘어져 쉬다 보면 오후의 한가운 지점에 도달한다. 간식시간이다. 복숭아 청사과 수박 등 제철 과일에 찐 옥수수까지 이 집은 간식도 푸짐하다. 혼자서 다양한 과일을 한 번에 사 먹는 건 무리가 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과일이 상하거나 변질될까 봐 항상 신경 써야 하고 한 번에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즐기기보단 계속 해치우게 된다. 휴가철엔 다 같이 보이니 다양한 과일을 동시에 맛볼 수 있어서 좋다. 샤워하고 선풍이 바람에 머리를 말리며 방금 솥에서 나온 따뜻한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물고 있으면 아 집에 왔구나 싶다. 유년 시절 나의 여름방학에는 항상 이렇게 별생각 없이 텔레비전 앞에서 빈둥거리며 옥수수를 먹는 내가 있었는다. 이제야 떠오른다.
또 배부르게 먹고 뒹굴다 보면 저녁시간이다. 저녁식사는 아침 점심에 먹고 남은 요리에 쌈채소 한두 개나 간단한 요리를 추가해 건강하고 가볍게 먹는다. 이렇게 삼시세끼 먹다 보면 아침에 새로 지은 밥이 저녁에 동나는 신기한 현상을 매일 볼 수 있다. 휴가철 우리 집에서 에어컨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가전제품은 밥통이 아닐까 싶다. 계획 없이 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또 먹는 얘기로 가득 찬다. 결국 먹는 게 사는 건가. 치열함과 쉼 사이, 결국 사는 문제다.
'이번에 어디 가지, 지금 시간이 몇 시지, 거기 가면 몇 시간 기다려야 하지'가 아닌 '오늘 뭐하지 오늘 뭐 먹지' 등 '오늘'을 사는 방학을 보내면 미리 모든 게 완벽해야 하는 '휴가'보다 몸과 마음이 편하다. 대화 주제가 간결하니 생각도 간결해지고 그렇게 뇌에도 쉼을 준다. '뭐하지? 심심하다'라는 생각이 어쩌면 정말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모르면 그냥 모르고 스쳐가지만 그 순간의 감사함을 인지하면 심심한 휴식이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 찰 수 있다. 바이러스는 이미 어쩔 수 없이 터져버린 문제다. 방관하면 할수록 더욱 확산해버리는 어떻게 보면 철학적인 문제로 변질됐다. 인간이 자원을 덜 이용하고 덜 이동해 지구에도 '쉼'을 주는 상황으로 관점을 달리하면 어떨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우리 선조들은 참 현명했고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