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고 또 우리
서울로 대학 온 나는 20대 후반부터 혼자 살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이사도 수차례. 그렇게 돌고 돌아 지금의 동네와 집으로 이사 왔다. 나와 연고도 관련도 없는 이 곳에 온 건 온전히 친한 언니 덕분이었다. 그녀가 집을 계약할 때 동행할 사람이 필요해 나에게 연락을 했고, 언니가 이사한 후에 나도 몇 번 집에 가 놀다 보니 이 동네에 푹 빠져버렸다. 사실 가장 좋았던 이유는 대로변에 펼쳐있는 나무였다. 여름과 가을을 넘어가는 찰나의 나뭇잎이 너무너무 예뻐서 이 동네로 이사 오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나는 작은 원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늑하긴 했지만 집에 있는 것이 항상 답답했다. 내 집보다 훨씬 좋은 그녀의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티브이를 보다 수다를 떨다 잠이 드는 게 어쩌면 그때의 나를 치유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같은 건물로 이사를 왔다.
이제는 이 집으로 나의 친구, 가족들이 온다. 친구들이 진탕 먹고 마시며 쿨쿨 자고 가기도 하고 가족들이 와서 먹고 마시고 자고 함께 산책하며 보내는 공간이 됐다. 내가 그녀의 집에서 치유받았듯이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도 그렇게 푹 자고 치유받고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 또한 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의 굴레.
그리고 며칠 전 나의 빵꾸똥구 대학 후배들과 후배의 집에서 접선했다. 후배의 초대 아니면 갈 일이 전혀 없는 동네까지 짧은 여행을 했다. 10년이 지나도 역시나 술을 잘 마시는 후배들과 내가 달라진 게 있다면 12시가 지나니 의지와 상관없이 잠기는 눈 그리고 술과 안주를 고를 수 있는 조금의 여유. 또 대학 때 자취방보다 살기 좋아진 집이라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밖에서 만나는 것이 점점 부담스럽고 어려워질 때 우리는 서로의 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름 대도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싱글여성이 된 셈이다.
1인 가구인 나, 지인, 친구, 후배. 서로의 집을 오고 가며 타지에서의 외롭고 힘든 시간을 서로의 온기로 이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믿기에 진탕 마시고 잠도 푹 잘 수 있고 그러다 동이 트고 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함께 무사히 즐겁게 보낸 지난 밤을 감사해 할 수 있다. 편한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 더 자연스럽고 술 마시며 웃다 울다 노래를 불러도 어느 하나 불편하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연대하며 비대면 시대의 진정한 품앗이를 하고 있었다. 서로의 집에 두고 나누고 가지고 온 '온기'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