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5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농산물의 외모지상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한 지 11년 차에 접어든다. 먼 훗날 의미 있는 자료로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SNS를 통해서 일기처럼 썼던 과일과 농업 그리고 농산물 유통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 아카이빙하기로 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글이지만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과거의 이야기들은 이미 썼던 내용이기에 실제로 글을 썼던 날짜를 별도로 기록한다. (글의 발행일과 시간차가 발생할 수 있음)
진짜 토마토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동안 과일장수를 하면서 참 많은 고민을 해오고 있습니다. 작년을 기점으로 망고 토마토, 스테비아 토마토 등의 후처리 가공 토마토에 열광하는 분위기를 보면서 어쩌면 참 어리석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회원님들 중에 가끔 '옛날 토마토 맛'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옛날 맛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그게 몇 년도였는지 당시 먹었던 그 토마토는 어떤 품종이었는지 재배 방식은 어떠했는지 등을 함께 조사해야 그 맛의 정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습니다. 추측컨대 아마도 노지재배 토마토였을 것이고, 품종은 토테랑계 완숙 토마토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한국판)를 보면 주인공 혜원의 이런 내레이션이 있습니다. "토마토는 비에 너무 약하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 성장점이 갈색으로 변하고 쭈글쭈글해지면서 그대로 시들어 버린다. 토마토는 노지재배가 쉽지 않아 늘 복불복이다. 올해는 불복."
아쉽게도 지금은 텃밭 농사를 제외하고 시중에 유통되는 토마토 중에 노지 재배 토마토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2018년도에 브런치에 '김태리의 토마토'라는 제목으로 관련 글을 올린 적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린 시절 먹던 완숙 토마토는 엄마가 설탕을 뿌려줘야 겨우 먹던(설탕 맛으로 먹는 토마토) 별로 맛없는 녀석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방울토마토가 등장했습니다. 방울토마토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한입에 쏙쏙 먹기도 편한 녀석이 단맛도 납니다. 새로운 품종은 재배적인 편의성(병충해 관리 등), 수확량, 당도 등 무언가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육종이 됩니다.
처음 나온 방울토마토는 원형계 방울토마토였습니다. 말 그대로 동그란 녀석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원형계 방울토마토도 시장에서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길쭉한 모양의 대추 방울토마토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원형계 방울토마토보다 기본적으로 당도가 더 좋거든요. (현재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는 대추 방울토마토는 베타티니라는 품종입니다.) 특이하게 토마토를 조리용이 아닌 생과로 소비하는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 소비 습관상 어쩔 수 없이 토마토도 당도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유통 방식이 비교적 단순했던 과거에 비해 요즘은 다양해진 유통 방식 탓에 재배하는 토마토도 유통 방식에 맞게 변화합니다. 택배로 토마토를 보내면 가장 큰 문제는 터지는 이슈입니다. 그래서 잘 안 터지는 경도가 좋은 토마토들이 인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도가 좋은 토마토 들은 대부분 맛이 없습니다. 흔히 유럽계 품종으로 분류되는 녀석들입니다. 당도가 좋은 녀석들은 대부분 경도가 좀 약한 편이고 보관 기간이 좀 짧습니다. 가끔은 세상은 공평하구나 싶기도 합니다. 경도도 좋고 당도도 좋은 완벽한 품종이 아직 시장에 없는 것을 보면 말이죠.
갑자기 오늘 토마토 TMI 가 된 이유는 정말 오랜만에 과일 장수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원형계 방울토마토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삭한 식감. 적당한 당도 거기에 환상적인 산미. 갈수록 토마토에서 산미를 찾기 어려운 현재의 상황 속에 이 원형계 방울토마토가 내는 환상적인 산미와 탄산감은 정말이지 저를 황홀하게 하네요.
아쉽게도 당장은 판매할 수 없는 녀석이지만 기다리다 보면 때가 있겠지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일하는 방식이 늘 이런 식입니다. 적극적인 대시보다는 자연스러운 때를 기다리는 것. 기다렸는데 인연이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