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5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농산물의 외모지상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한 지 11년 차에 접어든다. 먼 훗날 의미 있는 자료로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SNS를 통해서 일기처럼 썼던 과일과 농업 그리고 농산물 유통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 아카이빙하기로 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글이지만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과거의 이야기들은 이미 썼던 내용이기에 실제로 글을 썼던 날짜를 별도로 기록한다. (글의 발행일과 시간차가 발생할 수 있음)
오늘의 오전 간식입니다. 노지 한라봉 두 알과 귀요미 대저토마토 여덟 알.
양이 좀 많아 보이신다고요? 제가 괜히 과일장수하는 건 아닙니다. 코로나만 아니면 사무실 근처에 계신 분들 오시라고 하셔서 좀 나눠드리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좀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 사진 한 장이 저에게는 참 많은 의미를 줍니다. 계절과 제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브런치에도 제철 관련 글을 여러 편 올리기도 했고 그동안 과일을 판매하며 제철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참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갈수록 제철의 의미가 참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XX과일은 '원래' 몇 월이 '제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참 우스워집니다.
제철 과일 관련해서 아이들 교육용으로 책을 한 권 써보자는 제안을 꽤 오래전에 받았는데요. 물론 지금도 교육용의 도감 같은 책을 하나 만들고 싶은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와 지금만 비교해도 책에서만 존재하는 제철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입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먼 훗날에는 기후변화나 역사적 의미의 자료로의 의미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요.
한라봉이면 한라봉이지 노지 한라봉은 무엇이냐고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럼 한라봉이 땅에서 자라지 허공에서 자라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고요. 제가 종종 '노지'재배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농산물에 '노지'라는 수식어를 다는 것은 하늘이 뻥 뚫려있는 자연 상태의 농경지에서 재배하는 작물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비닐하우스 등의 시설에서 재배한 농산물이 아니고 말이죠.
자연 상태에서 키우면 비닐하우스처럼 가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씨에 그대로 영향을 받게 되죠. 제철의 기준은 그래서 노지재배 기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는 사실 시장에서 유행하는 신품종의 과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계속 살피고는 있지만 이걸 팔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드는 녀석들이 참 많습니다. 대신 제가 오랜 기간 동안 판매하고 싶은 과일 중에 하나라 바로 노지 한라봉입니다. 그런데 제가 판매할 만큼의 양을 재배하는 곳을 찾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친환경 한라봉 하시는 분들 중에도 노지 재배하시는 분들은 제가 아직 못 찾았습니다.
노지재배 한라봉은 요맘때 나옵니다. 시설재배 한라봉은 요즘은 설 즈음에 만나죠. 1월에도 나오고 보통 2월이 한라봉이 시장에 가장 많이 쏟아지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시설재배 한라봉은 원래 3월에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갈수록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희 세대를 포함한 윗세대에게 참외는 여름과일이었고 딸기는 봄 과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참외는 봄 과일이 되었고 딸기는 겨울 과일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봄에 나오는 '육보'라는 딸기 품종이 그래서 참 갈길을 잃은 외로운 기러기 신세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참 매력 있고 맛있는 딸기 품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과일에는 소비지가 체감하는 계절 지수가 분명 존재합니다.
한라봉은 완벽한 겨울 과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봄이 되어 나오는 만감류들이 약간 계절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요맘때 나오는 노지재배 한라봉은 시설 재배에서 아무리 맛있게 키운 한라봉에 나오지 않은 깊고 풍부한 맛과 향이 존재합니다. 겨울이 아닌 시즌에 시설재배 감귤이 아무리 당도를 끌어올려도 겨울에 노지에서 자란 감귤의 맛을 따라올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많은 양이 아니더라고 회원님들께 꼭 한 번은 소개해서 맛 보여드리고 싶은 저의 과일 버킷리스트 최상위에 있는 녀석이 바로 노지 한라봉입니다.
토마토는 윗단으로 갈수록 크기가 좀 작아지는 게 정상이라 수확 막바지에 접어들면 기존에 판매하는 사이즈의 범위를 넘어선 조금 많이 작은 녀석들이 많이 수확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저 밀폐 용기에 다섯 알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여덟 알이 들어가네요.
자연스러운 것들이 시장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는 어색하고 비정상적으로 취급받는 현실. 갈수록 심해지겠지만 자연스러움과 상식을 지키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