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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복숭아는...

2021.06.30

by 공씨아저씨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농산물의 외모지상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한 지 11년 차에 접어든다. 먼 훗날 의미 있는 자료로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SNS를 통해서 일기처럼 썼던 과일과 농업 그리고 농산물 유통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 아카이빙하기로 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글이지만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과거의 이야기들은 이미 썼던 내용이기에 실제로 글을 썼던 날짜를 별도로 기록한다. (글의 발행일과 시간차가 발생할 수 있음)





1년이라는 시간은 길면 긴 시간이지만 참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돌아오신 것만 해도 기적인데 아직은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일요일에 수확해서 월요일에 발송한 마흔두 박스의 미황 복숭아. 올해의 첫 복숭아이자 마지막 복숭아가 되었습니다. 첫 수확하는 일요일에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전화를 세 번은 드린 것 같습니다. 조금씩 불안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도저히 못하실 것 같다고...


회원님들께 이 소식은 또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이미 올해 9월 수확하는 복숭아 주문까지 다 받아놓은 상태인데 이 많은 금액을 어떻게 다 환불처리를 진행할지 아찔했습니다. 마흔두 박스의 복숭아를 보내는 게 맞는지 안 보내는 게 맞는지 5분이라는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으며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누군 보내고 누군 안 보내고 환불 처리하려면 전체 취소 처리하는 게 부분 취소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기 때문에 그냥 보내지 말까 잠깐 고민도 했습니다.


보통 하루에 150~200박스는 수확을 하는데 하루 온종일 수확해서 나온 복숭아가 고작 마흔두 박스. 어떻게 해서든 해보시려고 안간힘을 쓰셨을 그 모습을 생각하니 이 마흔두 박스의 복숭아는 회원님들께 전달해드리는 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회원님 이름을 보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모를 개인적인 친분이 반영이 될까 싶어서요. 주문하신 순서대로 끊어서 배송 리스트를 만들어서 출고를 시켰습니다. 저는 복숭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한 박스를 집으로 받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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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박스를 여는데 올해 유독 복숭아 향이 꿀처럼 달달하네요. 작년에 복숭아 판매를 한 해 쉬며 복숭아를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옆동네 동종 업계 아저씨가 먹으라고 몇 개 준 것도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입에도 대지 않고 1년을 버텼습니다. 2년 만에 입에 넣어보는 복숭아입니다.


싱크대에서 복숭아 껍질을 까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흐르네요.


복숭아 환불처리를 위해 아침에 은행에 가서 1일 이체 한도를 상향 조정하고 왔습니다. 동종 업계 계신 분들이 아니면 환불처리가 왜 복잡한지 잘 모르시겠지만 어제부터 시작한 환불 파티 2일 차입니다. PG사에서 승인 처리하면 이번 주 안에는 완료될 것 같습니다. 남의 돈은 1원도 가지고 있으면 불안한 성격이라 회원님들 결제 건은 하루라도 빨리 환불처리 진행해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복숭아 소식을 들은 동료 한 명이 저녁에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저를 차에 태워 어디론가 갑니다. 계곡이 있는 무슨무슨 산장 같은데로 절 끌고 가서 능이백숙을 사주네요. 비가 온 직후라 공기도 좋고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이 좋더군요.


청도로 농활대라도 모아서 가서 우리가 복숭아 따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씀해주시는 회원님들 댓글에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올해도 주문해놓은 복숭아 못 먹게 되었다고 짜증 섞인 말투의 댓글로 보입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늘 같지는 않을 테니까요.


제정신으로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필요할 듯합니다. 수일 내로 청도에 한번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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