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는 석진님이 낯설다
내 생활의 작은 변화
2018년 11월 나는 공공그라운드라고 하는 대학로에 위치한 코워킹 스페이스에 입주했다. 그 이후 나의 삶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알다시피 코워킹 스페이스는 많은 입주사들이 한 공간에 적을 두고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그로 인해 다양한 업종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쳐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살아간다. 사람과의 대면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사실 입주여부를 많이 고민했지만, 내가 입주한 대학로의 공공그라운드라는 곳은 다른 코워킹 스페이스에 비해 지리적 조건 그리고 건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 공간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한 분위기가 이곳에서의 생활을 결정한 이유였다.
코워킹 스페이스에는 공간을 관리하고 기획하는 커뮤니티 매니저가 존재한다. 입주사들의 불편한 점들을 수렴하고 해결해주기도 하고 대관 및 행사 기획의 업무 등을 맡아서 하시는 분들인데, 가끔 이분들이 전달사항을 전하러 오거나 불편 사항에 대해 여쭤보는 경우가 있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이 분들의 성함을 모르고 있었다. 커뮤니티 매니저 2명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석진’님’이라고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석진님. 석진님. 석진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석진님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손발이 오그라 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으로 느꼈던 순간이다. 왜 나는 이런 기분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나는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님
'님'의 사전적 의미는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씨'보다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고 되어있고 사실 '님'이라는 호칭 자체는 어색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름 뒤에 붙는 '님'은 이보다 더 낯설 수가 없었다. 점하나 만 더하면 남이 되는 이 님이라는 글자가 난 왜 그리 어색했을까?
직장 생활에서 보이는 요즘 세대들의 특징 중 하나가 '수평적 평등’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특징 중에 하나가 호칭인데 최근에는 대기업에서도 직급을 없애는 회사들이 눈에 띈다. 직급 대신 이름 뒤에 '님'자의 호칭을 통해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관계가 아닌 등등한 사람대 사람의 관계로 진전되는 것이 이들이 '님'을 사용하는 이유라고 들었다.
처음 석진님이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는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아주 많이 이상했다. 이 느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어색함이기만 했을까? 하나의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꽤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음에는 분명했다. 몇 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나는 ‘님’이라는 호칭이 무척 간지러웠다. 님이라는 호칭은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그런 트렌디한 유행쯤으로만 여겼던 것 같다. 내가 평생 이 호칭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가지 스스로 걱정이 되었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처음 석진님이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그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내 몸 뼛속까지 꼰대스러움과 권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사장님, 대표님이라고 불리는 게 싫어서 사람들이 나를 '공씨아저씨'로 부르게 하고 싶어서 회사 이름도 공씨아저씨네로 지은 나이기에 말이다.
암튼 내 이름 뒤에 붙은 '님'은 더치페이만큼 낯선 것임에는 분명했다. 나는 아직도 ‘직함’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것이 익숙한 세대다. 일적으로 만난 협력사의 직원들을 부를 때도 XX 대리님. XX과장님. XX대표님 등등으로 부르지 XX님으로 불러본 적은 없다. 반대로 나와 커뮤니티 매니저의 나이 차이만큼의 나의 윗세대의 누군가를 나는 누구누구’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자문을 해보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아이러니하지만 묘한 쾌감도 있었다. 20대와 내가 동등한 관계가 된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들이 조금 부럽기도 했고 이제 나도 평생 나와는 놀아줄 일 없을 것만 같던 20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은 느낌 때문이기도 했다.
나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님'이라는 호칭만은 아니었다. 서로 간에 부를 때 본명이 아닌 별명을 부른다는 사실이었는데 공공그라운드 커뮤니티 매니저의 정체는 '코난'과 '우주'다. 언젠가 코난'님'에게 혹시 '미래 소년 코난'이냐고 물어봤더니 '명탐정 코난'이라는 대답은 나를 더욱 난관에 빠뜨렸다. 솔직히 고백하는데 나는 아직 '코난'과 '우주'를 구별하지 못한다. 본명은 알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본명이 아닌 '코난'과 '우주'로 불리고 싶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공공그라운드 생활 6개월째. '님'이라는 호칭에 더 이상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지는 않는다. 공공그라운드가 나를 변화시킨 작은 부분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는 상식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비상식의 사회에서 살고 있었기에 상식으로 가는 작은 과정들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오늘은 별명을 하나 지어볼까 한다. 무엇이 좋을까?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채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8년 차에 접어든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농산물 유통구조는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외모 지상주의'가 농산물 시장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했다. 나는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농산물의 외모지상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아울러 농부들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가치’를 ‘같이’할 수 있도록 농부의 마음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려고 한다. ‘농사 안 짓는 농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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