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씨아저씨 Apr 02. 2020

디테일이 세상을 변화시킬까?

작은 움직임이 만들어가는 변화

사무실이 위치한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곳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이런 새로운 포스터를 만난다. 4월의 포스터가 바뀌었다. 사실 종이 포스터를 볼 때마다 예쁜 종이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능하면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라 10년 동안 과일을 팔면서 과일 상자 안에 과일 보관법, 맛있게 먹는 법 같은 흔한 리플릿 한번 만들어 보낸 적이 없는 이유도 굳이 나까지 예쁜 종이 쓰레기를 만드는데 동참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온라인 기반 회사들은 가능한 모든 전달을 온라인에서 끝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 포스터를 보며 '디테일'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한다. 이럴 때면 난 역시 사업을 할 스케일의 사람은 아니라는 걸 거듭 확신하곤 하는데, 보통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큰 그림을 잘 그린다. 작은 것들을 챙기기보다는 굵직굵직한 큰 그림을. 난 세세한 작은 디테일이 충족되지 않으면 큰 그림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격 인터라 사업가가 되기에는 글러먹은 듯. 그러나 언젠가는 디테일이 승리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허망한 꿈은 여전히 꾸고 있다.


최근 아파트 분리수거 안내문에는 종이 박스를 배출할 때 박스에 붙어 있는 박스 테이프와 택배 송장 같은 것을 완전히 제거하고 짝 펴서 배출하라고 안내가 되어있다. 우리 아파트의 경우 이 방식이 실행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어제 분리수거장에 가보니 실행된 기간에 비해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는 듯해 보였다. 박스 테이프 제거하고 박스 버리는 게 습관이 되면 별 일 아니지만 지금까지 늘 그냥 버려 버릇하다 보니 이것조차 귀찮은 일로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난 이런 작은 움직임들이 변화의 시작이고
앞으로 분리수거 문화를 좀 더
디테일하게
다듬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작년 봄 이탈리아 피렌체에 갔을 때 거리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 품목을 사진으로 세세하게 표시해서 부착해 놓은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가 재활용을 비교적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이것이 재활용이 되는 쓰레기인지 일반 쓰레기인지 비닐인지 플라스틱인지 확실하게 머릿속에 잘 안 잡혀 있는 것들이 많다. 물론 기준은 텍스트로 명확히 나와있지만 말이다.



칫솔은? 라이터는? 빨대는?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분리수거 항목을 정말 디테일하게 사진 혹은 그림으로 예쁘게 디자인해서 배포를 한번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물론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혼자 할 수는 없고 내용을 정리해서 정부 관련 부서에 제안해볼 생각이다.


<볼드저널> no16 '필환경 생활'


실제로 분리수거되는 품목 중에 재활용되지 않고 매립되거나 소각되는 품목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어찌 보면 불필요한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재활용 가능한 품목에 대한 확실한 안내가 선행되어야 하고, 좀 더 철저한 분리수거를 실행해야 하며, 아울러 재활용될 수 있지만 처리의 문제로 매립 혹은 소각되는 것들을 재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쁘자고 붙인 스티커 하나가 재활용될 수 있는 자원을 일반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난 그냥 상식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실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몽상가나 이상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최근 들어 많이 든다. 새벽 배송 오픈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화물차 이동량의 증가로 인한 탄소 배출에 대한 문제와 새벽에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 생각이 먼저 났고, 배달 서비스를 바라보며 일회용 쓰레기 배출량이 엄청날 텐데 비즈니스의 주체는 이러한 문제를 왜 고민하지 않지? 정부는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나 자신을 보면서 말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라는 속담이 있다. 모두들 그 의미를 알다시피 다소 방해되는 것이 있다 해도 마땅히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편리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론칭하기에 앞서 이제 우리는 구더기를 무서워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볼드저널> no16 '필환경 생활'편에 인터뷰이로 나섰다. 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쓰레기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새벽 배송은 이제 K사의 트레이트 마크를 넘어 새로운 배송의 형태로 우리 삶에 깊숙하게 침투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송 방식이 일회용 쓰레기를 증가시킬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많은 서비스가 그래 왔듯이 장을 담그기 위해서는 구더기쯤은 무시해온 것이 우리의 민낯임을 부인할 수 있을까?




나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채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 차에 접어든다. 택배 방식으로 과일을 팔면서 과연 내가 팔고 있는 것이 과일인지 쓰레기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쓰레기를 파는 과일장수'라 명명하고 가급적 1회용 플라스틱 포장재들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10년째 고군분투 중이다.  


Copyright 2020  공씨아저씨네 All rights reserved.

작가의 이전글 꼭지를 만났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