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제철과일
나는 ‘공씨아저씨네’라는 온라인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과일 장수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채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7년 차에 접어든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농산물 유통구조는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외모 지상주의'가 농산물 시장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크기'와 '모양' 중심이 아닌 과일 본연의 '맛'과 '향' 중심의 조금 다른 과일 유통을 시작했다.
얼마 전 개봉한 임순례 감독의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 2018).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국내 제작 소식을 처음 들은 이후 오랜 시간 기다렸던 영화다. 일본의 원작과 비교하며 아쉬움의 평을 남기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과일 장수인 나는 영화 속에 사과 밭과 토마토 밭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혜원(김태리)과 혜원의 엄마(문소리)가 무더운 여름날 나무 밑 그늘진 평상에서 함께 토마토를 먹는 장면이었다. 토마토 신(scene)은 원작인 일본판에도 등장하고 한국판에서도 거의 그대로 옮겨왔지만, 한국판의 느낌은 원작과 사뭇 달랐다. 장면에서 느껴지는 계절감으로는 시원한 수박이 생각나는 한 여름 무더운 날씨였지만 엄마와 딸은 밭에서 갓 수확한 미지근할 것 같은 완숙 토마토를 너무나 시원하게 먹는 것이 아닌가?
빨갛게 완숙된 노지 재배 토마토의 맛을 아는 나로서는 여름을 상징하는 제철 과일(채소)을 수박으로 대체하지 않고 토마토를 그대로 등장시킨 것은 참 잘 했다 싶었다. '제철'이라는 두 글자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In season
토마토는 생과로 먹는 것보다 열을 가해 조리해서 먹는 게 더 건강에 좋다는 언론 보도와 쏟아지는 기사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는 너무나 다디단 과일과 채소들이 많아져서 토마토는 더 이상 생과로 먹을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제 토마토는 생과로 먹는 비율보다는 갈아먹거나 조리해서 음식으로 먹는 경우가 더 많다.
"토마토는 비에 너무 약하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 성장점이 갈색으로 변하고 쭈글쭈글해지면서 그대로 시들어 버린다. 토마토는 노지재배가 쉽지 않아 늘 복불복이다. 올해는 불복." - 리틀 포레스트 中혜원의 내레이션
토마토는 엄밀히 말해 채소에 속하고, 과채류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통상 과일 가게의 취급 품목이기도 하기에 여기서는 그냥 과일로 통용하여 칭하도록 하겠다. 오늘의 이야깃거리는 '제철 과일'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과일의 제철이 과거와 달라진 이유를 혜원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의 첫머리를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의 토마토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진짜 맛있는 토마토를 먹어본 경험이 있는가? 대저 짭짤이 토마토 같이 당도가 높은 특수한 토마토 말고 일반 완숙 토마토 말이다. 토마토 자체를 안 먹거나 맛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채소 즈음으로 여기는 사람이 꽤 많다. 연령대가 있으신 분들은 지금 토마토들은 너무 맛이 없다며 어린 시절 밭에서 따먹던 토마토 맛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런 그리워할 비교의 맛 조차 경험이 없다. 텃밭 농사로 토마토를 수확해본 경험이 있다면 한 여름 노지 토마토의 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농사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리틀 포레스트의 토마토 장면에 그다지 공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지 재배'라는 농부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나 쓰는 용어 자체가 일단 생소했을 것이기 때문일 텐데, 리틀 포레스트의 토마토 장면을 언급한 이유는 '토마토를 노지에서 재배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노지재배(露地栽培)는 자연 상태의 농경지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농업 방법으로 시설 재배(비닐하우스 재배 등)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면 된다. 시설 재배는 비를 통제할 수 있고, 가온(加溫)을 통해 온도를 통제할 수 있지만 노지 재배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외부 시설 없이 키워야 하기에 오직 자연환경에 의존해야 한다.
노지 재배 = 제철(In season)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마트에서 사 먹는 토마토는 노지 재배한 것일까 아니면 시설 재배를 한 것일까? 답은 시설 재배(하우스에서 키운) 토마토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의 기후상 노지 재배 토마토는 7월 이후에 수확하는 것이 정상이다. 7~8월이 제철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사용하게 될 '제철'이라는 용어에 대한 정리를 잠시 하고 가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제철'의 의미는 노지재배 기준으로 작물을 수확하는 시기라고 보면 된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딸기의 제철은 5월이고 토마토의 제철은 7월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딸기는 11월부터 나오고 토마토는 일 년 365일 만날 수 있다.
혜원의 내레이션처럼 노지 재배 토마토는 복불복이다. 아쉽게도 대부분 불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기후상 6~7월이면 찾아오는 장마때문이다. 이건 비단 토마토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노지에서 재배하는 모든 과일과 채소는 여름 장마때문에 늘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일본판의 원작 리틀 포레스트에는 그래서 비가 많이 오는 코모리에서는 대부분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를 재배한다는 부연 설명이 있지만 한국판에서는 빠진 것이 조금 아쉽다. 우리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위의 사진은 수원 당수동 공동 텃밭에서 직접 수확한 토마토다. 열과(터져서 갈라진)도 많이 발생하고 외관 상태도 좋지 못하다. 시장의 선별 기준에서 보면 상품성이 없는 토마토다. 팔 수 없는 토마토라는 이야기다.
노지재배는 없다
그럼 이제 우리 모두 소비자가 아닌 토마토를 재배하는 농부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해보자. '복'일 수도 '불복'일 수도 있는 노지 토마토 농사를 선택하겠는가? 한 해 수익이 0원이 될 수도 있는 이 위험한 도박을 말이다. 개인적으로 먹는 용도로 집 앞마당에 키우는 것이 아닌 재배해서 수익을 내야 하는 전업농(專業農)이라면 선뜻 노지 재배 토마토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노지 토마토가 제철 토마토이고 하우스 토마토보다 더 친환경적이고 더 맛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유통을 거쳐서 우리가 먹는 토마토는 모두 시설 재배로 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이제는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가온을 해서 키우는 경우도 많아졌다. 마트에 가면 일 년 내내 토마토를 만날 수 있는 게 이상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던가? 이제 토마토는 일 년 열두 달을 먹을 수 있는 채소(과일)가 되었다. 노지 재배에서 시설 재배로 넘어가면서 제철은 변화했다.
토마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겠다. 우리가 먹는 토마토는 유럽종 토마토이거나 일본 도태랑 계열 토마토가 대부분이다. 유럽종 토마토는 색이 빨갛고 과육이 단단한데 반해서 맛은 생과로 먹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그래서 주로 조리할 때 사용한다. 흔히 햄버거 광고에 나오는 빨간 토마토는 모두 유럽종 토마토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면 도태랑 계열의 토마토는 우리가 생과로 먹는 가장 흔한 토마토로 맛은 좋은 반면 완숙되면 과육의 경도가 약해 유통과 택배 배송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이 많아 갈수록 유통인들이 취급을 꺼리는 품목이기도 하다. 유통인들이 취급을 꺼린다는 것은 농부들도 재배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토태량 계열의 완숙토마토도 100% 완숙되면 유럽종처럼 새빨갛지는 않더라도 빨갛게 되지만 보통 위의 사진 정도의 숙기일 때 수확한다. 사실 이 정도 상태도 많이 익어서 딴 거다. 수확하고 하루 이틀이면 빨개진다. 보통 대형 유통업체에서 초록색 토마토를 원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조기 수확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유통인의 입장에서는 오랜 기간 판매를 해야 하다 보니 초록색 토마토를 수확해서 유통과정에서 후숙해서 판매하는 관행이 일반화될 수밖에 없었고, 빨간 완숙토마토는 점점 취급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야 할 때 따지 않고 너무 일찍 수확한 토마토를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토마토 맛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맛있는 토마토를 먹어본 경험이 있어야 토마토 맛도 알 것 아닌가?
'무조건 터져가는' 시리즈로 도태랑 계열의 토마토를 완숙해서 판매하는 무모하지만 의미 있는 도전을 하고 있는 유통인도 간혹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은 완전히 다 익었을 때 과수원에서 바로 따먹는 과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할 기회가 적다. 아쉽지만 포기할 부분은 확실히 포기할 필요도 있다.
완숙되었을 때 수확한 과일은 맛있을 수밖에 없다. 그 과일의 본연의 맛과 향이 그대로 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혜원이 밭에서 갓 따서 먹은 빨간 완숙토마토의 장면을 부러워했던 이유가 이제 조금 설명이 되었을까? 그러다 보니 생산지에서도 도태랑 계열보다는 유럽종 재배를 선호하고, 갈수록 완숙 토마토보다는 경도도 좋고 당도도 좋은 방울토마토 재배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 실정이다.
나 역시 토마토를 판매하면서 어느 정도의 숙기에 토마토를 수확해서 판매를 하는 것이 최선인가? 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내리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 최대한 익혀서 보내자라는 원칙은 세웠지만 나와 같이 중간 유통을 거치지 않고 산지에서 바로 수확해서 당일 출고하는 방식으로 판매를 하더라도 100% 익었을 때 수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택배가 배송되는 하루 동안에도 빠른 속도로 후숙이 되는 탓에 빨간 토마토를 택배로 보냈다가는 100% 다 터져서 배송이 되기 때문이다. 토마토는 여전히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가 시중에서 사 먹는 토마토 중에 노지 재배 토마토는 없다고 보면 된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시설 재배 토마토는 가온을 하지 않으면 5월부터 수확을 하는 것이 정상이고, 가온을 해서 키운 토마토는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까지 수확을 한다. 2018년 현재 기준으로 토마토의 제철은 4계절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참고로 시설재배 토마토는 6월이 제일 맛있다.
이번에는 딸기다. 딸기 역시 채소다. 토마토와 마찬가지로 통상 과일의 범주안에 넣기에 과일로 통용해서 호칭하겠다. 딸기의 이야기는 시작점이 조금 다르다. 딸기를 판매하다 보면 아직도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계시다.
겨울에도 딸기가 나오나요?
우리가 겨울에 딸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아직 딸기의 제철을 겨울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는듯하다. 사실 나 역시 그랬다. 제철 과일 판매를 표방하고 있는 나도 딸기를 판매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겨울을 딸기의 제철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딸기의 제철은 겨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앞서 토마토의 예처럼 노지에서 딸기를 재배하게 되면 통상 5월을 딸기의 제철로 보아야 하는데 일단 단위 면적당 수확량의 생산성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고, 요즘처럼 온라인 농산물 거래가 활발한 시점에 딸기를 택배로 배송하기에 5월의 날씨는 너무 따듯하다. 아무리 잘 포장해서 택배 발송을 하더라도 가정에서 택배 박스를 열게 되면 딸기는 거의 물러져 있을 것이다. 판매하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과일의 제철이 바뀐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원인이 있다. 노지 재배에서 시설 재배로의 변화 그리고 수입과일 혹은 다른 계절 과일과 경쟁하기 위한 품종의 변화 등이 큰 이유인데 딸기는 이 두 가지가 다 물려 있는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통상 봄에는 국내에서 재배되는 과일이 별로 없기에 관세가 풀리는 3월은 수입산 오렌지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시기다. 이제는 국내산 과일이 별로 없는 봄철은 미국산 오렌지의 제철로 둔갑한다. 한미 FTA 체결 당시 35%였던 미국산 오렌지 관세는 해마다 줄어 2018년 3월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딸기뿐만 아니라 국내산 감귤과 한라봉, 천혜향 등의 만감류도 오렌지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딸기는 오렌지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풀리기 전인 겨울에 재배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겨울에 재배할 수 있는 촉성재배 품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제 딸기는 국내산 감귤의 경쟁자도 되어버렸다.
촉성재배[forcing culture, 促成栽培, そくせいさいばい]
자연의 상태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시기에 온실이나 온상 안에 태양열이나 인공열을 가하여 채소나 화초 따위를 재배하여 보통 재배에 의한 것보다 속히 거두어들이는 재배법. 작형을 세분할 경우 촉성재배는 가온을 하여 보다 빨리 재배, 수확하는 방법. 노지, 억제, 촉성, 반촉성, 조숙재배로 나뉨. 속성재배.
(농업용어사전: 농촌진흥청)
품종의 변화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일본 컬링 국가대표 선수들이 맛있게 먹은 딸기가 한국 딸기로 알려지면서 한국 딸기의 원조가 일본이라는 원조 논쟁이 잠시 있었다. 결론은 아이고 의미 없다이다. 그 문제의 딸기는 '설향(雪香)'이라는 품종으로 논산에서 육종 된 국내 품종이다. 우리가 지금 제일 많이 먹고 있는 딸기 품종이기도 하다.
물론 설향의 모태인 장희와 육보(레드펄)가 일본 품종인 것은 맞지만 그 논리라면 일본은 북아메리카 동부지역 원산의 Fragaria virginiana와 남아메리카 칠레 원산의 Fragaria chiloensis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 한국 딸기가 그만큼 맛있다는 반증의 해프닝 정도로 보면 될 일이다.
국내 딸기농가 재배면적의 90%를 일본 품종이 차지하던 2002년만 해도 국내 육성품종은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수확량이 좋은 장희(章姬), 병충해에 강하고 경도가 좋은 육보(레드펄) 두 품종 모두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이다. 설향과 매향은 국내 육성 품종이다.
참고기사 (한겨레 신문 2013. 12. 1)
우리나라가 ‘국제 식물 신품종 보호동맹’(UPOV)에 가입하면서 품종 사용료(로열티) 문제까지 불거지며 매년 30억~60억 원에 이르는 딸기 종자 사용료가 일본으로 건너갈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논산 3호 '설향(雪香)’이었다.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설향은 충남농업기술원 논산딸기시험장에서 김태일 시험장장이 연구원들과 함께 육종한 품종이다. 김태일 시험장장은 70년대의 녹색혁명을 이끌었던 통일벼의 예를 들며 통일벼 이후 국산 품종이 전국으로 퍼진 것은 딸기가 처음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딸기의 품종 국산화를 이끈 선두주자였다.
설향이 국내 농가에 보급된 뒤 해마다 일본 품종들을 10% 넘게 밀어내면서 재배면적이 급격히 상승했다. 3년 만인 2008년에는 단일 품종으로는 일본의 레드펄을 제치고 딸기 재배면적 기준으로 국내 1위 품종에 올라섰고 2014년에는 무려 75.4%의 점유율을 보였다. 2006년 설향의 출현 전까지 국내 딸기 시장을 90% 가까이 차지했던 일본 품종들은 이제 우리나라의 딸기농가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그래서 설향은 단순히 하나의 딸기 품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지금 먹는 딸기의 거의 대부분은 설향이다. 설향이 농가에 폭넓게 보급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병충해에 강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특히 유기농 재배를 하는 농가 입장에서는 기존 딸기 재배를 해오면서 병충해 피해로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설향은 천군만마였다.
물론 품종의 다양성, 먹을거리의 다양성 측면에서 보자면 설향이 독점하고 있는 국내 딸기 시장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설향의 시장 독점에는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있다. 일본 품종인 장희나 도치오토메 그리고 한국 품종인 매향, 금향 같은 품종도 충분히 맛있는 딸기다. 설향은 촉성재배 품종으로 겨울철에 수확할 수 있도록 육종 된 품종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설향의 제철을 봄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참외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참외는 3월부터 만나볼 수 있다. 참외의 제철이 당겨진 것 역시 수입과일의 영향과 참외의 최대 라이벌 수박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참외는 여름 과일의 대명사 수박이 등장하면 시장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수박이 나오기 전에 승부를 보아야 하는 운명에 처했기에, 살아남기 위해 수확시기를 조금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참외의 제철은 봄으로 보는 것이 맞다. 3월과 4월의 참외가 제일 맛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토마토도, 딸기도, 참외도 노지에 심어서 원래 제철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잃어버린 제철을 찾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택배를 통한 온라인 농산물 시장도 없고, 오직 시장에서 장을 보던 과거로 돌아가거나 로컬 푸드가 활성화되어 지역 농산물이 지역에서 다 소비될 수 있는 구조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울과 대도시 중심의 생활권으로 형성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특수성 그리고 좁은 국토 면적을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 사이 지구의 기후도 많이 변화했다.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나의 결론은 이렇다. 이건 정답이라 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인 타협점이다. 2018년 현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딸기의 제철은 겨울이고, 참외의 제철은 봄이다. 이건 좋고 싫음의 선택의 문제도 아니고 제철이 바뀌는 것을 '문제(問題)'로 치부할 일도 아니다.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일 일이다. 농부는 농사를 통해서 소득을 창출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하며 그래야 농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지 않은가?
먹거나 혹은 굶거나
가끔 '난 봄에 난 딸기만 먹겠다' 하시며 겨울 딸기는 가짜이고, 봄딸기가 진짜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봄에 먹을 수 있는 딸기를 심어달라고, 여름에 먹는 참외를 심어달라고, 노지 토마토를 심어달라고 우리가 농부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과일 장수인 나 역시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농부와 협의해서 여름 참외를 시도해 본 적도 있고, 노지 토마토를 시도해 본 적도 있다. 결과는 폭망이었다. 모두 수확에 실패했다. 우리의 뇌에 자리 잡은 제철을 바꿔야 할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가 되지 않는다면 굶거나 직접 농사를 지어보시길 바란다. 그 방법 외에는 없다. 노답이다.
나는 이 땅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농산물의 외모지상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아울러 농부들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가치’를 ‘같이’할 수 있도록 농부의 마음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려고 한다. ‘농사 안 짓는 농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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