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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노을 Aug 28. 2020

대학교만 세 번째 (1)

서른둘의 나이에 첫 번째 책 출판을 시작으로 지난 5년간 나는 세 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남들은 한 번도 끝내기 어려운 석사 학위를 나는 두 개나 가지고 있으니 어찌 보면 고학력 군에 속하는 유능한 인재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람들은 볼 수 없는 나만의 무수한 실패의 연속들이었다.


자그마한 시골 중학교지만 나는 꽤나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했다. 전교 1등을 하다가 전교 12등으로 밀려났다고 교무실에 끌려가서 담임 선생님한테 죽도록 혼난 일도 있었으니 나름대로 유망주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때는 선생님의 매질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더 잘 키워서 세상 말로 성공하는 사람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성적을 유지하고 나니 나는 200점이 만점인 내신에서 195점을 맞게 되었다. 당시 시내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서 커트라인이 170점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나는 원하는 학교를 편안히 지원해서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외아들인 나에게 얼마나 큰 기대가 있으셨을까? 그런데 나는 과감하게 중학교와 붙어 있는 옆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인문계도 아니었고 정보과학고등학교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는 꼴통, 깡패 학교라고 불리는 실업계 고등학교였다. 모두가 의아해했고, 선생님도 말렸지만 나와 함께 하던 부랄 친구들이 모두 그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나도 친구 따라 강남을 갔다.


학창 시절은 즐거웠다. 아마 그 친구들과 함께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런 활발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했을 확률이 더 높다. 친구들과 여러 환경들 덕분에 나는 불량학생이 많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다르게 즐겁고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 남아 공을 차던 친구들과 진로가 다르게 설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비록 실업계였지만 대학을 가기를 원했고, 내가 명문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선택했던 친구들은 모두 취업을 하기에 바빴다. 나는 그렇게 대학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뒤늦은 준비 탓에 원하는 4년제 좋은 대학교의 문턱에도 걸치지 못하는 쓰라린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언제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내게 대학 낙방은 실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에게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생의 첫 번째 실패가 대학교 입학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학과를 살려 국립 전문 공업대학(3년제)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할 수 있었고, 나의 첫 번째 대학생활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대학의 문턱을 밟은 나는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애당초 컴퓨터 공학은 나에게 맞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터라 수업도 지지부진하게 간신히 따라갔다. 1학년 2학기가 끝날 무렵 어머니의 급작스런 대장암 발병에 병간호를 목적으로 학교에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나는 투수들이 경쟁하듯 상상할 수 없는 방어율을 내 성적표에서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회복 때까지 학교를 휴학하며 도망치듯 군대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2년간의 군 복무 시절은 참으로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시절들이었다. 누구보다도 거칠어질 수 있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첫 번째 내렸던 결정이 대학을 그만두자. 아니 다른 대학을 가자! 였다.

(놀라운 사실은 군에서 전역하자 학교는 어느새 4년제 국립 대학교와 통합하여 어엿한 4년제 대학교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


군인 물이 다 빠지지 않은 까까머리의 나는 당당하게 자퇴서를 제출하고 첫 번째 대학교와 그렇게 작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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