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문장 속 낯선 대화
작은 골목 끝,
간판이 거의 지워진
헌책방이 있다.
문을 열면
종이 냄새와
오래된 먼지가 섞여
코끝을 간질인다.
그날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그곳에 들렀다.
책장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다
낡은 시집 한 권을 꺼냈다.
표지는 바래 있었지만
제목은 또렷했다.
〈바람의 자리〉,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멈췄다.
책을 펼치자
페이지 한가운데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우리가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그 자리는 오래 남는다.’
연필로,
아주 가늘게,
흔들리지 않은 필체였다.
그 밑줄 아래엔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실수일까, 의도일까.
그 점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책장을 넘길수록
곳곳에 밑줄이 있었다.
어떤 건 진하게,
어떤 건 거의 사라질 듯 연하게.
그리고 마지막 장 끝에는
한 줄의 짧은 메모가 있었다.
‘이 시를 다시 읽는 사람에게 — 그때의 바람을 전합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책장이 잠시 멈춘 듯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시작된 문장이
시간을 건너
내 앞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책등을 쓰다듬었다.
누군가는 밑줄을 남겼고,
나는 그 밑줄을 읽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