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_양귀자
* 다소 긴 글입니다. 장편소설을 읽었더니 인상적인 부분도 많거니와, 너무 감명깊게 읽어서 글이 길어졌는데 여러 글로 나눠 발행하고 싶지 않아서 한 페이지에 다 담았습니다.
: 2024.07.16 처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히 몰입하여 읽은 책을 다 읽었다
도서관에서 정말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한 권을 빠르게 읽어내고 책 읽기에 재미가 들린 나는 도서관을 돌어다니며 사전정보 없이 아무 책이나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책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고, 우연히 읽게 되었다. 첫 장을 넘기자 마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난 독서에 큰 재능도 없고, 독서가 취미는 아닐 뿐더러 집중력이 좋은 편도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약 4일에 걸쳐 매일매일 꾸준히 읽었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훨씬 즐거워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책을 꺼내 읽었다. 10분이라도 쉬는 시간이 있다면 무조건 이 책을 읽었다. 다른 모든 것보다 이 책이 우선이 되었던 4일을 보내고,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스스로에게 꽤 놀랐다. 평범하디 평범한 나마저 끌어당길만큼 매혹적인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책을 기록한다.
: 마음속에 또렷이 기억하여 두다.
: 삶에 대한 가치관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준 구절. 마음을 울리는 깨달음을 얻었던 구절
9p.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는 삶이 원래 '고통'이라고 했다. 삶이 행복한 것이 변수이자 예외이고, 삶의 기본 구조가 고통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행복한 순간에 더 감사해지고, 고통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원래 그러한 것을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싶어서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구절을 바라본다면 삶이란 원래가 절망으로 가득찬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들은 전부 당연히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것일 테지.
17p. 나는 이 세상이 아직 웃음의 차례가 아니라고 믿는다. 웃을 수 있는 고등동물이 인간이라지만 과연 그런가. 나는 인간의 웃음을 믿지 않는다.
삶이 원래 고통으로 이루어져있고, 절망으로 가득차있다는 위의 얘기와 이어진다. 이 세상이 웃음의 차례 속에 있다면 이토록 행복이 우리 삶에 예외로서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웃음은 어쩌면 생존수단으로서 인위적으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찾아온 순리로서의 차례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 차례가 오지 않아 조급해진 인간이 급히 끌어들인 것으로 바라본다면, 현대인이 웃음으로 자아내는 따뜻함에 인색한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8p. 얼굴이 붓고 몸이 붓듯이 목소리도 상처를 입으면 부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알았다.
아무리 애써도 가려지지 않는 목소리의 붓기가 상대에게 닿아 연민으로 키워진다면 사랑이겠지. 사실 상대에게 닿는 것까지만으로도 행복이다. 어떤 이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알아차리고도 모른 체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붓기를 통해 조심스럽게 요청해보는 나의 애타는 부름이 상대에게 제대로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32p. 나는 지금 그 청년의 평이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뚤어진 이 시대에 보통의 삶, 보통의 도덕성으로 살 수 있다는 것만도 굉장한 미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다. 나는 고등학생 때, 가정형편이 좋았던 적이 없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을 갈망했다. 보통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가냘픈 외줄 위에 서 있던 기분이어서 조금만 휘청하거나 조금만 헛디뎌도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외줄 타기에서 필사적으로, 죽을 각오로 버틴 덕에 지금 그나마 평범과 가까운 삶에 다가섰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가난한 대학생이라, 통장 잔고에는 겨우 30만 원 뿐이고 이것으로 한 달을 생활해야 한다. 카페에 가고 싶어질 때면 스스로에게 눈치를 보고, 마음편히 간식하나 사 먹지 못하며, 하고 싶은 공부도 미뤄두고 당장 할 수 있는 알바부터 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나는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있다. 불우한 얘기를 담은 영화를 볼 수 없는 이유도, 내가 자칫 실수했을 때 겪을 현실이 될까봐 묘한 불쾌함과 불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와 도덕성을 잃지 않고 산다. 법규를 지키고, 인간에게 친절하고, 내 할 일을 다 해내고, 시작한 일에는 책임을 진다.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꾸준히 글을 쓰고, 타인에게 관심을 표하고, 수입은 부족하지만 할머니께 매달 10만 원씩 용돈을 드린다. 이런 사소롭고 작은 것들만으로도 난 굉장한 미덕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존감의 원천은 이 평범한 것들을 잘 지켜내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런 점에서 보통의 것들을 인정해주는 주인공 강민주의 생각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68p. 사람들은 이처럼 아주 많은 경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며 산다. 북극의 유빙이 그렇듯 숨겨진 힘은 드러난 것보다 강하다.
인생은 생각보다 별 거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도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엄청나게 두려움을 느끼지만 막상 해보고 나면 별 거 아니었다 싶은 때가 있다. 그러나 시도해보고 나서 예상대로 엄청나게 힘들고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 일도 있긴 하다. 그럴 땐 말끔히 놓아 버린다. 어떤 이는 이런 태도에 대해 비난할 수 있겠지만 나는 감각이 뛰어난 편이다. 내 길인 것과 아닌 것에 대해 얼추 구분이 가능하다. 그 구분을 위해 아무리 두려워도 일단 시도해본다.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 시도해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길이라는 조금의 시그널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포기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내 길이 될 수 있겠다 싶은 것이 있다면 몰두한다. 이것이 반수로 얻은 삶의 지혜이다. 가끔은 감각에 기댈 필요도 있다. 우직함이 늘 정답은 아니니.
69p. 많이 드러낼수록 바닥이 보이는 법이니까.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계속 반추하는 것이 이것이다. 나를 너무 드러내지 말 것.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아무리 친밀한 사이더라도 나를 드러내지 말자고 끝없이 스스로에게 주의를 준다. 나의 속내를 너무 깊이 드러내지 말고 사생활을 세세히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내인다. 그래서 점차 말을 줄이고 관계를 좁히는 것 같다. 혹은 얕은 관계만 늘어나길 소망한다. 사회에서 비즈니스로 만난 사람들하고는 딱 거기까지만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거부감이 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밑바닥까지 보여주지 않으려, 고삐풀리지 않으려 계속 주의하고 긴장한다. 이것에 큰 피로감을 느끼지만 생존방식이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
83p. 미지를 향한 끝없는 발돋움, 삶이란 그 한없는 떨림의 공명판이 아니던가.
떨림은 울림이 된다. 나의 두려움은 곧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나의 고통은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끝없는 두려움과 고통은 나를 울리지만 그것은 내 삶의 울림으로 이어진다.
84p. 내가 하는 일은 내가 분석하고 내가 의미를 줄 것이다. 세상 누구도 나의 일을 나만큼 꿰뚫을 자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얼마나 오류투성이던가. 그들에게 나를 맡기느니 차라리 내가 나를 탐구할 것이다.
나답게 살겠다. 그것이 법규를 무시하고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기본적인 것들을 충실히 이행한 다음 나의 주관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가끔 조언이랍시고 자신의 기준을 나에게 강압적으로 투영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같잖다. 죄송하지만 그렇다. 나보다 경험을 많이 했을 텐데, 타인은 여전히 타인일 수밖에 없다는 '타자성'을 아직도 깨닫고 있지 못하다니 싶어서 말이다. 가끔 정말 새겨들을 조언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내 안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흩어진다. 결국 인간은 결국 자기 멋대로 산다. 인간은 다른 누군가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강민주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86p.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강민주의 주장이다. 지도자란 존재할 수 없다. 내 인생 하나도 지도하기 힘든데,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타인을 컨트롤 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런 생각은 오만하다.
91p. 나는 어쩔 수 없이 자꾸 시계에 눈이 간다. 그러나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이러한 긴장마저 허용하지 않는 것은 무리다.
현명하다. 그녀의 현명함은 내게 잔잔한 위로로 다가온다.
97p. 외줄 타기에는 절대 금기가 하나 있다. 줄 아래를 보지 말 것. 아래를 내려다보면 떨어지고 만다.
나는 서울대 면접준비를 할 때 너무 줄 아래를 봤던 것 같다. 그 순간이 매우 후회된다. 물론 그때의 어리석었던 경험 덕분에 지금은 많은 교훈을 얻었지만, 아마 평생 내 아픈손가락이 되지 않을까.
97p. 삶은 곡예다.
곡예에는 관중이 있을텐데, 모든 사람의 삶이 곡예라면 결국 모든 곡예에 관중이 없다. 오로지 혼자만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관중 없이 홀로 외줄 타는 공연을 펼치고 있는 것이 삶이다. 그러니 타인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발끝의 감각에만 집중하고 내 중심만 잘 잡고 산다면 타인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98p. 이 대결에서도 절망은 버려야 할 대상이다. 대결자들은 멀리는 보지만 굴러떨어질 나락을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미 대결은 시작되었고, 남은 것은 이기는 일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난 생존이 위태로울 때마다 끝없는 나락을 보면서 정신을 붙잡는다. 한 순간 실수로 인해, 한 순간 위태로움이 나를 끝없는 나락으로 이끌 것이라는 극도의 불안감이 나를 대결에서 이기게 만든다. 배수진 전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극단에 치우쳐있기 때문에 건강하진 않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 회복탄력성이 0에 수렴한다. 그러니 강민주의 생각을 빌려봐야겠다. 대결이 시작된다면 나락을 무시한 채 오로지 성취에만 목매야겠다.
109p. 검은 발톱은 부러진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발톱은 다시 자란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치 나의 내성발톱 같구나.. 제거해도 제거해도 자꾸 자라나서 나를 쿡쿡 찌르는..
114p. 즐겁고 아릿한 것만 추억하고 살기에도 짧은 삶이 아니던가.
매번 되새기면서도 자꾸만 잊게 되지요. 그래서 매순간이 고통인 삶 속에서도 과거는 자꾸만 미화되나 봅니다.
123p. 정신의 에너지는 이동한다. 지금 폭발한 에너지는 결국 심연으로 가라앉게 되어 있다. 폭발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에너지는 자해의 형태로 나타나는 수가 많다.
가라앉은 에너지는 썩어가다 양분이 되겠죠. 지나친 에너지는 방출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썩어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음을 깨닫습니다.
130p. 힘을 너무 자주 주입하면 뜻이 희석되거나 위험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힘이 나지 않아서 스스로를 오버스럽게 응원했다. 매일매일 화이팅을 외치고 할 수 있다고 말해줬는데, 사실 거짓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말로만 나를 형식적으로 응원했다. 마치 의무처럼 말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속이고 싶어서 그렇게 했었다. 너무 자주 힘을 주입했던건지, 나의 응원은 어느 순간 내 안에서 희석됐다. 속 빈 강정같던 내 응원을 나 스스로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론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너 왜 거짓말해?' 이런 생각이 같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응원은 만용이었다.
175p. 하지만 나는 남기의 이런 양면성에 대해 전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기처럼 우직한 인간에게는 순수와 용맹은 한 이름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순수하기에 용감한 것이고 용감할 수 있기에 순수한 것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르거나, 추하고 아름답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논리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 그 단순명료함, 이것이 우직한 삶이 지닌 미덕이다.
인간은 입체적이기에 모순적일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기질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면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만, 사실 매순간 마주하는 인간들은 전부 부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때는 전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하죠. 부조화의 조화랄까요. 인간은 부자연스러워서 자연스럽고, 불완전해서 인간만의 완전함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완벽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삶이니, 가끔은 부자연스러운 인간을 따스히 바라봐줘야겠습니다.
192p. 극도로 쇠약해진 정신상태에서는 적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니던가.
그랬나? 싶어서 의문이 들었던 구절이다. 아무리 급해도 쥐약은 먹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 적은 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정신상태가 쇠약해지더라도 적에게는 의지해선 안 된다. 본인의 약점을 내비쳐서 좋을 게 무엇인가. 내가 극도로 쇠약해져서 적에게 의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210p. 희극에는 결코 황홀함이 없다. 그러나 비극에는 오르가즘이 있다. 비극만이 절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천박한 비극은 때로 희극적이기조차 해서 누구의 눈물도 얻지 못하는 수가 많다.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내 비극은 절정에 다다랐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한 편으론 절정에 다다르지 않았으면 해요. 오르가즘을 굳이 느끼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내 비극은 적당하게 끝났으면 좋겠고, 내 희극은 결코 황홀할 수 없다 해도 계속 찾고 싶어요. 황홀함의 끝을 보기 위해 희극을 추구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저 희극을 추구하고 지향하는 그 모든 순간의 과정이 희극을 완성시키는 것 같아요. 그러니 내 비극은 천박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10p. 황홀함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만은 우리가 소유한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황홀함을 지향한다.
당신의 비극에는 끝이 있습니다. 당신의 비극은 결코 비참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비극은 언젠가 희극으로 바뀔 겁니다. 그러니 비극의 과정 속에 있는 모두들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218p. 연기의 깊이는 곧 내면의 깊이인 것이고, 내면의 깊이는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 없이는 불가능한 법이다.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요즘, 어쩌면 본래 내 모습이 이런 사람일까 싶어 속상한 요즘 다시 독서를 시작하면서 생각이 깊어짐을 느끼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한 권을 읽더라도 신중히, 그리고 천천히 읽어서 그런 것 같다.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바는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내 생각은 이렇다고 생각해보다가, 과연 내 생각과 작가님의 생각은 비슷할지 기대해보다가, 내가 잘못 이해했나 상심해보는 일련의 과정이 즐겁다.
261p. 강렬한 조명과 숨 쉬는 관객들 사이에 새겨진 내 그림자를 이끌고, 미지의 한 인간을 멋지게 재현하고 싶은 욕망은 날 내버려 두지 않는 영화 때문에 늘 저편에 밀려나있곤 했소.
제가 좋아하는 가수 '김결'의 노래 '나는 무슨 마음으로'가 생각합니다. 잠시 가사를 적어봅니다.
| 나는 무슨 마음으로 우주로 그리나 / 한낱 작은 마음 따위 중요하지 않은 세상 / 떠밀려 해왔던 일이 전부가 되고 / 홀로 하는 대화만 늘어가니
떠밀려 해왔던 일로 완성되는 인간의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조금씩 의미의 틈을 찾는 것이 아름다운 일 아닐까요
262p. 비록 적군이라 해도 가끔은 동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 삶이란 이름의 연극이므로.
적군이 동지가 되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사실 아무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동지라 믿었던 사람이 적군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적군이 동지가 된다는 것이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외를 믿으며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결국 난 동지도 적군도 믿지 못하는 못난 어른이 되어 가는 걸까요. 혹,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 그것에도 의문이 듭니다.
269p. 언제까지나 시기상조론에 파묻혀 있을 것인가. 기회는 누군가 시작할 때, 바로 그때가 적당한 시기인 것이다.
시작하면, 언젠가 한 번은 꼭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회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데,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만이 잡아가니 말입니다. 기회는 항상 존재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295p. 젖어있는 날개로는 날 수가 없었다. 더불어 나는 세상의 모든 젖어있는 것들에 강한 연민을 품었다.
젖어있다면, 다행입니다. 말릴 수 있으니까요. 젖어 떨어져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녹아내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마를 테니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평안을 누리자고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301p. 모든 젖어있는 것에 나는 태연할 수 없다. 젖은 얼굴의 비애앞에서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다.
젖어있는 것들에게 태연하지 못한 당신의 모습이 시원한 바람이었군요. 분명 시원한 바람인데 마음은 따스해집니다.
334p. 저 얼굴에는 울림이 있고 깊은 정신의 무늬가 새겨있다. 이 아름다움은 껍데기뿐인 아름다움이 아니다. 가짜로 살지 않았으므로 나는 아름답다...
내면의 힘을 키운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351p. 진실은 밝히려 들면 들수록 더 때가 묻는다.
긁어 부스럼이라도 남겨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철없는 치기에 휩싸였던 어린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실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에 사람들의 생각이 붙으면 그것이 진실 아닐까요. 결국 내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것에 내 견해가 붙은 것을 난 진실이라고 믿고 행동하니까요. 다른 사람에겐 그 사람들의 생각이 곧 진실이 되겠죠. 내 생각이 진실이라고 외치는 것은 어쩌면 무용한 오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라고 두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353p. 목숨을 던지는 일보다 사랑을 참는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나는 아직까진 사랑을 잘 몰라서,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목숨을 던질만큼 좋아해보진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정말 무지하게 좋아했던 남학생이 있었다. 1년 내내 들뜬 기분으로 학교를 다녔다. 매일마다 붕떠있는 기분이었고, 그 애 앞에서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핑계로 공부를 소홀히 하진 않았다. 그 친구에 대한 한없이 들뜬 감정이 공부에 큰 방해가 되었으나 정신을 붙잡고 내 할일은 다 해냈다. 공부하다가도 자꾸 그 친구 생각이 나서 너무 힘들었지만 결국 전교1등을 유지했었다. 그 아이를 사랑했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사랑이라고 부를만하다면 나는 어찌됐든 내 생존이 가장 우선시 되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참는 일이 더 쉬운 것 같다. 나도 목숨을 던질 수 있을만큼 열렬한 사랑을 해볼 날이 오려나
354p. 제가 살아가는 이유는 선생님께 있는 것이지 선생님이 벌이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남기는 민주를 아가페로서 사랑했나보다. 그게 너무 마음 아프다.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인데 사랑이 그 사람에게 닿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저 그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사랑까지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355p. 지금까지의 시간은, 모두가 덤이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시간이 다 덤이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로 쓴 것일까.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매우 운이 좋아서 얻은 시간이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분수에 맞지 않게 과분했던 시간이라고 읽혔다. 너무나 과분해서 행복했지만 동시에 아팠던 시간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잘 이해한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덤'이라는 표현이 너무 아름답게 다가온다.
357p.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개인적인 생각으로 나와 강민주는 매우 닮아있다. 나도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삶을 지향한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기립해서 별난 사람이 되고, 너무 꼿꼿해서 쉽게 부러지곤 한다. 강민주가 결국 파멸을 맞게 된 것도 너무 꼿꼿해서 한 순간 일격으로 툭 부러진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런 끝이 다가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삶을 사랑한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적당히 낮은 포복으로 오래 살바엔 높이 기립해서 짧게 살길 희망한다.
358p. 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강민주의 테러가 잔인한 보복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 더운 인간의 길로 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이 소설의 결말을 좋아한다.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책의 끝은 어떤 식일지 궁금했는데 강민주가 죽음으로써 아름다운 결말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을 신과 소통하는 인간 초월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녀 역시도 남성을 사랑하고 신 앞에서 무력한 그저 '인간'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행한 테러 역시 일반적인 것들과 결을 달리하는 것처럼 그녀의 존재와 행위 자체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한다.
358p.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가 만약 잘못된 궤도에 올라타 있다면, 한 번에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돌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씩 곡선을 그리며 지향하는 궤적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습니다. 최소 리스크를 지향하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깔끔한 유턴이 아니라, 꼬불꼬불한 궤적을 그려나가며 조금씩 궤적을 바꿔나갈 것 같습니다.
: 처음 보는 용어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거나, 부드러운 표현이 사용되어 오래 기억하고 싶은 구절
11p. 운전할 때의 이 무아경이 좋다.
무아경 : 정신이 한곳에 에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
18p. 간통죄로 고소할 테면 해보라고 이죽거리기도 한다.
이기죽거리다 : 자꾸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짓궂게 빈정거리다.
24p. 나는 그의 맹종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맹종 : 옳고 고그름을 가리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따름.
33p. 그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친구도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었다.
일언지하 : 한 마디로 잘라 말함. 또는 두말할 나위 없음.
33p. 그즈음 학교 신문에서는 구태의연하게도 일상적인 주제를 놓고 (...)
구태의연하다 : 조금도 변하거나 발전한 데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44p. 파안대소, 그는 세상의 아주 사소한 농담에도 매우 즐겁게 활짝 웃는다.
파안대소 :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활짝 웃음.
(이 단어가 책 속에서 굉장히 자주 사용됐었다.)
46p. 그녀들은 남루한 일상에 실망하고, 두터워가는 감정의 굳은살을 부끄럼 없이 내보이는 부부생활에 아득함을 느낀다.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루하다 : 옷 따위가 낡아 해지고 차림새가 너저분하다.
47p. 나는 백승하가 뒤집어쓰고 있는 환상의 너울을 벗겨내고 싶은 욕망에 몸이 떨릴 지경이다.
너울 : 여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쓰던 물건. 바다의 크고 사나운 물결
47p. 나는 맹맹한 것은 정말 못 견딘다.
맹맹하 : 마음이 허전하고 싱겁다.
48p. 나는 새롭게 조지 윈스턴을 열애한다.
열애하다 : 열렬히 사랑하다.
52p.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내 쪽 집안이 경제적으로 윤택한 까닭에 그간 계속해서 처가의 도움으로 살아왔다.
윤택하다 : 살림이 풍부하다. 광택에 윤기가 있다.
53p. '그 사람은 아내와 처가가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철면피한 인간' 이므로
철면피 :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
55p. 지금은 친구 간의 우정 쌓기 같은 지리멸렬한 감정 소모는 전혀 하고 있지 않지만.
지리멸렬 :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
56p. 내가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애석하다 : 슬프고 아깝다.
57p. 약간의 시장기.
시장기 : 배가 고픈 느낌
69p. 갇혀있는 그의 현실은 여전히 안온하겠지만
안온하다 : 조용하고 편안하다. 날씨가 바람이 없고 따뜻하다.
69p. 내가 얼마나 온건한 사람인지를 보여줄 증거로
온건하다 : 생각이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맞고 건실하다
70p. 가을에서는 맑디맑은 실로폰 소리가 들린다.
88p. 내 해답에 여자는 몹시 반색한다.
반색하다 : 매우 반가워하다.
98p. 나는 언어의 표피를 만지는 것보다 그것의 본질을 만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100p. 그와 나의 첫 상면을 부드럽게 치르고 싶었다.
상면 : 서로 만나서 얼굴을 마주 봄. 서로 처음으로 만나서 인사하고 알게 됨.
110p. 그런 말은 남기에게 엉겁결에 배운 것이다. 이성은 없고 감정만 있는 폭력의 세계에서는 그런 식의 언어가 횡행한다.
111p. 강퍅하고 거친 유년을 보냈으나
강퍅하다 :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115p. 그래서 할 수 없이 이걸 보여주고 을러댔죠.
을러대다 : 위협적인 언동으로 을러서 남을 억누르다.
115p. 백승하가 그것을 보았다면 앞으로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는 짓은 삼가게 될 것이다.
만용 : 분별없이 함부로 날뛰는 용맹
125p. 그러나 나는 지금 연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연서 : 연애하는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애정의 편지
130p. 그가 내게로 온 지 여드레가 되는 날
여드레 : 여덟 날
132p. 그 끈질김만은 가히 특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34p. 김인수를 만나려는 것은 미리 그 싹을 뽑아없애겠다는 조심성의 발로였다.
발로 :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
145p. 경륜의 한 표현으로 들으면 그만일 말이었다.
경륜 : 계획이나 포부. 일정한 포부를 가지고 고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함.
(예 : 경륜이 있는 사람, 높은 경륜의 소유자)
145p. 그런 부류들과 같은 궤에 있지는 않다.
궤 : 입장이나 경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47p. 가령 신출내기 여배우와 잠시 염문이 있었는데 (...)
염문 : 연애나 정사(남녀사이 사랑)에 관한 소문.
167p. 그렇게 해서 마침내 사건이 비등점에 이르면
비등점 : 여론이나 열정 따위가 일어나 최고조에 달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67p. 그때를 위한 여러 복안을 밝히기로는 시기가 너무 이르다. 나는 말이 간직한 주술의 힘을 믿는 편이라서 '발설'이란 단어의 재수 없음을 상당히 경계한다. ★
복안 :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
171p. 나는 숫제 빙글빙글 웃기까지 한다.
숫제 : 아예 전적으로. 순박하고 진실하게.
184p. 한 번 더 지리멸렬한 빙벽 깨기 게임을 살펴보면 내 쾌감의 의미를 더욱 선명히 알 수 있으리라.
190p. 아직도 자존심을 팽개치지 못하는 남자가 정말이지 가련하다.
가련하다 : 가엾고 불쌍하다.
191p. 봉두난발이 된 머리
봉두난발 : 머리털이 쑥대강이같이 헙수룩하게 마구 흐트러짐.
191p. 나는 조용히, 아주 그윽하게 그의 눈 속에 잠긴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193p. 나처럼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그 상승하는 가속력을 제어하는 데 늘 당혹감을 느끼는 판에 범상한 족속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범상하다 : 중요하게 여길 만하지 아니하고 예사롭다. (비범하다의 반대말.)
이 단어도 이 책에서 자주 등장했다.
196p. 스러지는 옅은 햇빛에 섞인 방 안을 물들이고 있는 주홍의 색조는 마치 잘 만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겨졌다. ★
스러지다 : 형체나 현상 따위가 차차 희미해지면서 없어지다.
212p. 어떤 때는 아스라이 먼 곳의 누구를 향하는 신비성으로.
아스라이 : 기억에 분명하게 나지 않고 가물가물하게.
214p. 어쩔 수 없다는 각오가 선연하다.
선연하다 : 실제로 보는 것같이 생생하다.
천연하다 : 생긴 그대로 조금도 꾸밈이 없다.
220p. 나는 이 남자의 매력적인 웃음에 언어의 칼을 꽂는다.
221p. 자못 긴장하고 있다.
자못 : 생각보다 매우
222p. 공사다망한 대중들은 서서히 한 인기배우의 존재를 잊어가고 있다.
공사다망 : 공적/사적인 일 따위로 매우 바쁨
231p. 나의 말에 남기도 벙싯 웃었다.
벙싯 : 입을 조금 크게 벌리며 소리 없이 가볍고 부드럽게 슬쩍 한 번 웃는 모양
234p. 아둔한 족속이다.
아둔하다 :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다.
237p. 다른 면의 기자 칼럼에서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소상히 : 분명하고 자세하게.
251p. 어제에 비교하면 내 기분도 상당히 말개졌다.
말개지 : 흙탕물 따위가 말갛게 되다.
253p. 김인수에게 전화해서 그의 방약무인함을 질타할 것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일이다.
방약무인함 : 곁에 사람이 없는 것 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있다.
272p. 그것이 연출까지 겸임한 그의 작전이라 해도 나는 푹신하고 아늑한 백승하의 감수성에 매번 탄복하게 된다.
알면서도 모른척하다니!
273p. 우리는, 아, 나는 지금 너무 자주 우리는,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이런 문체는 처음이었다. 주인공 강민주의 혼란이 잘 느껴진 부분이어서 좋았다. 본인이 '우리는' 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에 자꾸 이 말을 곱씹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입에 올려본 적 없는 말인가보다. 인식하지 못한 사이 자기도 처음 쓰는 말을 자꾸 쓰고 있는데 어감이 주는 따스함이 좋았나보다.
277p. 그런 다음 백승하는 아스라한 눈길로 자신이 사랑하는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했다.
아스라하다 : 기억이 분명하게 나지 않고 가물가물하다.
282p. 그는 나를 돌아보며 계면쩍게 웃었다.
계면쩍다 : 겸연쩍다. 쑥스럽거나 미안하여 어색하다.
297p. 바로 여기에 내 번민이 있었다.
번민 :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하여 괴로워함.
302p. 그의 웃음을 보자 내 가슴이 후드득 떨렸다.
318p. 쏟아지는 세인의 비난과 질책을 막을 방법은 당하고도 쉬쉬하는 치욕의 길뿐이라는 것을.
세인 : 세상 사람
치욕 : 수치와 모욕
341p. 교수는 벌써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광포해졌고
광포 : 미쳐 날뛰듯이 매우 거칠고 사나움
341p. 그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식칼을 높이 쳐들고 점점 내게로 육박해온다.
육박하다 : 바싹 가까이 다가붙다.
348p. 저속한 호기심입니다만.
저속하다 : 품위가 낮고 속되다.
: 실소가 터져나왔던 구절
34p. 그랬던 내가 그 지면에 '여학생의 흡연'에 관해 이른바 찬성 쪽 의견을 투고한 것은 순전히 젊은 날의 허세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강민주는 본인이 자신하듯, 자기 객관화가 상당히 잘 되는 인물이다. 자신의 의견이 허세였음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전의 자신은 조금 거만하고 방자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 쿨함이 그녀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
35p. 내 얼굴은 객관적이라는 미인대회 기준 따위는 철저히 무시한 자유로움으로 눈과 코와 입을 배치한 형상이다.
본인의 못난 얼굴을 이렇게 섬세히 묘사한 점이 웃겼다. 고급스런 유머 같달까. '객관적 기준을 철저히 무시한 자유로운 얼굴'이라는 표현이 마치 쉬운 단어를 굳이굳이 어렵게 풀어 쓴 수능 영어지문 같아서 재밌게 다가왔다.
92p. 그렇게 말하지만 본전을 훌쩍 넘은 게 분명한 꽃값을 지불하고 나는 빠르게 아파트로 돌아왔다.
꽃집주인이 본전만 받겠다며 꽃값을 얘기했는데 바로 그 다음 강민주의 이 대사가 나와서 너무 웃겼다. 그녀는 진지하게 웃기는 것에 큰 재능이 있다.
아저씨 : "인심이다! 본전만 받을게!"
강민주 : "그렇게 말하지만 본전을 훌쩍 넘은 게 분명하다."
190p. 그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흰목의 핏줄은 상당히 선정적이다. 실제로 이 남자의 지금 모습은 차라리 매혹적이기도 하다.
핏줄을 선정적이라고 표현한 점이 웃겼다. 남성에게 철저히 거리를 두던 강민주가 이런 표현을 백승하에게 사용하다니 가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처음으로 성과 사랑에 눈을 뜬 소녀 같아서 귀여웠다. 그리고 나도 남성의 핏줄이 선정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었기에 괜히 뜨끔했다.
231p. 남기는 마치 처녀같다.
남기는 남자다.
: 크게 공감했던 구절. 주인공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던 구절.
26p. 혼자 사는 사람이 무계획, 무질서의 수렁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대학에서의 첫 방학을 맞고 경제난에 시달리면서 무질서의 수렁에 빠진 내 모습이 생각나서 뜨끔했다. 난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닥친 것 같아요.
42p. 평범의 미덕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나는 보통의 삶보다는 강렬하고 눈부신 특별함에 압도적으로 경도된다.
이해와 존중은 다르다는 것을 짚어준 구절이다. 이해가 존중은 같은 궤도에 있지 않다.
49p. 그 일이 무엇이든, 나는 늘 즐기고 싶다.
즐거움은 제 삶의 첫 번째 가치이자 모든 일의 기준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합니다. 직관은 단순하고 무식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물론 충분한 이성이 사용된 끝에 직관을 동반해야 하겠지요. 아무튼 저는 아주 사소한 즐거움이라도 존재하는 것들을 지향하고 사랑합니다.
50p. 나는 어떤 일이든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한번 마음먹은 일이라면 그것으로 파국을 맞을망정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성격은 의외로 드물다. 모두 다음에 닥칠 기회를 행여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망설인다. 매사에 흐리터분하고, 간단한 일조차 결단을 못 내리고, 늘 주저주저하며 뒤를 돌아보는 소심한 기회주의자들이 나는 싫다. 그 우유부단함을 보고 있자면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서강대생 이었을 때 내 지도교수님은 나의 삼반수를 두고 소모적인 시간낭비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한테 있어선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다신 없을 값진 경험이었다. 그것을 두고 시간낭비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어쩌면 나도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원하는 대학교에, 제시문 면접을 당당히 통과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도무지 흩어지질 않아서 반수도 하고 삼반수까지 했었다.(2025기준. 이 글을 처음 쓰던 날은 2024 여름.)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학교와 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이 공존하며 마지막 사력을 다해 도전했었다. 이 주인공의 기준에선 나 역시 소심한 기회주의자로 비춰질 수 있기에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으나, 적어도 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니 괜찮다.
64p. 외로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은 습지대의 늪처럼, 썰물 때의 갯벌처럼, 한 번 발을 넣으면 좀처럼 빼내기 어려운 것이다.
외로운 감정에 쉽게 휩싸이는 요즘이라 더 공감됐던 구절이다. 어쩌면 난 외로움과 그리움의 감정에 빠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얘기한 목적론처럼, 외롭고 그리워서 그런 감정을 느낀 게 아니라,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형용사를 끌어들인 것 같기도 하다. 그 감정에 푹 빠져있는 상태라면 어떤 행동을 하든 아주 좋은 핑계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늪에 들어가, 그렇게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어하는 상태인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그 감정에 매몰되는 것 자체가 피로해서 의도적으로 떨쳐내는 편이다. 그 과정에서 이 구절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게 도움되지 않는 것을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69p. 더디 가는 시간을 잊기 위해서는 독서 이상의 방법은 없을 것이므로.
요즘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어서 공감이 됐다. 알바는 잘 안 구해지고 공부에 필요한 돈이 부족해서 남는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 밖에 놀러갈 돈은 없어서 오로지 기숙사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그나마 생산적으로 보낼 방법은 독서밖에 없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한 힘을 기르는 방법을 책을 찾았다. 앞으로도 이런 습관을 들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71~72p. 오지도 않을 행복을 기다리며 긴 세월을 살아온 여자들의 그 끝없는 인내가 나는 조금도 가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71p. 그것은 상담이란 허울을 쓴 자기고백이며, 더욱 잔혹하게 몰아붙이면 은근한 자기 자랑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어머니들의 희생을 욕보이고 싶지 않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어서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삶을 버린 채 인내만을 지속하는 어머니의 삶을 보며 안쓰러워했던 내가 기억나서 그랬던 것 같다.
73p. 약자가 택할 길은 희생이나 인내밖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인 것이다.
희생이나 인내밖에 선택할 길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강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희생이나 인내라는 어려운 가치를 선택한 들은 그것이 자의였든 타의였든 강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약자들은 희생과 인내를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방 지쳐 떨어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75p. 온몸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이 느낌이 정말 좋다. 신경의 어느 한 오라기도, 근육의 어느 한 부분도, 뇌세포의 어느 한 개도, 내 몸과 정신의 어느 한구석도 빈 곳이 없는 이 상태. 이 놀라운 탄력감이 정말 상쾌하다.
93p. 남기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하다. 그 차분함이 감추고 있는 자랑스러움을 나는 안다.
자랑할 만한 일,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차분해지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처음 10분동안은 정말 흥분하다가 이 소식을 계속 생각하다보면 '뭐 그게 대단한 일인가' 싶어진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내더라도 열렬한 기쁨의 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는다. 그 이후엔 잔잔한 뿌듯함으로 남는다. '진짜'들은 호들갑스럽지 않다.
133p. 나는 이런 찰거머리 유형을 만나면 짜증부터 나는 약점이 있다.
김인수라는 작자는 토나올 정도로 역겹다.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를 지키지 않는 쓰레기같은 인간. 최근 나에게 자꾸만 연락을 걸어오던 한 선배와 겹쳐보여서 너무나 역겨웠다. 강민주의 분노가 너무나 이해되었다. 이런 인간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단전에서 불쾌감이 우러나온다. 인간은 입체적이라지만, 분명 그도 장점이 있을테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저편에 미뤄두게 된다.
144p. 희고 말간 것은 싫다. 탱탱하고 반들거리는 피부도 싫다. 한번도 깨져 보지 않아 굳은살이 배기지 않은 삶은 정상적인 삶의 행로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삶은 가짜다.
나는 망가진 인간들이 좋다. 망가져 본 인간들이 좋다. 단 한 번도 망가지지 않은 인간들을 보면 얄궂은 마음이 드니까. 망가지지 않아봐서 마냥 해맑은 그 행태를 보고 있자면 괜스레 불편해진다. 하지만 이 마음이 예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늘 망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애정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 늘 교정한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망가져 본 사람들에게 눈길과 애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220p. 하지만 법은 인간의 정서를 일일이 반영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법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인간의 정서를 일일이 반영하지 않기에 딱딱하디 딱딱하고 형식적인 느낌이 강한데, 판결과정에선 인간의 정서를 반영하여 결론을 내리잖아요. 그리고 딱딱해보이는 법들도 사실은 전부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바탕에 두고 있잖아요. 법은 마치 츤데레 같습니다.
222p. 나 같은 사람한테 사사로운 애착이나 달짝지근한 감정이 오래 남아있을 리가 없다. 설령 잔류의 시간이 길다해도 그것이 내 정신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이다.
요새(2025) 자주 드는 생각이다. 난 감정에 굉장히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무뎌지는 것에 익숙하다. 감정이 잔류해있을 동안에는 그 감정에 충실히 행동한다. 그러나 잔류시간이 길지 않다. 고통이든 행복이든 오래 남아있지 않기에 내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나아가진 않는다. 아프다가도 회복할 줄 알고, 기쁘다가도 무뎌질 줄 안다. 회복 탄력성, 그게 내 가장 큰 강점이다. 하지만 가끔은 사람에 대한 애착이 오래 가지 않아 아쉬울 때가 많다. 나도 조금 더 길게 사랑하고 싶은데, 나도 조금 더 오래 좋아하고 싶은데 하면서 말이다.
297p. 내 마음은 한량없이 초조하고 바쁘다.
마음에는 한량이 없는데 내 모습은 한량같을 때가 있다. 정신은 초조함에 지배되고 육신은 게으름에 지배되는.. 그런 모순적인 인간을 어찌하면 좋을지
34p. 우리 대학의 남학생들은 아직도 나혜석을 매도하는 시대에서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했음을 슬퍼한다고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