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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Mar 25. 2022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노부부가 말했다. "노 프라블럼!"

요즘 푹 빠져있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1화의 명대사는 백이진(남주혁)의 입에서 나왔다. 첫 신문 배달에서 십 분이나 늦었다며 사정없이 쏘아대는 동네 아저씨에게 당당하게 받아친다. 

- 이봐요 학생. 신문이 십 분이나 늦었잖아요 !!!

  신문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한테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아요?

- 죄송합니다.

- 신문이 안 와서 똥을 못 싸고 있다고 내가 !!!

- 제가 이 동네 처음이라

   한 시간 일찍 시작했는데도 좀 늦었네요.

   근데, 그럴 수도 있잖아요.

- 뭐요?

- 저 이 동네도 처음이고, 신문 배달도 처음이에요.

- 그래서요?

-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잖아요.

   그 처음이 오늘이니까 오늘까지만 서툴겠습니다.

   내일부턴 늦지 않을게요. 여기요. 수고하세요.


예의 있게 전하는 누군가의 소신이

누군가에겐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백이진의 대사와 오버랩 되는

오래전 일화가 생각났다.

나의 서툰 처음에, 나의 어설픈 실수에

"노 프라블럼!"이라고 웃어 넘겨주었던

어느 노부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밴쿠버 그랜빌 아일랜드 퍼블릭 마켓

캐나다에 온 지 4개월 차 즈음. 퍼블릭 마켓 끄트머리에 자리한 베이커리에서 일할 때였다. 나의 주 업무는 캐셔(Cashier). 손님들의 주문을 받아 계산하고, 빵과 커피를 내어주는 일이었다. 언어도 얼굴색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을 상대하고, 낯선 지폐와 동전들을 보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일이 결코 쉽진 않았다. 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터득해가모든 '처음의 순간'이 마냥 즐거웠다.


매니저의 방침대로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처음엔 캐셔 업무로 시작해 어느 정도 짬밥이 생기면 크레페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가게의 메인 메뉴 중에 하나인 크레페는 달달한 맛도 좋지만, 보는 재미까지 있다. 유리 파티션 너머로 만드는 과정을 오픈하니 손님들 입장에서는 내 크레페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 넉 달쯤 되었을 때, 매니저가 때가 다는  물어왔다.

"올리비아, 너도 이제 크레페 만들어 보지 않을래?"

'헛!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코워커들이 만드는 걸 곁눈질로 봐왔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크레페 만드는 과정]

① 반죽을 한 국자 채워서 달궈진 판 위에 올린다.

나무 스틱으로 얇고 평평하게 반죽을 펼친다.

③ 반죽이 익으면 스틱으로 부드럽게 뒤집는다. (잘못하면 반죽끼리 서로 붙고, 찢어지기 일쑤)

각종 토핑(누텔라, 딸기, 배, 레몬 시럽, 설탕, 시금치, 버섯, 치즈 등)을 올리고 반으로 는다.

 스틱으로 예쁜 삼각 모양을 만든 후, 그대로 접시에 옮겨 담는다.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단계. 자칫하면 토핑이 밖으로 다 튀어나옴)


보기엔 후루룩 뚝딱 쉬워 보였으나, 막상 해보니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실전으로 투입된다는 매니저의 말에 곧장 특훈에 들어갔다. 코워커들이 나의 연습작을 간식으로 먹어줬다. 나름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 칭찬까지 받으며 의기양양했다. 그렇게 기대반 설렘반으로 첫 크레페 데뷔전, 다음날을 맞이했다. 과연 나의 첫 손님은 누구일까!

양손에 장바구니를 든 노부부가 다가왔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페어(Pear)크레페'를 주문했다. 당황하지 않고, 어제 연습한 대로 정성스레 반죽을 떠서 올렸다. 반죽을 뒤집고 페어를 올리고, 설탕과 시럽을 뿌리고, 다시 닫아 모양을 만들었다. 좋아. 순조로웠다. 이제 마지막 단계! 모양 그대로 접시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


이런. 반죽이 터져버렸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밖으로 사정없이 튀어나와버린 '배'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속 터진 크레페처럼 나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이를 어쩌나. 침착하자. 당황한 티를 안 내려고 애써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리고 양심상 미안하다는 말을 소심하게 덧붙이며 형편없는 첫 작품을 내밀었다.

"Here you are. Have a good meal. Sorry....."

뒤에서 지켜보던 매니저가 내가 난처해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오늘 내 생애 첫 크레페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노부부의 피드백이 있기까지, 짧은 순간 머릿속이 난처해졌다.


'이래 봬도 만 원짜리 디저트인데 망했다. 윽.'

'분명 다시 달라고 하겠지? 컴플레인 걸겠지?'

'주문이 밀려있는데 다시 만들 순 없고 어쩌지.'


하지만 혼자 걱정의 나래를 펼치던 나에게 할머니가 웃으며 던진 한마디는 놀랍게도

“No problem."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어진 말.

"you did best. I like it.  It's your first time. Practice makes you perfect"

'Cheer up'하라고 내 이름이 적힌 Tip통에 2달러 동전을 넣고 윙크를 날리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연습만이 살길이다!' 다이어리 속지에서나 보던 영어 표현을 실생활에서 듣게 될 줄이야.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 좀 일그러지면 어때. 맛은 똑같을 텐데.'

'게다가 난 처음이잖아! 이 정도면 훌륭한 거지!'

'알파고 같은 로봇이 아닌 이상,

 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든 실수할 수 있지 않나.'




한국에서는 진상 손님이 워낙 많기도 했고

뭔가 잘못하면 싫은 소리를 듣는 게 당연했던 터라

지나치게 쫄아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노 프라블럼'이란 말 한마디가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얼마나 멋있지 않은가!

온화한 노부부가 베풀어준 여유처럼

나도 타인의 실수에,

타인의 처음에 너그러운 미소로

"노 프라블럼(No problem)" 이라고.

든든한 응원의 한마디를 건넬 줄 아

멋진 어른 되겠노라고 다짐했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하는 말 중 하나.

신기하리만큼 잔걱정이 없어지는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백이진처럼

나의 서툰 처음에 기죽지 말고

조금은 당당하고 뻔뻔할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니까."


처음이라는 이유로 두려워하기보단,

한번뿐인 첫 순간을 모두가 맘 즐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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