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2012) / 2012년 3월 28일 11시 28분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전람회, <기억의 습작> 중에서
글쓰기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용주 감독은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켜 <건축학개론>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했다. 그는 건축학을 전공해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다 영화 일을 시작했다. 영화는 그에게 익숙한 대상인 건축학 수업, 건축사무소, 건축 현장 등을 배경으로 한다. 그만큼 영화는 튀는 장면 하나 없이 술술 흘러간다.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단조롭지 않다. 마치 베스트셀러가 되어 서점 진열대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시집 같다. 평이한 언어로 꾹꾹 눌러쓴 시구들이 책을 덮어도 여운을 남기는 것처럼 <건축학개론>도 그렇다.
<건축학개론>은 '사랑'을 시간과 공간을 이용해 정리한 영화이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승민과 서연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15년 후 다시 만난 그들은 그때의 감정을 벽돌을 쌓아 집을 집듯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간다. 영화는 대학교 1학년 때 서로를 향한 감정이란 벽돌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현재의 승민과 서연이 어떻게 벽돌을 쌓고 있는지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언가는 서연의 제주도 집일 수도있고 그 둘 사이의 신뢰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둘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관람객들은 영화를 보며 여러 버전의 '건축학 개론'을 듣는다. 하나는 배경이 되는 대학교 건축학 개론 수업이고, 하나는 서연의 집을 짓는 과정이며 마지막은 서연과 승민의 관계가 축조되는 현장이다. 유형은 다르지만 세 건축학 개론 모두 단순한 관념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시공간이 올린 실체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서연과 승민은 건축학 개론을 수강한다. 사는 동네를 샅샅히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라는 과제를 함께 하며 둘은 점차 친해진다. 정릉 토박이인 승민과 제주 소녀 서연은 정릉을 돌아다니며 함께 버스를 타고, <기억의 습작>을 듣고, 폐가에서 그들만의 아지트를 만든다. 그러는 동안 정릉이라는 공간에 서연과 승민이 함께 보낸 한 학기라는 시간이 스며든다. 서연이 강남으로 이사하며 둘의 관계도 단절이 된다. 서연은 떠났지만 첫사랑의 추억은 정릉이라는 공간에 남아 있다.
정릉에 남아 있는 추억은 승민의 건축사무소에서 현재로 소환된다. 이혼한 서연이 15년만에 승민을 찾아와 제주도에 집짓기를 부탁하면서 부터이다. 승민이 서연의 집을 지어주는 것은 지금껏 봤던 멜로 영화 중에서 그 어떤 연가보다도 아름다웠다. 승민은 서연의 집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한다. 애초 설계와 시공을 도맡아 하던 승민이 아니었기에 서연의 집을 지어주는 일은 개별성을 띤다.
승민은 서연을 위해, 서연이 원하는 대로 집을 짓는다. 여기서만 그친다면 단순한 헌신으로만 비쳤을지도 모른다. 승민은 서연이 대학교 1학년 때 그렸던 집을 기억해 2층집을 만들어준다. 점점 쌀쌀해지던 날 봄에 필 꽃을 미리 심던 서연을 기억하기에 그 집의 지붕에는 꽃밭도 있다. 승민은 그가 서연을 알았던 시간 속에서의 기억을 쌓아 제주도 집을 짓는다. 오직 서연을 위한 건축이라는 연가는 사랑의 노래(戀歌)인 동시에 사랑의 집(戀家)이기도 하다. 서연의 집이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드는 묵직한 감정의 밀도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정릉을 지나 제주도 집을 지으며 서연과 승민는 다시금 관계를 쌓아간다. 그들은 오랜만에 재회해 지나간 시간 속 정릉에서의 추억을 헤집는다. 서연은 승민의 대학교 첫사랑이었던 '썅년'이 자신이었는지 확인하고, 승민은 묵묵히 서연이 좋아했던 것을 기억하며 집을 짓는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 편집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관계인지 보여준다. 이로써 영화를 본 우리는 승민이 약혼녀와 미국으로 떠났다고 해서 서연과 승민의 관계가 끝났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관계가 축조되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구조물이 끝날 때쯤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둘은 결혼하지 않았다고.
'나'는 사랑하는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기를 꿈꾼다. 언제나 그렇듯 불가능한 꿈이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증명할 수 없다. 그저 종교처럼 믿고 따를 뿐이다. <건축학개론>은 건축이라는 소재와 색다른 구성으로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리 눈에 보여주었다. 애초부터 완성이나 정답이 중요하지 않은, 기억의 성실한 습작이며 사랑에 대한 최선의 증명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