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감상문
신형철 평론가님의 문장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깊이 수긍하고 따른다.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향하던 기차에서 이 책을 읽었다. 독일에 갔던 처음엔 다하우 수용소를, 두번째엔 작센하우젠수용소를 갔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킬 것이라 기대하는 윤리가 무너진 곳은 인생을 두고 성찰할 구심점이기 때문에.
같은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향한 신뢰도 자신할 수 없지만, 신형철 평론가님의 글을 읽으며 다잡곤 한다. 문학이 상처를 치유할 순 없지만 상흔을 바라보며 그 상처를 낸 칼의 자국이 무엇이었는지 가만 들여다볼 순 있으니까.
92-93쪽
자신의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이 벌써 폭력의 결과다. '폭력'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정의를 시도해본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중략)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124쪽
냉소주의는 위험하지만 냉소 자체는 성찰의 촉매가 되기도 한다. 확신에 차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용소는 우리가 '생각'을 하기 위해 부단히 되돌아가야 할 상처이고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탁월한 수용소 문학은 과거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반성이고 미래의 연습이다. 프리모 레비가 그랬고 솔제니친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