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베이는 계절

편집기자의 편지_2

by 기림


세상의 직업을 둘로 나누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거야.


일하면서 가끔 감동받을 수 있는 직업과 아무래도 그러기는 힘든 직업, 이렇게 나눠본다면 어때?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말이야ㅎㅎ

나도 그렇지만 특히나 언니네 직장은 좀더 앞의 것에 가깝지 않나 싶어. 물론 모든 직업들에 각자의 감동 포인트들이 있겠지만 어떤 인생을, 어떤 스토리를 이토록 많이 접할 수 있는 일들은 흔치 않잖아?


편집자 일은 거기에 더해서 촌철살인을 향한 나름대로의 창작열들을 구경하는 맛도 있더라구. 때때로 재미없긴 하지만, 가끔 받는 감동들 때문에 그런게 다 용서(?)되기도 한단말이지...

감동적 직업의 범주 안에서 보자면, 언니나 나나 참으로 아날로그적인 직장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공통점인 것 같다. 접때 했던, '전파로 주고받는 마음들'이란 말도, 그래서 사실 무척 마음에 들어. 전파라는 단어는 뭔가 낭만을 자극하지. 무언가 우주적인 걸 떠올리게 만들잖아?

그보다 좀 더 구세계에 있는 나는, 아무래도 좀더 지구적 스케일의 인간적인 종이를 매만지며 살고 있어. 정말로 '하루 웬종일' 말이야. 이제 슬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다시 손끝이 종이에 은근히 베이는 나날이 시작될 것 같아.

무슨 종이를 그렇게 만지느냐고? 나도 작년에 이 부서 오기 전까진 신문은 다 컴퓨터로만 만드는 줄 알았지ㅎㅎ 근데 아니더라. 내가 아까 창작열, 촌철살인같은 것들을 운운했는데, 그걸 구현하는 방식은 정말 지독히도 아날로그적이야. 도저히 21세기에 걸맞지 않는다는 말이지. 모든 종합 일간지를 통틀어봐도, 아직도 우리처럼 일하는 곳은 없거든.

신문지만한 회색 갱지에 50cm자를 대고 연필로 선을 긋고 크기를 재고, 기사가 올라오면 종이에 인쇄해서 손글씨로 제목을 써올려. 걸어가서 그걸 데스크에게 넘기고, 데스크는 손으로 고쳐서 부장 책상에 넘기고, 부장이 다시 손보면 아르바이트 학생이 들고 걸어와서 내게 도로 전해주면, 짝지어 일하는 직원이 하나하나 타자로 옮겨친다? 문자 그대로 '빨간 펜'을 들고 교열을 보는 부서도 따로 있어. 마지막 단계에서는 뭐 하나 고칠 때마다 A3사이즈 인쇄용지로 뽑고 또 뽑아서 확인하고 또 확인해.

굳이 말로 써놓고 보니 더더욱 지독하다ㅎㅎ 나도 익숙해지는 데 한참이 걸렸어. 오랫동안 여기서 일한 분들께 종이에 집착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화면으로 보면 눈에 안 들어온다"고 입을 모으더라. 눈이 빠질 것 같고, 휘리릭 넘어가는 느낌이라 꼼꼼히 읽기가 힘들고, 뻔히 잘못된 것도 놓치게 된다고. 무엇보다도, 화면으로 보는 건 종이로 뽑아보는 것과 느낌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라고.

처음엔 '무슨 비효율적인 소리일까'라고 생각했는데, 틀린 말만은 아닌 것 같아. 문자로 써놓은 글을 입으로 낭독하면 눈으로 읽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글로 느껴지는 것처럼. 도면상으로 본 설계를 실물로 보면 전혀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똑같은 지면도 화면으로 보는 것과 인쇄해서 보는 건 미묘하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거든. 수많은 사람이 이 종이로 보고, 저 종이로 또 보면서 틀린 부분을 잡아낸 경우도 실제로 매일같은 일이고.

물론 아직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하는 답답함은 어쩔 수가 없어.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고들 말하고, 효율성이 최고인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느린 세계의 성벽안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쉼없는 그 바깥세계에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 계속 그렇게 있으면 여길 나가자마자 넌 뒤처지고 말거라는, 불안감도 자꾸 커져가.


그래도 "여긴 원래 이런 곳"이라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이렇게 찬찬한 일을 즐기고 싶단 마음이, 자꾸만 생겨나네. 괜찮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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