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을 더 많이 훼손시키는 산과 같아요."
“아까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뭐가요?”
희주와 무원은 피해자의 아파트 단지 입구가 정면으로 보이는 길 건너 패스트푸드점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넌 그냥 엘리베이터 타. 나 때문에 매번 계단 오르락내리락할 필요 없어.”
희주는 공황장애 약을 입에 넣고 콜라를 마셨다. 그리고 감자튀김을 쉬지 않고 10개쯤 집어 먹은 다음 말했다.
“파출소에 피해자 신변 보호 요청 넣어. 똥파리 같은 기자들이 당분간 계속 이 근처에서 죽칠 테니까.”
“네. 근데 굳이 여기서 점심을 먹자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혹시라도 아내 분이 외출을 한다면 이 자리에서 보이겠지.”
“용의 선상에서 아예 배제하는 건 아니네요?”
“범인 잡을 때까지는 전부 범인 후보잖아.”
무원이 막 햄버거 껍질을 까려는 순간, 희주는 이어폰 한쪽을 끼고 다른 쪽을 무원에게 내밀었다.
“그 총무라는 사람한테 전화해 봐.”
무원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이어폰을 꼈다.
“점심시간 전에 해 보자고. 변호사들은 7시에 출근해서 11시면 점심 먹으러 나가던지 회의실로 도시락을 시키니까. 만약 이 사람이 아직도 변호사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면 사무실에 있을 때 통화하는 게 낫잖아.”
희주는 무원이 전화를 거는 동안 자기 몫의 햄버거를 와구와구 먹었다. 무원은 상대편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며 희주를 응시했다. 그리고 커피를 홀짝였다. 아까 이덕식 아내가 내준 것에 비해 맛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뜨거운 커피였다. 마음도 훨씬 편했다.
이덕식이 고향에 차렸다는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출신 여자는 한때나마 자신에게 월급을 주던 사람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 점심시간 직전의 허기짐이 그녀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는지도 모른다. 희주는 기다란 베이컨을 씹으며 통화에 귀 기울였다.
“대한민국 판사는 특별한 인종이에요. 그 양반은 자기가 큰소리 내면 세상이 멈추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역겨운 인간이었어요. 그래놓고 본인은 여자 나오는 술자리라면 빠지질 않았죠.”
희주는 ‘여자’ 부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파트 1층에서 죽치던 김은정 기자도 비슷한 소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망치로 때려죽이고 싶으세요?”
무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했다.
“어떤 사람은 그러고 싶겠죠. 전 충분히 이해돼요.”
여자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30년 넘게 판사 생활을 했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만들었겠어요. 얼마나 많은 개떡 같은 판결을 내렸겠냐 이 말이에요. 그런 거지 같은 판결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도 돈도 없고 뭣도 없으면 복수도 못 하죠. 그게 현실이잖아요.”
“더 하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뭔가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그 인간은 현실 감각이 한참 모자랐어요. 사람들이 자기처럼 노력을 안 해서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죠. 본인은 자기 학비도 벌어 본 적 없으면서.”
여자는 쉬지도 않고 말했다.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실마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덕식이 살아생전 덕을 쌓은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 사무장님은 만약 억울한 판결을 받으시게 되면 복수하시겠어요? 돈도 있고…….”
무원은 차마 뒷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당연히 하죠.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전부 받아 내고 공개적으로 개망신 줄 거예요. 판사들 전부 AI 인공지능으로 바꿔야 해요. 물론 내 밥그릇도 온전치 않겠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그게 나아요. 안 그래요? 형사님은 살면서 송사 같은 데 휘말리지 마세요. 인생 아주 피곤해지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통화 감사합니다.”
“저기요, 이미 죽었으니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양반은 대중들이 자기가 내린 판결에 불만을 품고 욕을 한다는 것에 역정을 냈어요. 제 생각엔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존경받는 이 시대의 스승, 같은 게 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성질을 부렸어요. 암튼 유치한 인간이었어요.”
여자는 이후로도 한참 동안 이덕식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덕식 판사가 아랫사람에게 존경심보다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쪽에 가까운 법조인이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여자 역시 특정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칭하진 못했다.
“요즘 사람들은 범죄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가? 자기가 용의자로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형사한테 막 하네. 알리바이가 있으면 용의 선상에서 벗어난다는 것까지 알고 그러는 걸까?”
“그 정도는 중고생들도 다 아는 상식이니까요.”
“그렇군. 그런 게 상식이 될 정도로 세상이 썩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네. 넌 먼저 들어가. 내가 최준석을 만날게. 왠지 내가 혼자 만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알겠어요. 근데 사무장 여자의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상적이네. 일정 부분 동의하고.”
“씁쓸하지만 저도 그래요. 특히,”
희주는 무원을 바라보았다.
“특히 뭐?”
“판사를 전부 AI로 바꿔야 한다는 말에는 100퍼센트 동의해요.”
희주는 최준석을 길 건너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고용하는 학교 지킴이 보안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오후 3시, 그는 하교하는 저학년들을 위해 교통 지도 중이었다. 그는 보안관이라는 캐릭터에 충실하게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갈색 조끼를 입은 채 인자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리고 캐릭터 때문인지 본인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콧수염도 길렀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을 먼저 관찰하는 것은 희주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예고 없이 찾아갔다. 특히나 최준석 같은 경찰 출신을 만날 때는 더 그랬다. 그는 시민 폭행으로 정직 처분을 받는 바람에 자랑스러운 경찰이 대중의 비난을 받게 만든 여형사를 노골적으로 싫어할 게 뻔했다.
최준석은 경찰 생활에서 은퇴를 하고도 여전히 제복 비슷한 걸 입고 타인을 통제하는 일을 선택했다. 여전히 자신이 현역과 다름없는 분위기를 타인에게 풍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즉 원하는 대답을 얻기에 별로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교내 1층에 위치한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꾸며진 공간에 마주 앉았다. 원래는 양호실이 있었는지 침대 사이에 두는 커튼 파티션이 벽 한쪽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을 안내해 준 학교 직원이 희주와 최준석 앞에 커피 잔을 놓고 사라졌다. 직원은 존경받는 보안관을 찾아온 여자가 경찰이라는 사실에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갈 인물이 아닌데.”
최준석은 이 공간이 자신의 개인 응접실이라도 되는 양 여유롭게 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반말로 말했다.
“사건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습니다.”
예감이 좋진 않지만 직진하기로 했다.
“피해자 소지품에서 서장님 명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두 분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이젠 서장이 아니라 경찰트라우마학회 회장이야. 그 정도는 알고 왔겠지.”
그는 즉답 대신 호칭부터 바로잡았다. 희주는 최준석에게 그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짧게나마 후회했다. 그 바람에 대화의 우위를 점하지 못할 것 같아 초조해졌다.
“피해자가 뭐 때문에 기억을 삭제하고 싶다고 말하던가요?”
최준석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출입문이 있는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누가 듣지는 않는지 신경 쓰는 눈치였다.
“이덕식은 옛 친구고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다기에 조언을 조금 했을 뿐이야. 이제 그럴 나이잖은가.”
“옛 친구가 왜 힘든지 이유에 대해서는 털어놓진 않던가요? 회장님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은데요.”
“그건 자네가 알 것 없어. 죽었다고 해도 프라이버시는 지켜 줘야지. 이미 이 세상 떠난 사람 명예에 흠집을 낼 셈인가?”
“혹시, 여자 문제였나요?”
최준석은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양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흉터투성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직업이라는 게 그렇잖아. 좋은 일을 해도 좋은 소리를 듣기 어려워. 요즘 젊은 놈들은 경찰은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로 바꿔 부른다며. 지들이 왜 발 뻗고 자는지도 모르고. 안 그런가?”
그는 전략을 바꾼 것 같았다. 희주를 우리 편으로,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기로.
“예전 일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고 했어. 별의별 사건을 다 맡았으니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우리 학회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빅을 소개해 줬어. 내 역할은 그게 다네.”
최준석은 살살 달래는 어투로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회장님 조언대로 수술은 효과가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아주 만족하더라고.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했지. 그 뒤로는 따로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없었어. 그게 벌써 1년 전이야. 안사람은 괜찮던가?”
“괜찮아 보였습니다.”
“음…….”
“해바라기 센터에 대해 안내 드렸습니다. 회장님께도 그 센터와 관계가 깊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최준석은 그제야 미간의 주름을 펴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불편한 질문과 그렇지 않은 질문에 대한 온도 차가 명확한 인간이었다.
“센터는 20년 전 내가 강력팀 팀장이던 시절에 만들었지. 나도 창립 멤버로 이름을 올렸어. 센터는 피해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케어했어. 경제력이 없는 피해자들을 위해 직업훈련이나 일자리 소개까지 했으니까. 우린 이 사회를 위해서 젊음을 바쳤어. 이덕식도 마찬가지야. 그 친구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어.”
그날 밤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을 열자마자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너무 맛있는 냄새가 집에서 나고 있었다. 희주는 햄버거가 든 종이봉투를 어디다 버리든지 안 보이는 데다 처박고 싶었다. 하지만 이사한 지 일주일이 다 되도록 뜯지 않은 이삿짐 박스가 살인 현장의 노란 번호표처럼 듬성듬성 놓아져 있는 집 어디에도 싸구려 햄버거를 버릴 데가 없었다.
먼저 퇴근한 주웅은 희주가 도착할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희주는 선뜻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대신 청결함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혹시라도 청소를 했다가는 끝이라고 했다. 그리고 집에서 먹는 저녁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주웅은 유쾌하게 웃으며 부모님이 집을 비운 10대들처럼 밤을 보내자고 했다.
희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 냄새가 나는 주방으로 갔다.
“햄버거가 오늘 마실 와인이랑 잘 어울리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희주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주웅이 먼저 햄버거가 든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공황발작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온 그날부터 희주는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퇴원은 그다음 날 했지만, 15층 아파트에 위치한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또다시 발작이 찾아왔다.
결국 6인용 입원실에서 보름 가량 머물렀다. 입원해있는 동안 법의학자인 오랜 친구 경은이 대신 이사를 했다. 그래서 지금 이 오피스텔, 1층은 상가이고 2층부터 주거를 위한 오피스텔이 있는 건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낡은 CCTV에 노출될 약간의 각오만 있으면 누구나 들락날락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 없다는 점, 경찰서와 도보 10분 거리라는 점, 무엇보다 복층이라 층고가 높다는 점 때문에 고민 없이 여길 골랐다.
“집이 아직 썰렁하죠?”
주웅은 가볍게 몸을 놀려 레스토랑에서 투고 박스에 담아 온 요리들을 렌지에 차례로 넣어 데우기 시작했다.
“좋은데요?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고. 고양이 기르는 건 어때요? 집에 온기를 더해 줄 것 같은데. 만약 고양이를 기를 거면 40대 중반의 충직한 집사도 같이 입양해야 돼요.”
주웅은 렌지로 데운 것들을 식탁에 늘어놓았다.
“그뤼에르, 에멘탈 치즈를 올려 그라탕한 어니언 스프, 수란을 얻은 리옹식 샐러드, 콩피한 오리다리와 리조또에요. 전부 렌지에 데우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것들이에요. 괜찮죠?”
“일류 셰프가 왔다 간 것 같네요.”
“요즘에 포장이 워낙 잘 돼서요. 파크하얏트 2층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삼성동 거기?”
주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미안해요. 실수했어요.”
“뭐가요?”
“거기 사건이 일어난 호텔이죠.”
“맞아요. 근데 그게 어때서요?”
“괜히 잊고 있는 걸 건드린 건 아닌가 해서요. 불쾌할 수도 있고.”
주웅은 사과의 의미로 희주를 끌어안기라도 할 작정처럼 두 팔을 펼쳤다.
“전혀요. 전혀.”
희주는 포장한 음식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요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 좋아요, 좋은데.”
“좋은데?”
“이런 걸 먹으면서 내가 오늘 보자고 했던 범죄 프로그램을 봐도 되겠어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지만…… 무슨 내용인데요?”
주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톱으로 토막 내고 손가락 끝마디를 모두 절단해서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요.”
평온하던 주웅의 얼굴에 당혹감이 살짝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희주는 놓치지 않았다. 주웅은 오늘 저녁 메뉴 중에 육즙이 뚝뚝 흐르는 육류 요리가 있었는지 잠시 생각했다.
“국과수에서 일하는 제 친구가 여자의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을 부검했는데 나머지 조각은 아직 찾는 중이에요. 기동중대, 형사대 4개 반 200명이 넘는 인원이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이 발견된 도로변 갈대숲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나머지 조각을 못 찾았어요.”
끝내주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 소리를 줄인 채 화면만 빛나게 둔 TV를 조명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 주웅은 머그컵에 녹차를, 희주는 커피를 담아 마셨다.
주웅은 희주의 무릎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백하던 날도 그는 희주의 어깨와 팔꿈치 사이 어딘가를 부드럽게 터치했다. 나중에야 그게 정신과 의사가 상대와 라포르를 형성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주웅이 의도적으로 터치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정한 터치가 좋았다.
주웅은 의사라고 소개하지 않으면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진 남성들을 상대하는 유러피안 스타일의 편집샵 대표처럼 보였다. 병원 특유의 냉랭한 아이보리색 벽 앞에서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주웅 역시 응급실에 실려 온 희주를 보고 은퇴했거나 현역 생활을 하고 있는 핸드볼 선수라고 꽤나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주웅은 희주의 직업과 공황발작을 하게 된 이유를 알고도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는 변명처럼 모든 여자 환자에게 이러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끝없는 관대함으로 희주를 대했다.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그의 관대함은 계속되었다.
“그 호텔에서 남자가 죽었어요. 전직 판사고 나이는 60대 중반. 여러 번 공격당한 것 같아요. 금방 죽지 않았을 거예요. 고통을 오래 느꼈겠죠.”
희주는 사회면 뉴스로 나올 만한 선에서 사건에 대해 털어놓았다.
“한창 외로울 나이네요. 자식들은 전부 자라서 제 갈 길 갔을 테고, 아내와는 자식들이 독립하면서 사이가 더 돈독해졌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곪았던 게 터질 수도 있는 나이기도 하죠. 판사였다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거나 대기업 법률 고문으로 갔을 수도 있고, 그동안 못 간 여행이나 다니면서 그냥 쉴 수도 있겠고요.”
주웅의 입에서 아마도 그가 환자를 보면서 수집했을 데이터가 흘러나왔다.
“대체로 비슷해요. 피해자 소지품에서 빅 명함이 나왔어요. 한평생 부러울 것 없이 산 판사님이 무슨 기억을 지우고 싶었을까요?”
주웅은 머그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건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스티브 블래스라는 선수가 있어요. 피츠버그의 투수였죠. 최고 기록을 낸 후 다음 시즌부터 형편없는 투구를 보이며 스트라이크존에 더 이상 공을 던지지 못하다가 은퇴했어요. 화려하고 잘 나갔던 과거에 사로잡혀 평범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걸 그의 이름을 따서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라고 불러요. 의외로 남들이 보기에 멋진 삶을 살았던 이들 중에 말년이 불행한 경우가 많아요.”
희주는 자신의 나이키 티셔츠를 셀린느의 실크 블라우스처럼 쓰다듬는 주웅의 손길을 느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희주 씨는 어때요?”
주웅의 듣기 좋은 저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뭐가요?”
“트라우마 삭제.”
희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냥 담석 제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엄청난 통증을 유발하는 돌멩이를 수술로 꺼내는 것뿐이에요. 한 보름 정도만 쉬고 나면 돌멩이의 존재는 굿바이예요. 얼마나 상쾌하고 산뜻하겠어요?”
“그렇게 간단한 할 리가 없어요. 난 그런 복잡한 건 잘 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기억을 지운다는 게 아주 불쾌하게 느껴져요.”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계속 화가 나 있잖아요.”
희주는 머그컵을 꽉 쥐었다. 이러다가 몇 번이나 싱크대를 향해 집어 던졌다. 주웅은 뜨겁고 검은 커피가 찰랑이는 머그컵을 부드럽게 빼앗았다.
“그래요.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요. 난 다만,”
“아뇨, 할 필요 없어요.”
“끝까지 들어 봐요.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분노는 그것을 부은 것보다 담고 있는 그릇을 더 많이 훼손시키는 산과 같다고. 그 일이 희주 씨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요. 희주 씨는 나한테,”
주웅의 말 사이로 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2시. 이 시간에 오는 전화가 좋은 소식일 리 없다. 팀장이었다. 희주는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주웅의 팔을 빼며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살인이야.”
오치상은 건조하게 말했다.
“이번엔 변호사. 정확히는 검사 출신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