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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04화

04 판사와 망치

“근데 선배라면 누굴 죽일 때 망치를 쓰겠어요?”

by 김은주

“늦어서 죄송합니다.”

희주는 호텔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방은 살인 사건 현장을 조사하러 나온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반원들과 경찰들로 혼잡했다. 흰 조사복 차림에 파란 마스크를 쓴 감식반원 하나가 지나가다가 희주와 부딪혔다. 종종 현장에서 마주친 적 있는, 거의 코 위만 알고 있는 베테랑 감식반원이었다. 감식반원은 희주를 알아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감식반원들과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마주치기 때문에 매번 마스크 위 얼굴만 보다가 마스크를 내리면 몰랐던 사람처럼 낯설다. 눈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하관이 불협화음을 내면 재밌기도 하다.

희주는 테헤란로 사거리 한복판이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는 호텔방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타나니 불청객이 된 것 같다. 누군가 푸른색 라텍스 장갑을 내밀었다.

“선배.”

남자가 말했다.

“이번 주는 로또 사지마.”

“왜요?”

“운이 꽝이잖아. 월요일부터 살인 사건에, 파트너는 정직 먹고 쉬다가 온 꼴통, 게다가 그 꼴통이 또 사고 못 치게 쫓아다니면서 감시도 해야 하고. 그랜드슬램 축하한다.”

“네, 정확합니다.”

희주는 이 호텔 프론트에 세워 놓으면 여자 투숙객들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갈 게 분명한 무원의 대답에 빙그레 웃었다. 무원은 희주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대충 뭉개지 않고 늘 깍듯하게 선배 대접을 했다.

“나 없는 동안 신나게들 씹어 댔겠지?”

“언젠가 선배가 한 건 할 줄 알았다고 하던데요.”

“아무렴.”

“다친 데는 괜찮으세요?”

무원의 시선이 희주의 오른쪽 눈가를 향했다.

“멋지지 않아?”

강남서 여형사들 중 제일 키가 큰 희주보다 한 뼘 이상 큰 무원이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희주의 찢어진 눈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어때?”

“선배답고, 형사답네요.”

희주는 장갑을 끼고 노란색 작은 번호판을 따라 슬라이딩 도어 안쪽 침실로 들어갔다. 감식반원들이 증거물을 채취하고 세워 놓은 번호판이었다. 침실 안에도 마스크를 쓴 감식반원들이 증거물을 수집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번호판을 세우고 있었다. 희주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팀장에게 목례를 하고 쓰러진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옷장 안 여행 가방 선반 옆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술에 취한 채 사각 트렁크와 흰 러닝만 걸친 채 잠이 든 것 같다. 번호판이 거기서 멈춘 것을 보니 남자는 옷장 앞에서 죽은 게 분명했다. 옷장에 걸려 있는 두 벌의 하얀 목욕가운에 혈액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오치상은 휘어진 콧등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사람 치면 잘릴 줄 알아. 연금도 없이 늙어 죽고 싶지 않으면 잘해.”

그 말에 침실 바닥에서 혈흔 샘플을 채취하던 감식반원이 고개를 들고 희주를 흘끔 보았다. 그리고 사람 친 형사 얼굴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희주는 대답 없이 죽은 남자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치상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름 이덕식. 나이는 63세. 전직 판사.”

지긋한 중년의 전직 판사와 강남 한복판 트렌디한 부티크 호텔이 잘 연결되지 않았지만, 희주는 대꾸 없이 팀장 말을 들었다.

“객실 청소하러 들어온 여자가 12시 30분에 시신을 발견했고, 망치 한 점이 발견됐어. 요즘은 조심성이 없는 건지 대범한 건지.”

“뭐가요?”

“살해 도구. 현장에 버렸어.”

“초범이거나 당황했을 수도 있잖아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피해자가 너무 빨리 죽어 버렸다거나.”

“소설은 이따 네 파트너랑 써.”

오치상이 비아냥거렸지만 희주는 무시했다.

“사망 추정 시각은요?”

“어젯밤 11시부터 오늘 새벽 3시 사이. 밤 11시에 호텔로 들어오는 게 입구 CCTV에 찍혔어. 그 뒤로는 나가지 않았어. 호텔 내에 있는 술집, 식당에도 가지 않았고.”

희주는 시신을 살펴보았다. 남자의 왼손과 팔뚝 곳곳에 붉고 검은 멍이 들어 있었다. 찢어진 상처도 보였다. 상대가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왼손을 들어 방어한 듯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오른손은 깨끗한 편이었다. 그리고 양손 어디에도 결혼반지는 없었다.

“왼손잡이였나? 주로 왼손으로 방어를 한 것 같은데.”

희주의 말에 무원이 대답했다.

“오른손은 상대를 붙잡으려고 뻗고 있었을 수도 있죠. 오른손으로 상대를 잡고, 왼손으로는 날아오는 망치를 방어하고.”

희주는 다시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남자의 양쪽 광대는 망치에 맞아 함몰되었다. 주름진 좁은 이마에도 망치에 맞은 흔적이 있었다. 앞니가 거의 부서져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목덜미와 하얀 러닝 앞부분에 주로 혈흔이 집중됐다.

“어떤 미친놈이 판사를 망치로 때려죽인 거야?”

유리창 너머 9층 아래 발밑에서 차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던 오치상이 말했다.

“전직 판사가 젊은 애들 들락거리는 호텔방에서 속옷 바람에 맞아 죽었다? 최대한 빨리 용의자 특정해. 더 길게 설명할 필요 있어?”

“알아들었어요. 원한 관계부터 파 볼게요. 과거에 맡았던 사건에서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판사 때문에 빨간 줄 간 인간부터 뒤져 볼게요.”

“보나마나 여자 문제야. 협박당했을 수도 있고, 함정에 빠진 걸 수도 있어. 아니면 중늙은이가 호텔에 뭐 하러 왔겠어? 기사 지저분하게 나기 전에 처리해. 지금은 쓰지도 않는 판사 법봉에 비유하면서 망치의 심판을 받았다는 둥 이런 식으로 헤드라인 안 나게.”

희주는 오치상이 내심 이 일이 크게 기사화되길 바라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강남의 고급 호텔에서 사법 권력의 끝에 서 있던 전직 판사를 망치로 때려죽인 살인자는 과연 누구인가. 팀장이 바라는 건 그런 그림이 아닌지 궁금했다.

“사람이 죽는 건, 작은 사건이야.”

“…네?”

“매일 일어나는 흔해 빠진 일이라고. 사람들은 자기 집 주변에서 일어난 일 아니면 신경도 안 써. 내 말이 틀려? 하지만 판사가 죽은 건 좀 다른 문제야.”

“판사 죽음이 더 값어치 있다는 의미에요?”

오치상은 휘어진 콧등을 찡그리며 희주를 노려보았다.

“슬슬 기가 살아난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

“뭘요?”

“이 사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옷 벗을 각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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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는 호텔방을 나가는 오치상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걸 꾹 참고 증거품 봉투를 들었다. 겉봉에 목록이 적혀 있었다. 현금 35만원,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명함 4장. 희주는 봉투 안에서 명함을 꺼냈다. 명함을 차례로 확인하다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빅.”

특별한 것 없는 흰 직사각형 명함에 ‘빅’이라는 한 단어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영문으로 빅이 어떤 글자의 머리글자를 딴 조합인지 알 수 있도록 풀어 써 놓았다. 뒷면에는 빅의 주소가 한글과 영문 두 가지로 적혀 있다.

“브레인 임플란트 칩.”

무원이 다가와 빅 아래 적힌 영문을 읽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뇌 공학 연구소네요. 피해자 머리에 수술 자국이 있는지 확인하고 거기도 가 봐야겠어요.”

“너도 그 기괴한 수술에 대해 알고 있어? 세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변했지?”

“선배 쉬는 동안 경찰스트레스장애학회에서 왔다갔어요.”

“그게 뭔데?”

“최준석 서장님이 작년에 퇴직하고 창설한 학회에요.”

강남서 경찰서장 출신인 최준석은 과거 강력반 팀원이던 오치상의 직속상관이기로 했다. 지역 조직폭력배 소통에 공로를 인정받아 재작년 총경 자리에 올랐다가 1년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다.

“설마 나 때문에 그런 귀찮은 일이 벌어진 거야?”

“올 초에 옆 지역 경위가 자살했잖아요.”

“기억나. 심하게 훼손된 사체를 보는 일 때문에 형사 생활 내내 힘들어했다던데. 자기가 형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생전에 동료한테 토로했다는 기사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어. 도대체 어떤 형사가 그걸 보는 걸 좋아하겠어. 어떤 날은 온몸을 다 씻어도 시신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분 동료가 그 일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데요. 동료 형사가 자살했으니 충격이 컸던 거죠. 그게 기사화가 되면서 경찰공무원들 스트레스 관리가 이슈가 됐고요. 선배 말대로 이젠 세상이 변했으니 외면할 수만은 없는 문제가 되었죠.”

“남의 일 같지가 않네. 넌 내가 죽어도 그러지 마. 산 사람은 살아야지.”

무원은 찐득한 피와 숱 없는 머리카락이 뭉쳐진 이덕식의 뒤통수를 살펴보았다.

“근데 선배라면 누굴 죽일 때 망치를 쓰겠어요?”

“그건 왜?”

“기술자가 아닌 이상 한두 번 휘둘러서는 급소를 정확히 때리기 힘들잖아요. 빨리 죽지도 않고 액션이 크니까 불필요하게 본인 흔적이 남을 가능성도 크죠. 머리카락이나 분비물, 섬유 조각, 바지에 묻은 담뱃재 등등.”

무원은 희주를 향해 망치를 쥔 것처럼 오른손을 흔들었다.

“현장을 보면 피해자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쫓아다니면서 때린 것 같은데, 아마추어일까요? 아니면 아내? 애인?”

“너 같으면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인간을 이런 좋은 데서 불러내고 싶겠어? 없던 애정도 싹틀 것 같은 분위기 좋은 호텔에서?”

“이런 데니까 피해자가 경계심 없이 나타났을 수도 있죠. 뭔가 좋은 일을 기대하면서.”

희주는 감식반원들까지 전부 사라진 침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경치 정말 좋네. 네 말대로 절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간이야.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망치를 들고 이런 좋은 데서 사람을 죽였어. 그리고 저 밖엔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하게 걸어 다니는 놈들이 섞여 있을 테고.”

커다란 통 창을 가려 주는 블라인드가 천장까지 말려 올라가 있어서 테헤란로 뷰가 끝내줬다.

“욕실도 통 창이라 블라인드를 걷고 욕조에 앉아 있으면 저쪽 건물에서 다 보이겠어.”

욕실을 보고 나온 희주가 말했다. 피해자가 쓰러져 있는 슬라이딩 도어를 밀면 자쿠지가 있는 욕실이 나왔다.

“범인은 블라인드를 내리고 피해자를 죽였을까? 반대편 건물의 누군가를 의식해서? 보통 체크인할 때 블라인드 상태가 어때? 난 이런 데 와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모르겠어.”

“…저도 뭐 딱히.”

“맨 처음 방에 들어오면, 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지 아니면 올라가 있는지 궁금하네.”

무원도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방의 블라인드들, 건드리지 말고 전부 지문 채취하라고 해. 혈흔도. 범인이 조심성 있는 인간이라 블라인드를 내리고 피해자를 공격했길 바라자고. 그러면 이 블라인드 어딘가에 뭐라도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네.”

“솔직히 지금,”

“네?”

“속으로 감탄했지?”


두 사람은 현장을 빠져나와 호텔방 앞에 경찰과 함께 서 있는 호텔 메이드를 만났다. 50대 중반에 약간 몸집이 크고 노안 때문에 안경을 쓴 메이드는 객실관리부 소속 룸 어텐던트였다.

“근데 언제까지 있어야 되나요? 퇴근 시간이 다 돼서.”

희주는 재빨리 수첩과 펜을 꺼냈다.

“이미 다 진술하셨겠지만, 상황을 한 번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당연히 손님이 나갔을 시간이니까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들어갔는데 좀 이상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기분이 맞았던 거지. 아니나 다를까 침실에 들어갔는데 그 양반이 쓰러져 있는데, 난 그저 술이 덜 깼나….”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드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평소랑 달랐던 점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피해자 말고 그 객실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는지, 복도에서 무슨 소리를 듣진 않으셨는지.”

잠시 생각하던 메이드가 콧방울까지 내려온 안경을 손등으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음, 키 큰 남자가 들어가는 걸 본 것도 같고. 그래, 웬 남자가 하나 들어간 게 이제 생각이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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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는 볼펜을 고쳐 잡았다.

“죽은 양반은 한 60킬로나 나갈까 싶잖수. 근데 그 양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아 뵈는 남자가 그 방으로 들어가더라고. 옆방에서 수건을 더 갖다 달라고 해서 문을 열고 수건을 주는 사이에 그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지.”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기가 한 말대로 옆방 문 앞에 가서 문을 여는 시늉을 했다. 그 말대로라면 그녀가 수상한 남자를 본 건 아주 일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객실은 직선이 아니라 뱀처럼 고불고불하게 배치되어 있어 다른 투숙객과 마주칠 일마저 극도로 적다. 게다가 이 호텔은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CCTV를 아주 최소한으로 설치한 것으로도 입소문을 탔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신 모든 입, 출입을 15층에 위치한 로비 층을 통하도록 했다. 즉 1층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어느 층에 머물든지 상관없이 15층에 일단 먼저 간 다음, 1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바꿔 타야 했다. 약간의 번거로움만 받아들인다면 객실 복도와 객실은 지켜보는 눈 없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다. 적어도 손님 중에 살인마가 섞여 있기 전까지는.

“그때가 몇 시쯤인지 기억하세요? CCTV를 보면 그 남자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때 하필 안경을 안 써서… 아무튼 키가 훌쩍 컸어. 그건 확실해. 검정색 모자를 푹 쓰고 있어서 얼굴을 못 봤지만. 젊은 사람이겠지? 젊은 애들이나 쓰는 모자를 썼으니까. 하지만 시간은 정확히 기억해. 7시. 어느 층이든 붐비는 시간이거든. 식당 예약 시간에 맞춰서 손님들이 외출을 나가는 시간이라.”

희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야구 모자를 쓰고 토요일 저녁 7시쯤 죽은 이덕식보다 먼저 904호로 들어간 남자가 범인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말이야, 그 망치 보고 깜짝 놀랐어.”

“왜요?”

“우리집에 있는 거랑 똑같아서. 남편이 언젠가 마트에 갔다가 웬 공구 세트를 들였는데 그게 그렇게 비쌀 줄을 몰랐지. 그게 남자의 로망이라나. 근데 그 망치로 사람을 죽였다니 갖다 버리고 싶네. 소름 끼쳐.”

여자는 이제 됐다는 희주의 말을 듣고 카트를 밀며 복도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향해 갔다.

“저분 진술을 믿어도 될까요?”

무원이 여자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물론 나이에 대한 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커. 어쨌건 범인은 피해자보다 먼저 호텔방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고 CCTV의 위치나 이 호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해. 자, 이제.”

희주는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이 층에 있는 9개의 문을 다 두들겨보자고. 물론 한창 재미 좋을 토요일 밤 11시에 다른 방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알아? 잘나가는 연예인 불륜 커플을 볼지도 모르고. 만약에 보면 아는 기자한테 팔아. 요즘엔 얼마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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