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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03화

03 뜨겁고 위험하고 매력적이고

"짖는 개를 묶어 둔다고 짖지 않는 건 아니니까."

by 김은주

“좀… 떨리네요.”

희주는 주웅의 말에 피식 웃으며 진료실 책장 뒤에서 나왔다. 땀에 전 정장 바지와 블라우스를 벗고 챙겨온 청바지와 검정색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복직 심사를 마친 다음 그대로 병원까지 걸어왔다. 경찰서를 나와서도 남자의 얼굴이 유령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얼굴을 떨쳐 내고 싶었다. 그래서 굽이 있는 구두를 러닝화로만 바꿔 신고 걸어서 병원까지 왔다.

경찰들이 정장을 입는 건 주로 나쁘고 불리할 때다. 알량한 밥그릇을 뺏길 위기에 처했을 때 제발 그것만은 빼앗지 말아 달라고 빌기 위해 입는다. 희주는 이런 자리에 나갈 때 어떻게 입어야 좋은지 경찰대 동기이자 전남편인 정현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전남편에게 복직 심사 때 입을 의상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고 말하면 주웅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희주는 폐소공포와 공황발작에 시달리는 환자와 연애를 시작한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진료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환자는 희주 씨가 처음이에요. 아,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진료를 보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 줘요.”

“그 과감한 환자가 애인인데, 별로예요?”

“조금 솔직하자면 두 팔 벌려 환영입니다. 물론 난 두 손을 무릎에 놓고 얌전히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임주웅. 편안하고 차분하게 환자들을 대하면서도 전문가다운 태도를 잃지 않는 의사. 모든 의사가 다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그의 첫인상은 특별했다.

“기분은 어때요?”

주웅이 물었다. 그는 오늘이 희주에게 어떤 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최악이에요.”

“그래도 잘 끝났잖아요.”

“알아요. 불평할 처지가 아니죠. 하마터면 책상 앞에서 서류나 만지다가 형사 생활 종 칠 뻔했으니까.”

“잘 참았어요. 잘 했어요.”

흡사 비행을 저지르고 가출했다가 돌아온 위기의 청소년을 대하는 듯, 사려 깊고 다정하고 일순 애 취급하는 듯한 저 말투. 하지만 지금 희주에게 필요한 건 공감이지 채찍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주웅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여자 앞에서 정말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형사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한 것 같아요. 돌아가서 욕할 거예요. 구제 불능이라고.”

“하라고 해요. 어쨌든 희주 씨가 바라는 대로 됐으니까.”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웅의 책상 앞에 앉았다. 불편하고 땀에 전 옷을 벗으니 한결 편해졌다. 전남편이 직접 골라 준 이 옷은 그와 이혼하고 나서도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경조사용 단골 의상이 됐으며, 오늘처럼 성질을 죽여야 하는 자리에 안성맞춤이었다. 희주는 복직 심사에 통과한 행운을 그의 섬세한 안목에 돌렸다.

희주는 응급실에서 남자를 때리고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발작하면서 기절했다. 주웅은 기절한 여자가 형사라는 사실에 놀라고, 방금 전 사람을 폭행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그날 이후부터 그는 희주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자신과 남녀관계로 만나 볼 생각 없냐고 물었다. 쌍욕을 섞어 가며 세상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희주는 그의 고백에 벙쪘다. 그리고 의사 중에서도 정상 아닌 인간이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으로 그치진 않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희주의 말에 주웅은 파안대소했다.

“환자와 연애를 하니 좋은 점도 있네요.”

주웅은 희주의 손목을 잡고 맥박을 쟀다.

“뭔데요?”

“환자는 의사에게 100% 솔직하지 않아요. 진실을 감출 때가 더 많죠. 고작 20분 정도 주어지는 상담 시간 동안 피곤에 절어 있는 얼굴의 의사에게 자기가 정말로 힘든 이유를 털어놓는다는 거 어렵잖아요.”

맥박을 잰 다음에는 혈압계를 희주의 팔에 두르고 혈압을 쟀다. 옅은 땀 냄새. 땀에 젖은 잔머리가 붉게 상기된 볼에 붙어 있다. 이렇게 보니 서른세 살의 강력계 형사가 아니라 스물두어 살쯤 된 대학생 같다. 화장기 없는 얼굴. 무늬 없는 무채색 티셔츠, 길고 마른 다리를 감싼 청바지. 나이키 러닝화. 희주는 매번 그 모습으로 주웅의 진료실에 나타났다. 매번 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매번 새롭게 보일 줄은 몰랐다.

“3개월 전과 비교했을 때 어떤 상태인지 애인이기 때문에 더 잘 알 수 있어서 다행이랄까.”

주웅은 혈압을 재고 나서 말했다.

“체중이 얼마나 빠졌어요?”

“5,6킬로그램 정도?”

“더 잘 자야 해요. 식사도 좀 더 성의 있게 하고요. 이 얘기 벌써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전혀 지키고 있지 않은 거죠?”

주웅은 미묘한 선을 잘 지켰다. 그는 연애 전과 다름없이 조심성 있게 희주를 대했다. 결혼 생활을 해 보지 않은 남자가 가지기에 드문 미덕이었다. 짧고 단정한 머리에는 나이에 비해 일찍 서리가 내렸지만 희주 눈에는 오히려 보기 좋았다.

병원에서 그는 철저히 의사로 행동했다. 자신감 있으면서도 상냥하게. 아마도 다른 환자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쏟아지기 일보 직전인 감정을 떨리는 손에 쥔 채 자신의 진료실을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그는 결코 건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희주는 그를 받아들였다. 중심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혹은 전속력으로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는 것을 막아 줄 사람이. 혹은 휴식을 위해 돌아갈 장소가.

첫 데이트를 하던 날, 두 사람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찰이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웅은 경찰공무원의 트라우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희주는 의사라는 재수 없는 인간들이 어떻게든 병 이름을 붙여서 멀쩡한 사람에게 정신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 상하는 굴레를 씌우려 한다며 반발했다. 주웅의 의견에는 주제가 무엇이든 반대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악취미라는 걸 인정하지만, 그와 입씨름을 하는 게 즐거웠다. 도대체 언제까지 주웅이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의 궤변을 들어줄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주웅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반격을 기다렸다.

“전 솔직하다가 전남편에게 차였어요.”

“그거참 무서운 말인데요? 전 차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주웅은 애인의 실패한 결혼에 대한 경험담을 들을 때마다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녀에게 여자로서 아내로서의 삶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런 상태의 형사가 거리를 활보한다는 게 걱정되는 수준이에요.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버스 정류장에서 노인을 밀며 새치기하는 사람만 봐도 화가 치솟을 것 같거든요. 공황 발작도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어요. 꼭 차 안이 아니더라도 엘리베이터나 좁은 회의실에서도 폐소공포를 느끼고 발작할 가능성도 있고요.”

“끔찍해요. 내가 이렇게 약해빠진 인간이 될 줄은 몰랐어요. 멘탈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인간은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어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치료의 시작이에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것.”

“난 인정 못 해요. 고칠 거니까. 동료들 앞에서 또다시 발작하고 기절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죽는 것보다 나은 선택 같은 건 없어요.”

주웅은 짐짓 꾸짖는 투로 희주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곧바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몰아세우면 안 돼요. 지치고 힘들면 무너지고 쓰러질 수도 있어요. 좀 우스워 보이면 어때요. 비웃고 싶으면 비웃으라고 해요. 살면서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죽는 것보다는 그게 백배 천배 나은 일이에요.”

“난 그러면 안 돼요. 이해해요? 난 살인범, 강간범 잡는 형사예요. 형사가 범인 잡으러 뛰다 말고 기절한다는 게 말이 돼요?”

주웅은 희주의 손을 잡았다. 의사로서가 아닌, 이제 막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손길에 희주는 움찔했다.

“그러니까 쉬어야 해요. 형사니까요. 위험한 상황에서 오히려 본인이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 범인이 무기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공황 발작이 일어나면 어떡할 거죠? 지금 당장 휴직계를 내고 쉬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이라고 보고서를 올리고 싶어요. 필요하다면 수술도 권하고 싶고요.”

희주는 주웅을 바라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표정에 주웅도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정말 우스운 일이에요. 세상에 어떤 형사가 차를 못 타요? 운전도 못 하고. 이래서는 순찰차도 못 끌고 도로 경찰도 못하죠. 책상 앞에서 서류나 끼적거리는 내근직은 상상도 안 해 봤어요. 그냥 화가 많아서 주먹이 먼저 나간 인간 정도로는 안 되는 거였어요? 꼭 그렇게 맥 빠지는 병명을 나한테 붙여서 그 재수 없는 여자한테 줘야 했어요?”

“그게 제 일이에요.”

“참 거지 같은 일이네요.”

“그래도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날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어때요?”

희주는 주웅에게 잡혀 있는 손을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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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피범벅이 되는 느낌이에요. 실제로는 현장에 혈흔은 없었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피가 난자한 현장 한복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아요. 그 남자는 분명히 똑같은 짓을 저지를 거예요. 짖는 개를 묶어 둔다고 짖지 않는 건 아니니까.”

주웅은 책상에서 일어나 희주가 앉은 소파에 걸터앉았다.

“사명감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좀 더 일에 거리감을 둘 필요가 있어요. 지금 상태는 정상이에요. 희주 씨는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에 제대로 반응했어요. 다행히 이인증이나 해리증상, 무감각 증상은 없기 때문에 자신과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어요. 다만 분노와 불안 수치가 높을 뿐.”

“아까 말한 수술은 무슨 의미예요?”

“트라우마 삭제 수술이요.”

희주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살짝 벌렸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수술로 그날의 내 기억을 지우라는 거예요?”

“정확해요.”

“그게 가능해요? 뇌를 끄집어내서 물에 씻기라도 하는 거예요?”

“정확히는 두개골을 일부 열고 기억이 저장된 부위에 칩을 삽입하는 거예요. 그 칩이 지우고 싶은 기억을 지워 주죠.”

“어떤 미친 사람이 자기 머리통을 열고 기억을 지워요? 무슨 공상과학 영화 찍어요?”

“이미 원하는 기억만 정확히 삭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했어요. 영화로 나와도 이젠 아무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준이죠.”

주웅은 이제 연인보다 의사에 더 가까운 태도로 말했다.

“효과는 이미 충분히 입증됐어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상용화가 충분히 이루어졌어요. 한국도 도입은 이제 막 1년 정도 되었지만 수술 사례에 대해 이미 학회에 넘치도록 보고되고 있어요. ‘빅’이라는 뇌 공학 연구센터가 선두에 서 있고요. 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해바라기 센터와 연계해서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데 성과가 좋아요. 평범한 사람들이 다시 평범한 삶을 살도록 돕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안 되네요. 남이 자기 머리통을 열어서 기억을 지우게 하다니.”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가 직접 집도해요. 그 의사, 학회에서 얘기 나눠 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아주 스마트하고,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피해자 편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듣기로는 유명 기업에서 상당한 액수의 시드 머니를 받았다고 해요. 그만큼 사업적으로도 전도가 유망한 분야라는 의미겠죠.”

“그 의사는 피해자를 위해 일해도 미친 사람 취급받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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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웅은 희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인간의 인생은 대부분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지잖아요. 즐거운 이벤트는 아주 가끔일 뿐, 직장에 나가 돈을 벌고 파트너와 가정일을 상의하면서 충돌하고 화해하고 아이를 키우고…. 그러니까 일상이 망가지면 인생이 무너져요. 희주 씨가 10년 넘게 하던 운전을 그날 일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트라우마 삭제술은 그런 평범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수술이에요.”

“그런 얘긴 관둬요.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요.”

환자의 이런 반응은 특별할 것이 없다. 주웅은 희주를 위해서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식욕 부진, 수면장애, 불면증, 피로감, 분노와 불안이 희주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러다 한계에 도달하면 발작이 일어나죠. 그렇게는 일상을 제대로 살아 낼 수가 없어요. 희주 씨 말대로 그래서는 범인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겠죠.”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웅의 입을 통해 현재 상태를 듣고 나니 정말 나약해 빠진 인간이 된 것 같다. 다시는 살인범을 쫓는 일은 하지 못할 무능한 형사.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아직은.

“…그게 인생 아니에요?”

“뭐가요?”

“불안하고 두렵고. 그런 감정 때문에 누구나 힘들 때가 있잖아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에요. 항상 편안하길 바라는 건 도둑 심보구요. 게다가 난 나쁜 놈들 잡아넣는 형사예요.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살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든. 언제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죠. 심지어 당신조차도. 난 그런 생각을 밤낮으로 하는 게 직업이에요.”

주웅은 희주의 손을 잡았다. 뜨겁고 위험하고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 이 여자의 손. 당장 끌어안고 싶다. 두 사람 사이를 진작 눈치챈 간호사들이 진료실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테지만.

“자, 지금부터는 좀 더 애인 사이에 가까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참은 인내심에 경의를 표해야겠군요.”

“기념 파티라도 열어야죠. 특별한 날이잖아요.”

“나중에 해요.”

“또 거절이에요? 난 희주 씨한테 거절만 당하다가 노인이 되겠어요.”

희주는 주웅의 손을 빼고 땀에 전 정장이 든 백팩을 메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 안에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쌓인 사건 파일이 가득해요. 오늘은 이걸 읽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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