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기억을 지운 게 아니야. 트라우마에 시달렸어.”
눈앞으로 칼날이 날아든다.
남자는 빛나는 칼날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을 막으려고 손을 뻗었다.
칼날은 주저 없이 그의 왼손을 찔렀다.
칼날이 차갑다가 돌연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다.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길 바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들이 보인다.
차가운 눈이 남자를 응시한다.
그것은 자작나무의 얼룩이다.
자작나무 몸통의 짙은 얼룩은 마치 반쯤 잠긴 초점 없는 피곤한 눈처럼 보인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그 눈이 남자를 따라온다.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Argos)
자작나무는 거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나무가 죽어 가는 한 남자를 응시한다.
남자도 한때는 죽어 가는 여자를 바라만 보았다.
입을 막고 귀를 막고.
그 벌을 이제야 받는 것인가.
20년 전 유령이 이제야 방문한 거야.
아니야.
어쩌면 계속 문 앞에서 오늘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지 몰라.
칼날이 복부를 연속해서 찌른다.
남자의 시야가 흐려진다.
아거스 나무의 눈은 무심하다.
“이번엔 칼이야.”
오치상이 말했다.
“이름 주용훈. 59세. 캠핑장 관리인이 발견했어. 초저녁부터 술에 꼴은 인간인 줄 알고 창문을 두드렸는데 꼼짝을 안 해서 경찰을 불렀다더군.”
“동일범일까요?”
마른침을 삼키고 희주가 말했다.
“그럴지도. 근데 어떤 미친놈이 판사랑 변호사를 골라서 죽이는 거지? 공권력에 불만 가진 놈인가?”
현장은 서울 인근 교외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이었다. 인근 산자락 아래 자리한 숲은 하절기 동안 상시 개방했다. 숲을 찾는 시민들에게는 좋은 뉴스였지만, 살인사건 용의자를 찾는 경찰에게는 나쁜 뉴스였다. 숲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용의자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희주와 무원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노란색 접근금지 띠로 막아 놓은 차로 다가갔다. 새까만 어둠 속에 서 있는 검은 세단 한 대. 마치 장례차처럼 슬프고 음산하게 보였다.
감식반원들이 현장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노란 플라스틱 번호판이 차 둘레에 세워졌다. 새벽 3시라 구경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휴대폰 불빛이 보였다. 멀리서 이곳을 보면 영화라도 찍는 줄 알 것이다.
“이번에도 뚜렷한 목격자가 없어. 재수도 없지.”
호텔방에서 망치에 맞아 죽은 전직 판사 사건에서 CCTV는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5층에 위치한 로비층 CCTV 속에는 주말을 이용해 호텔을 찾아 체크인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그 안에서 중년의 메이드가 진술한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상, 하의를 모두 검정색으로 입고 야구 모자를 쓴 20대부터 50대까지의 남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변호사가 여길 왜 왔을까? 혼자 캠핑하러 온 것도 아닐 테고. 트렁크도 텅 비어 있던데.”
오치상은 달려드는 날벌레를 손으로 쫓았다.
“아마도 약속된 장소겠죠.”
“뭔 소리야?”
“여긴 용의자와 피해자만 아는 장소일 거예요. 둘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일 가능성이 커요. 그러니까 카페나 술집이 아니라 남들은 생각 못 할 이런 데서 만날 수 있는 거죠.”
희주의 말에 일리가 있는 듯 오치상도 별다른 트집을 잡진 않았다.
“지난번 사건과 한 세트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연쇄살인이라는 거야?”
오치상은 짜증을 냈다. 곧 기자들은 입을 놀릴 것이고, 서장과 청장은 그를 압박할 것이다.
“빨리 용의자 특정하고 없으면 그럴듯한 가설이라도 세워. 검사 출신이잖아. 주용훈 때문에 인생 조지고 빵에서 썩었다가 막 나온 놈들, 한 열댓 명 바로 안 나오겠어?”
“이덕식과의 연관성도 생각해야 돼요.”
“폭력 전과 있는 놈들 우선적으로 보라고. 연장질하다가 들어간 놈들 말이야.”
“왜 남자라고 단정 지으세요?”
“네 입으로 동일범이라며.”
오치상이 증거물 봉투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스위스아미 브랜드의 과도가 한 점 들어 있었다. 칼날의 크기는 13센티미터 정도지만 앞부분이 아주 날카로웠다. 가정용 과도가 칼등 부분이 둥글게 연마된 것과 비교했을 때, 이 칼은 사이즈만 과도 크기였지 훨씬 더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10년 동안 전국에서 살인 도구로 망치를 쓴 사건이 총 몇 건인 줄 알아?”
“37건입니다.”
무원의 입에서 즉답이 나왔다.
“전부 남성 피의자였습니다. 칼도 가정폭력으로 인해 집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제외하면 전부 남성 피의자들이 선택한 살인 도구고요.”
자작나무 숲 주차장 입구에 달린 CCTV에서 주용훈의 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밤 9시쯤 들어온 그의 차는 주차장 제일 안쪽 산자락과 가까운 곳에 차를 댔다. 그리고 숲 관리인이 그를 발견한 새벽 1시까지, 노회한 변호사는 에어컨도 꺼진 차 안에서 4시간 동안 혼자 있었다. 밤이지만 기온은 31도였다.
희주는 차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머리를 넣었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비릿한 피 냄새는 8월의 습도와 만나 가공할 만한 역한 냄새를 만들어 냈다. 거기에 시신에서 풍겨 나오는 체취와 분비물 냄새 또한 훅 끼쳤다.
지독한 냄새, 좁은 차 안, 불과 서너 시간까지 머물렀을 살인자의 존재,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쳐서 경보기를 울렸다. 당장 머리를 빼서 열기로 지글거리는 주차장 바닥에 아까 먹은 훌륭한 저녁 식사를 토하라는 신호. 희주는 식은땀 때문에 차가워진 손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플라스틱 원통형 약병을 매만졌다. 약통에는 자나팜정 1밀리그램이 다섯 알쯤 들어 있다.
“제가 볼까요?”
무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넌 조수석 확인해.”
희주는 시큼한 곤죽이 된 저녁 식사가 식도를 타고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고 시신을 확인했다. 청테이프로 입과 턱을 틀어막은 채 죽은 주용훈의 연회색 와이셔츠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 왼팔과 왼손, 복부 쪽이 심했다.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운전석 시트를 적시고 정장 바지를 다 적셨다. 발목 또한 청테이프로 정교하게 감아져 있었다. 여러 번 칼에 찔린 다음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 같았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워. 급소를 제대로 한 번에 공격하지 않는 이상. 보통 사람은 칼로 찌르려다가 오히려 본인이 다치기도 해.”
“범인도 그래서 여러 번 찌른 거겠죠?”
“근데 정말 죽이려고 한 걸까?”
희주가 무원에게 하는 질문도 아닌 혼잣말도 아닌 투로 말했다.
“피해자는 완벽하게 제압된 상태였어. 청테이프로 입을 막았으니 구조 요청도 못 했을 거고 다리도 꼼꼼하게 묶었어. 정말 죽일 생각이었으면 깔끔하게 목이나 심장을 노렸겠지. 그냥 겁만 주거나 경고용으로 칼을 쓴 게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피해자가 강하게 반항하니까 복부를 여러 번 찔렀고. 안전벨트를 봐.”
희주는 피가 묻은 안전벨트를 가리켰다.
“피해자는 살아 있을 때 도망치려고 했어. 즉 공격을 당하고 바로 정신을 잃거나 하지 않았다는 거야.”
무원은 희주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분홍색 스마일 로고 둘레에 노란색 꽃잎을 단 해바라기 위에 ‘여러분의 성실한 이웃’이라고 적혀 있다. 주용훈은 해바라기 센터 내 전담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부유한 자들의 대변인이 아니라 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였다.
“어떻게 생각해?”
“선배 말대로 호텔 사건과 오버랩 돼요. 장소도 다르고 살해 도구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치명상을 입고 죽은 게 아니라 꽤 시간을 들여 실랑이를 한 흔적이 보여요.”
“내 생각도 비슷해. 그리고 피해자들은 일반적으로 존경받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잖아. 하지만 주변 평판은 좀 달랐지. 주용훈은 어떨까?”
보조석에 놓인 가방 속에서 상담을 맡은 사건들의 서류가 나왔다. 전부 가정폭력, 성폭력, 아동학대 등 해바라기 센터에 주로 입소하는 피해자들 사건이었다. 그리고 원통형으로 생긴 흰 약통이 2개 나왔다.
“뭔지 아시겠어요?”
무원이 약통들을 내밀었다. 희주는 그게 뭔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하나는 지금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동일했다.
“공황장애 약이야. 다른 하나는 수면제고.”
가방 안에는 팩소주와 구강 청결제, 일회용 칫솔과 면도기도 나왔다.
“변호사들은 전부 이래요?”
무원이 주용훈의 소지품들을 보고 말했다.
“뭐가?”
“수면제, 술, 가글, 칫솔. 집에는 안 들어가는 걸까요?”
“이것 봐.”
희주는 명함을 내밀었다. ‘빅’의 명함이었다. 희주는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주용훈의 땀에 전 두피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중년 남자의 얇고 힘없는 머리카락이 끈적끈적한 땀과 피에 젖어 역겨운 체취를 풍겼다. 정수리 부근에서 희미하게 우둘투둘한 흉터 자국이 만져졌다.
“왜요?”
희주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무원이 물었다.
“주용훈도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았어. 첫 번째 피해자와 동일해.”
희주와 무원은 피해자의 차에서 한 발 떨어져서 감식반원들이 범인의 흔적을 찾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30분 정도 뒤면 해가 떠오를 것이다.
“두 피해자 사이에 최준석이 있어. 아마도 주용훈은 해바라기 센터라는 연결고리로 만났겠지.”
“혹시 그 전부터 이미 알던 사이는 아닐까요?”
“그럴 수도. 네 말이 맞길 바라. 그래야 정의의 보안관을 다시 만날 핑계가 생기니까.”
“피해자의 병원 기록 확인해 볼게요. 불면증과 알코올 중독 때문에 정신과 상담과 처방을 받은 이력이 있을 거예요. 피해자가 왜 트라우마 삭제를 했는지 상담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크게 기대 없어.”
“왜요?”
“수면제는 수면장애 진단만 받으면 줘. 불안장애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 진단이라는 건 겨우 10분 내외의 상담이고 환자가 원하면 큰 문제 없이 처방전을 내준단 말이야. 의사는 이유를 몰라도 돼. 묻지도 않아. 주치의는 아마 자기 환자의 트라우마가 정확히 뭔지 모를 거야. 관심도 없겠지.”
“그럼…….”
“이덕식과 주용훈은 단순히 기억을 지운 게 아니야. 트라우마에 시달렸어. 그 트라우마를 지워 준 의사는 알겠지.”
“그럼 빅에 가 봐야겠네요.”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실마리는 거기에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