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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08화

08 부검

"아직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어요."

by 김은주

판결 논란이 끊이지 않던 전직 판사의 충격적인 죽음!

타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사법 권력에 대한 경고인가?

담당 형사, 판사의 ‘은밀한 사생활’ 논란에 묵묵부답으로 일관, 추측 키워



인터넷 뉴스 기사 요약 문구를 보고 욕이 절로 나왔다. 흔해 빠진 이름이라던 기자가 쓴 기사였다.

“입도 뻥긋 안 한 결과 한번 대단하네.”

희주와 무원은 그 옛날 호랑이가 나온다는 돌산 아래 자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울지부로 들어갔다.

“이경은 법의관은 처음이지? 보면 놀랄걸.”

“왜요?”

“전혀 법의학자 같지 않거든. 걔는 집에 사람들 초대하고 브런치나 즐기면서 살 것 같은 타입이야. 그 집에는 사랑도 돈도 풍족해. 모든 게 여유가 넘치지. 걔를 보면 인간은 여러 종류로 나뉜다는 걸 깨닫게 된달까.”

희주가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하루에 5구의 시신을 부검하는 베테랑이자 토끼 같은 딸을 키우면서 아직 교수가 못 된 마흔 줄의 공학박사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부지런한 워킹맘.”

“선배는 어떤 타입인데요?”

희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나? 난 결혼이랑 안 어울리잖아.”

“본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요?”

“한 번 갔다 왔으면 답 나온 거 아냐? 난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어. 여유도 취미도 없고. 있는 건 각종 정신병 진단서뿐이야.”

“깡도 있잖아요. 그럼 비긴 거 아니에요?”

경은은 두 사람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손님을 맞이하듯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부검실의 여주인. 경은은 푸른색 수술복을 홈드레스처럼 보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희주와 무원은 세로로 긴 철제 테이블에 놓인 벌거벗은 두 시신을 바라보았다.

“피해자 이덕식의 사인은,”

경은이 초라한 중년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누워 있는 이덕식을 먼저 가리켰다.

“두부외상이야.”

경은은 설명을 이어 갔다.

“망치로 수회 가량 머리를 내려친 것으로 보이고 이로 인해 뇌진탕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머리 안에 혈액이 고인 상태로 사망했어. 방어하던 왼손이 골절상을 입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집요하게 머리를 노린 게 아닌가 싶어.”

“칩은? 트라우마 삭제술을 받은 건 확실하지?”

“확실해. 두개골을 여는 수술을 최소 1년 내로 받은 것 같아.”

“1년이라….”

“부검 결과 전전두엽에서 5개의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발견되었어. 하지만 두부 손상이 워낙 심해서 정확히 어느 부위에 삽입되었던 칩인지는 알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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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월요일 낮 12시 30분에 발견됐어. 사망 추정 시각은 일요일 밤 11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 사이.”

무원이 수첩을 꺼내 뭔가를 확인했다.

“두 번째 피해자인 주용훈 역시 월요일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피해자 모두 한밤에 살해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살해 추정 시각이 큰 의미가 있을까?”

희주가 말했다.

“있을 수 있지. 만약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패턴으로 볼 수 있으니까. 한밤에 피해자를 급습해서 살해하고, 날이 밝기 전에 사라지는. 그건 낮 시간 동안 피해자를 지켜봤을 가능성이 크고 피해자의 동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용의자가 나올 수도 있지.”

경은의 의견에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

“하지만 사망 시간은 추정일 뿐이야. 사망 시간은 특정 용의자를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배제 시킬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어. 함부로 단정 지으면 안 돼.”

“그래. 네 말이 맞아.”

“두 번째 피해자는 어때?”

“주용훈의 사인 역시 과다출혈이야. 총 22개의 자상이 왼손, 왼팔, 오른손, 복부 등에서 발견되었어. 손과 팔에 난 상처는 대부분 방어흔으로 보여. 범인이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오른손으로 범인을 저지하고 왼손으로는 칼날을 막은 거지.”

경은은 오른손으로 가상의 범인을 막는 시늉을 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두 피해자 모두 살기 위해 엄청난 의지를 보였을 거야. 이 경우도 앞선 피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즉사를 시키겠다는 의지보다는 본보기나 경고성 폭행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넌 어때?”

경은의 질문에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추가로 분노 또한 느껴져.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죽은 거야.”

“동의해. 피해자들의 상처에서 감정이 느껴져. 단순히 사이코패스가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잔혹하게 찌른 것과는 결이 완전히 달라.”

“만약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또 살인을 저지를까?”

“음….”

“네 직감이 궁금해.”

“내 대답은 예스야.”

경은의 대답에 희주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이미 다음 희생자 물색이 끝났을지도 모르지.”

“최악의 인간쓰레기들. 그 쓰레기들은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뭔지 모를 거야.”

“알려고 하지도 않겠지.”

경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인간은 참 어떤 의미에서 대단해. 서로를 죽이는 일에는 이렇게 정성을 들여 집요하게 잘하면서, 사랑에는 이 정도 열정을 안 쏟는다는 게.”


부검실을 나와 희주와 경은은 복도에 섰다. 무원은 살해 도구인 망치와 칼에서 나온 지문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과학수사계 담당자와 통화를 할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애인 얘기 좀 해 봐. 어떤 남자야? 정희주가 이혼하고 처음으로 연애한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설레서 잠이 안 오더라.”

20대 시절 첫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결혼한 경은은 항상 친구의 연애에 관심이 많았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했다. 난 두 번째가 없잖아. 그게 경은의 단골 멘트였다.

“물을 달라고 하면 온수, 냉수, 탄산수 중에 뭘 주면 되냐고 묻는 남자?”

“세상에.”

경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잡아야겠네. 범인 잡듯이 놓치지 말고 꽉 잡아. 살짝 충격적일 정도로 괜찮은데?”

“괜찮은 거 맞아? 난 좀 어리둥절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넌 그게 문제야. 즐길 줄 몰라. 매사에 너무 진지해. 그리고 그 뒤에 뭐가 더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경은은 종종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 소설을 읽는 대신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감상을 권했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잘 짜인 스토리 라인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불안과 강박 심리를 가라앉히고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털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난 형사잖아. 처음엔 뭘 노리나 싶었다니까.”

“연애할 때는 형사 말고 그냥 여자만 해. 그날 저녁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기껏해야 레드와인이냐 화이트와인이냐 정도만 하란 말이야.”

“솔깃하네. 세상이 한층 더 싫어졌는데. 진짜 그렇게 한 번 살아 볼까.”

희주는 진담을 조금 섞어 대답했다.

“그리고 취미 좀 가져. 돈 잘 버는 의사한테 너의 모든 문제를 맡기고 넌 취미 생활이나 하는 거야. 얼마나 좋아. 남편도 자식도 없으니까 너 자신한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너까지 왜 그래? 다들 세상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어. 그게 문제야. 다들 진지하게 자기 일을 좀 하라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취미 나부랭이 만들 시간에.”

경은의 취미는 로맨스 소설 읽기였다. 경은은 매일, 1년 내내 거의 휴가도 없이 이 서울 변두리 산 아래 위치한 건물 안에서 죽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막장 설정이 난무하는 로맨스 소설 읽기였다. 경은은 망상 필터를 낀 채 희주의 연애를 관찰했다. 거칠고 잔인한 사건 현장에서 동료애를 쌓던 파트너와 한순간 뜨거운 눈빛 교환을 하고 키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럴 때마다 희주는 질색했다. 전남편과 그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희주는 한숨을 쉬었다.

“넌 작년에도 그렇게 말했어.”

경은이 대꾸했다.

“이제는 좀 기대고 싶기도 해. 자존심 상하지만.”

“정말 힘든가 보네.”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기댄 적 없으니까.”

“그래서 정현 씨가 속병 좀 앓았지.”

“그 사람은 날 미워했어.”

“그만큼 널 사랑했단 거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길 안 믿어 주는데, 어떤 남자가 버티니?”

“갑자기 보고 싶네.”

“전남편?”

“응.”

“애인한테나 집중해. 넌 일에는 진심이면서, 사람 만나는 일에는 왜 대충 대충이야?”

“일이 문제네. 이참에 확 은퇴할까? 형사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장담하는데 넌 현장 못 떠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아직도 우리 엄마는 시신을 만지던 손으로 어떻게 딸 먹일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냐고 하지만, 부검실만큼 편한 곳도 없어. 고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잖아. 난 그분들을 살릴 의무도 없고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바랄 일도 없지. 그분들은 내가 할 일을 끝낼 때까지 불평 없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줘.”

“나랑 정반대네. 자려고 누우면 피해자들이 말을 거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변명을 하느라 바쁘지. 약한 소리가 아니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공황도 사실은 내가 바닥을 쳤다는 신호 아닐까?”

“너같이 의심하는 인간들이 결국 이 바닥에 남아. 오히려 뼈 묻겠다던 인간들이 못 버티고 자빠지지. 넌 나보다 훨씬 강해. 공황장애는 지나갈 거야. 그저 길고 긴 이혼소송 같은 거라고 생각해. 언젠가는 끝나는.”

경은은 시원스레 말했다. 경은은 항상 그랬다. 복잡하고 꼬인 문제도 간단하게 진단을 내렸다.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희주는 자신이 이 형사 생활 끝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몇 명의 범인을 잡아넣고, 후배 몇몇을 형사 구실하도록 키울 것이다. 그게 다인가.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통화를 마친 무원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뭔가 큰 굴레 안에 빠져든 느낌이었다. 무원은 건물 안에서 나오는 희주에게 말했다.

“칼에서 지문이 나왔어요.”

“그래? 데이터가 있다는 건 잡을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칼에서 첫 번째 피해자 이덕식의 지문이 나왔어요. 그리고 망치에서도 지문이 나왔는데.”

돌 바위산에서 까마귀가 울고 있다. 나쁜 소식을 알리는 예고편처럼.

“주용훈 지문이 나왔어요.”

첫 번째 희생자를 살해한 도구에서 두 번째 희생자의 지문이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희생자의 지문에서 첫 번째 희생자의 지문이 나왔다.

“동일범이야.”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모두 아는 범인이 먼저 주용훈을 만나 어떤 식으로든 망치에 지문을 묻힌 다음에 그걸로 이덕식을 살해했어. 이덕식을 죽인 다음에는 당연히 칼에 이덕식 지문을 묻혔겠지. 그리고 그걸로 주용훈을 살해했어.”

“그 망치, 가정에서 공구 세트로 쉽게 구입하는 세트의 일부라고 했어요.”

무원은 호텔 메이드의 말과 망치가 사라진 공구 세트를 떠올렸다.

“주용훈의 집에서 미리 가져온 것일지도 몰라요. 만약 이 가설이 맞는다면, 주용훈의 집에 범인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무원은 희주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희주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 그리고 확실해졌어. 이덕식 사망과 주용훈 사망은 한 사건이야. 두 사람이 모두 연관되어 있는 어떤 사건, 사람을 찾아야 해. 거기에 해답이 있을 거야.”

“선배, 진정해요.”

무원은 숨을 가쁘게 쉬는 희주에게 다가갔다.

“다시 처음부터 살펴봐야 해. 살해 동기를 찾아야 해. 내가 뭘 놓친 걸까?”

“아직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어요. 선배,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범인은… 두 사람을 다 알아.”

거기까지 말하고 희주는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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