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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09화

09 마음은 뇌에 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전부 죽었어요.”

by 김은주

“선배, 괜찮아요?”

희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넘어질 때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골반 뼈가 뻐근하다. 등과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 아니 열기인가.

“…너 지금 뭐 해?”

희주는 계단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무원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였다.

“기억 안 나요?”

범인에 대해 미친 듯이 떠들다가 어느 순간 블랙아웃이 찾아왔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팔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막혔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아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댔는데.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머니에 비상약이 있다는 게 생각나서 입에 넣었어요.”

희주는 몸을 일으켰다. 멀리서 보면 열정적인 연인들이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제 됐어.”

무원도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사람이 기절하는 거 처음 봤어요.”

“별로 좋은 그림은 아니었겠지.”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예요? 당장 병원 가요.”

희주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천천히 숨 쉬면 나아져. 약 먹였다며. 10분도 안 걸려.”

“집에 데려다줄게요. 혼자 있는 게 불안하면 제가 같이,”

“오버 하지 마. 괜찮으니까 넌 들어가서 일해. 뭐든 찾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희주는 휴대폰을 꺼내 주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원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지금 집으로 가도 돼요?”

희주는 주웅에게 물었다. 오늘 진료가 없는 날이다. 희주는 눈을 감았다. 무원이 여전히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잊은 채, 자신에게 와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든 하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말하라는 주웅의 말에서 묘한 관능적인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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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시야?”

희주가 괴로워하며 물었다.

“6시야. 30분만 더 이렇게 있자.”

주웅이 웅얼거렸다.

희주는 주웅의 어깨뼈 사이 포근한 공간에 얼굴을 묻고서 지난밤에 꾼 꿈을 떠올렸다.

“내가 처넣은 그 새끼가 가석방돼서 총을 내 입에 바싹 들이댔어. 총부리가 내 이에 부딪혔는데 실수로 젓가락을 깨물었을 때처럼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어. 그 맛이 지금도 느껴져. 다리 근육도 아프고 등도 아프고. 어제 넘어져서 그런가.”

어젯밤,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둘 사이에 있던 몇 겹의 물리적인 장애물은 물론 망설임 같은 것도 모두 벗어던졌다.

“요즘 너무 몸을 혹사 시키고 있어. 팀장한테 전화할까? 내 애인을 못살게 굴지 말라고?”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건 그 인간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사건이야.”

주웅은 희주의 오른쪽 눈썹 위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한 마리의 상처받은 짐승 같은 여자. 그 상처 때문에 겁을 먹는 대신 분노로 활활 타버리기 직전인 위험한 여자. 이런 여자한테 끌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제와 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어. 위험한 순간에 당신이 발작을 할까 봐 난 진료 중에도 불안해. 환자들한테 미안할 지경이야.”

“난 올림픽에 단독으로 출전하는 선수들이 좋아. 수영이나 마라톤 같은 종목에 혼자 나가는 선수들. 그들이 매일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속옷에 지릴 때까지 연습했다는 이야기만큼 날 감동 시키는 건 없어. 비인간적인 훈련량을 소화하고 순전히 이기기 위한 게임에 내던져진 그 사람들을 상상하면 전율이 일어.”

주웅은 몸을 일으켰다. 잠은 완전히 깼다.

“하지만 자기는 단독 출전한 선수가 아니야. 옆에는 파트너가 있고 위로는 상사가 있고 퇴근하면 내가 있어. 그걸 잊지 마.”

희주는 주웅이 침실을 나간 다음에도 혼자 침대에 누워 방금 전에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반박하기 힘들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빴다. 뭐라고 다시 반격을 해 볼까. 희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침실을 나섰지만 금세 전투력을 상실했다. 식탁 의자에 청바지와 티셔츠가 깨끗하게 세탁된 채 건조까지 완벽하게 된 상태로 걸려 있었다.

“바로 출근할 것 같아서. 커피는 여기 있고, 렌지에 야채죽 넣어 놨으니까 데워 먹고 출근해.”

주웅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흰색과 연한 하늘색이 교차하는 산뜻한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소매를 자연스럽게 말아 올렸다.

“어제 우리 둘 다 엄청 마신 것 같은데. 난 그냥 대충 씻고 해장국이나 한 그릇 먹은 다음 출근할 줄 알았지, 이렇게 완벽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주웅은 웃으면서 현관 앞에 고정적으로 두는 출근 가방을 들었다.

“그 말, 칭찬이지?”

“물론.”


무원은 거대한 계단 앞에 섰다. 마치 거인국에 불시착한 소인이 된 기분이다.

뇌 공학 연구센터 ‘빅’은 3층짜리 건물만 한 계단 위에다가 투명한 얼음처럼 네모반듯한 정육면체 유리 건물을 씌운 형상이었다. 만약 4층과 5층이 없었다면 거대한 계단은 하늘과 연결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흡사 한번에 한 개의 층을 내려갈 수 있는 거인을 위해 설계된 것 같은 계단은, 유리창을 뚫고 무원이 서 있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까지 이어져 있다.

건물 앞면은 전면이 유리로 마감된 덕분에 건물 안의 계단 구조물이 기괴한 설치미술 작품처럼 온전히 드러났다. 하지만 건물 뒷면은 전부 막혀 있었다. 외부로 향하는 작은 창이 나 있지만,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앞면은 모든 걸 보여 주고 뒷면은 완벽히 막은 극단적인 구조. 이 기묘한 계단이 ‘빅’의 상징이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하네. 굳이 이렇게 건물을 지은 사람의 뇌 구조가 궁금하네.”

무원은 희주를 보고 다시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이 레고로 만든 집에서 영감을 얻었대요. 아이들은 세 개의 블록만 있으면 계단을 만들어서 원하는 곳 어디에나 붙이잖아요. 마치 계단만 있으면 어디든 올라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무원의 말에 희주는 거인의 계단을 다시금 응시했다.

“아이에게 계단은 아직 어른처럼 이동할 수 없는 자신들을 위한 보조 도구 같은 거죠. 자전거에 달린 보조 바퀴처럼. 그래서 집을 짓고 자동차를 만든 다음 계단을 만들어 붙이는 것으로 아직 미숙한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본능적으로 도우려 해요.”

“그럴듯하네.”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표방하는 것도 그런 의미겠죠. 혼자는 어딘가에 올라설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보조 도구랄까요.”

“그런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난 절대 수술 같은 거 안 해.”

“선배 애인은 선배랑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무원은 대답 대신 희주를 바라보았다.

“어제랑 같은 옷이네요. 근데 어제는 안 나던 좋은 냄새가 나네요.”

희주는 재빨리 티셔츠 냄새를 맡았다.

“너도 암튼 정상은 아니야.”

“혹시 변태라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거절할게요. 전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인 남성이니까.”

고양이 한 마리가 희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삼색 고양이가 회색 계단에 앉아서 희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라보는 눈이 어딘가 좀 이상하다. 그리고 뭐가 이상한지 알아챘다. 고양이의 한쪽 눈이 없다. 고양이는 외눈으로 낯선 방문객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정말로 고양이를 키워 볼까.”

“네?”

“농담이야.”


희주는 안내 데스크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하지혁은 신분증을 확인하고 다시 희주에게 내밀었다.

“저희 연구소에는 따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이 없어요.”

“그럼 그쪽도.”

“네. 저도 남의 머리통을 열고 기억을 지우는 사람 중 하나죠.”

“아.”

“밖에서 계단 보셨죠?”

하지혁은 인사와 본인 소개를 건너뛰고 바로 계단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초에 그는 안에서 희주와 무원이 계단 앞에 서 있는 것부터 전부 관찰한 것 같았다.

“밖에서 보이는 계단은 일종의 장식장이에요. 실제로는 올라갈 수 없거든요. 실제 계단은 밖에서 보이는 계단의 뒤편에 존재합니다. 이따 2층으로 올라가실 때 확인해 보세요.”

“아, 그렇군요.”

하지혁은 낡은 청바지에 물 빠진 티셔츠 차림이었다. 유행 때문에 일부러 찢거나 찢어진 걸 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낡아서 찢어진 청바지 같았다. 검정색 티셔츠 앞면에는 Q.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라고 적혀 있고 이름 아래에 ‘chief researcher’ 라고 직함이 적힌 명찰을 달고 있었다. 점심에 햄버거를 먹었는지 티셔츠 안에 옷걸이가 들었나 싶게 헐렁한 가슴팍에 양상추 조각이 붙어 있었다. 희주는 하지혁이 입고 있는 청바지가 아마도 학생 때부터 주구장창 입던 거라는데 이따 무원한테 내기라도 걸어 볼까 생각했다.

“뒷면에는 뭐라고 적혔는지 궁금하시죠?”

하지혁이 붙임성 있게 말했다. 침묵을 싫어하는 타입인 건지 아니면 그냥 말이 많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답이 궁금했다. 하지혁이 뒤로 돌았다. 티셔츠 뒷면에는 앞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었다. A.뇌 안에!

“그럼 그쪽도 의사인가요?”

“전 신경공학 박사고 빅의 수석연구원입니다. 빅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죠. 뭐든지 물어보세요. 손님 접대는 제 담당이거든요.”

“신경공학이라는 게 대체 뭐에요? 신경은 의사들 소관이고 공학은 공학자들 소관 같은데 그게 왜 같이 붙어 있는 거죠?”

하지혁은 희주의 다소 무례한 질문에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생체 신경 신호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추출해서 뇌 기능을 향상 시키는 학문이거든요. 뇌 질환 치유가 주요 목적이지만 인간의 뇌를 기본 세팅된 것보다 더 낫게 만드는 거죠. 기억력을 좋게 만든다든지, 생각만으로 로봇 팔을 움직인다든지, 수학 문제를 더 잘 풀게 만든다든지.”

“기억을 지운다든지?”

“빙고!”

하지혁은 싱긋 웃고는 대답을 이어갔다.

“전 15살 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가출을 한 다음에 혼자 월세방을 얻어 살다가 한달 만에 집으로 돌아갔어요. 사춘기 소년의 뇌는 비정상이라는 정신과 의사의 말을 듣고 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전까지는 전 제 머리통 안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요. 나라는 인간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뇌에 대해 공부하다가 여기까지 온 셈입니다.”

희주는 하지혁이 마음에 들었다. 노인이 되어서도 소년 같을 남자였다. 하지혁은 안내 데스크 아래 모니터를 보고 희주와 무원에게 말했다.

“2층으로 올라가세요. 이제 진짜 계단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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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계단은 밖에서 보이는 회색 계단 속에 숨겨져 있었다. 계단을 따라 자연스럽게 올라가면서 왼편 통로를 따라가면 아까 밖에서 본 전면 유리 쪽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밖에서 보이는 부분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밝고 오픈된 공간 뒤에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분이 약간 이상해.”

무원은 고개를 약간 숙여 희주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왜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어. 마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희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밖에서 보이는 계단이 타인 앞에서의 나라면, 지금 여기 이 숨겨진 계단은 내면으로 향하는 통로 같아요.”


여자는 계단을 올라오는 희주와 무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세하입니다.”

170센티미터인 희주의 눈높이에서 10센티미터 정도 아래에 있는 여자는 크림색 반소매 원피스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형사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치 화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정교하게 메이크업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영선수처럼 짧은 쇼트헤어에 작은 귀 때문에 서른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리게 느껴졌다. 마치 수풀 속에 숨은 작은 새처럼 보였다. 실제로 상담실 안에는 수풀만큼이나 우거진 커다란 화분들이 늘어서 있었다. 수사 협조를 요청하러 온 게 아니라면 마냥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저희가 여기 온 이유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멀리 돌아갈 필요가 없겠네요.”

“경위님에게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으신가요?”

희주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네?”

“생각만 해도 미쳐 버릴 것 같은, 문득 아무 때고 떠올라 날 집어삼키는 그런 기억 같은 것 말입니다.”

땀방울이 굴러 희주의 오른쪽 눈썹 위 흉터에 맺혔다. 발작 전 식은땀일까.

“제가 필요한 건 피해자의 기억이지, 저에 대한 상담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아무것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만 돌아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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