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참았어요. 오늘 꼭 끝내고 싶어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마흔 살의 C는 7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퇴근 후 어린이집에 들려 다섯 살배기 딸을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차에서 계속 경보음이 삑삑 울렸다. 딸이 앉은 보조석 안전벨트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리는 알람이었다. 그날따라 딸이 뒷좌석 카시트에 앉지 않겠다며 심하게 떼를 써서 할 수 없이 보조석에 앉혔다.
C는 딸의 안전벨트를 다시 채우기 위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고, 오른쪽에서 돌진해 오던 화물차와 충돌했다. 그 사고로 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C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도중 배 속에 있던 8개월 된 둘째 아이도 잃었다.
이후 C는 변했다. 늘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던 그녀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말을 잃고 어두워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더는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죽은 딸아이와 배 속의 아이 생각이 났다. 학교 행정직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날의 기억을 촉발하는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매일 다퉜다. ‘당신’이 그날 회식이 있다며 평소처럼 어린이집으로 딸을 데리러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내가 만삭임에도 일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딸아이가 원할 때마다 보조석에 앉혔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스스로 뱉어 놓고도 놀랄 만한 말을 남편에게 퍼부었다.
그러다가 ‘빅’을 찾아냈다. 자신처럼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주고받던 중 원하는 기억을 삭제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녀는 그날의 기억을 삭제하기로 결심했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대로 돌아가셔도 돼요. 그리고 언제든지 다시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C는 과거에 겪은 일을 기억할 때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하는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촬영하기 위해 희고 커다란 관 같은 형태의 뇌 스캐너 속에 누웠다. 세하의 말에 그녀는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남편도 저도 너무…… 오래 참았어요. 오늘 꼭 끝내고 싶어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과정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 저장된 곳을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세하는 A4 1장 분량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저와 상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대본입니다. 대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날 일을 자세히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C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대본’은 7년 전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C가 그날의 특정한 장면과 소리, 느낌을 떠올리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느낌’이다. 시간 순서대로 정확히 타임라인을 만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트라우마는 영화는 한 장면처럼 기억되고, 기억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한 번만 읽어 보세요. 검사가 시작되면 스캐너 안에서 이 대본의 오디오 파일이 재생될 겁니다. 지금은 그저 이 종이 한 장에 적힌 일이 남의 일이다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C는 떨림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스캐너 바깥에서 모니터로 뇌 스캔 반응을 지켜보았다. 오디오 파일이 재생되었다. 전문 성우에게 의뢰해서 뉴스 기사를 읽듯 건조하게 녹음된 그날의 기억이었다. 재생이 시작되자마자, C의 심장박동이 높아지고 혈압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대본을 듣는 것만으로 7년 전 사고 당일 느꼈던 공포심과 극도의 불안한 감정이 되살아 난 것이었다.
…큰딸이 떼를 쓸수록 배 속의 둘째 아이의 태동이 심해집니다. 당신은 배 속의 아이와 땅바닥에 드러누운 딸을 동시에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당신은 딸의 바람대로 보조석에 앉도록 허락합니다.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까 짜증을 심하게 낸 탓에 아랫배가 당기지만 10분이면 집에 도착하기 때문에 애써 그 기분을 잊으려 합니다. 딸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고 오늘 어린이집에서 그린 그림을 당신에게 보여 주려 합니다. 그런데 안전벨트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알림이 울립니다. 당신은 보조석에 앉은 딸의 안전벨트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아챕니다. 당신은 가까스로 팔을 뻗으며 고개를 딸 쪽으로 잠시 돌립니다. 그리고 몇 초 후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차가 당신의 차를 들이받습니다…
모니터 속 C의 뇌 우반구에서 반딧불이 같은 빛이 활성화되었다. 우반구는 직관, 감정, 시각, 공간, 촉각을 관장하며, 그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합쳐진 ‘기억’이 저장된 곳이다. 세하는 환자들의 뇌 활동을 일종의 지도로 만들어 트라우마가 저장된 위치를 파악했다. 바로 그 자리에 지름 17.2밀리미터 두께 1.95밀리미터 칩을 ‘임플란트’했다.
이번에는 뇌 우측 중심부에서 조금 아랫부분, 정서적 뇌인 변연계가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다. 강렬한 감정이 변연계를 활성화 시키고, 특히 그 속의 편도체를 활성화 시킨 것이다. 편도체는 인간 뇌에 있는 위험 감지 경보기다. C는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보기를 울린 것이다.
C는 지금 뇌 스캐너 안에 누워 있지만, 그녀의 바이탈은 마치 싸우고 도망치기 직전의 사람과 같은 심장 박동수와 혈압, 산소 흡입량을 보였다. 7년이라는 세월이 무상하게도 말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피 흘리게 하는 칼이다. 세하는 자신의 일이 깊숙이 박힌 칼을 빼내어 치유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C는 기억을 삭제한 이후에도 매주 빅을 방문했다. 어느 날, C는 세하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내일 예정된 상담을 취소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왜냐는 세하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했다.
“모처럼 여동생이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해서요.”
“그러셨군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네. 예쁜 조카들을 본 지도 너무 오래된 것 같고. 저도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아서 가겠다고 했어요. 상담을 미뤄도 될까요?”
세하는 당연히 괜찮다고 답변했다.
그 주가 지나고 다음 주에도 C는 더 이상 상담 예약을 위해 전화하지 않았다. C는 이제 과거를 벗어났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위해 살게 되었다. 이것이 세하가 타인의 두개골을 여는 이유였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게 만들기 위해서. 현재를 살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삼성동의 복합쇼핑몰 1층 세미나 홀은 매트릭스의 네오, 트리니티, 모피어스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검은색 코스튬을 입은 인터넷 방송 BJ들과 제법 정교한 아이언 맨 슈트를 입은 채 자신을 찍어 대는 카메라에 포즈를 취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와우, 내가 지금 뇌 공학 강의를 들으러 온 건지 코스퓸 플레이 콘테스트에 온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뇌 과학 심포지엄이라고 해서 뭔가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닌데요?”
아이언 맨 슈트를 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인간의 뇌와 육체가 업그레이드될 날이 머지않았다며 떠들어 댔다.
“저건 또 뭔 소리야?”
“아이언 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슈트를 입고 자비스한테 조언을 받잖아요.”
“그건 영화고.”
“매트릭스에도 그런 비슷한 장면 있었던 것 같은데. 트리니티가 헬리콥터 조종 기술을 바로 뇌로 다운받아서 헬리콥터 조작하던 장면 기억 안 나요? 여기 오기 전에 찾아봤는데, 보스턴대 과학자들이랑 교토대 뇌 공학 연구소에 의하면 미래에는 새로운 지식을 그냥 뇌에 업로드할 수 있데요. 책상 앞에 앉아 달달 외울 필요가 없는 거죠.”
희주는 무원의 말에 얼굴을 찡그렸다.
“뇌에 정보를 업로드가 가능하다는 건, 뇌에 있는 정보는 반대로 빼낼 수도 있다는 거 아냐?”
“추출 같은 거요?”
“그래. 업로드가 되면 다운로드도 당연히 되겠지. 미친 의사들, 미친 과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비밀 같은 게 인터넷에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닐 테고.”
“말 되네요. 근데.”
“근데 뭐.”
“히지혁 수석이 말한 아이돌은 어디 있다는 거지?”
무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주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왜? 걸 그룹이라도 나올까 봐?”
“혹시 모르잖아요.”
“제대로 조사 안 했군.”
“뭘요?”
“강희건이 오늘 공개한다는 아이돌 말이야.”
“설마 아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5인조 보이 그룹이야.”
무원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기대했어? 몰랐네. 걸 그룹에 진심인 줄은.”
엄청난 인파가 세미나 홀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희주와 무원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꽉 찬 홀 안으로 기자들과 인터넷 개인 방송을 켜고 라이브 중인 BJ들이 계속 밀려 들어왔다. 출입구에서 가까운 벽에 기대서 상황을 지켜보던 희주는 가슴이 답답해 심호흡을 했다. 부족해진 산소, 순환이 신통치 않은 실내 공기, 들뜬 사람들이 내뿜은 뜨거운 열기. 이 모든 게 희주를 압박했다.
“무서울 지경이네. 이게 이렇게 유명한 행사였어?”
“예상을 뛰어넘네요. 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연예인, 유명인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근데 이 사람들이 전부 불로장생에 꽂힌 건가? 아니면 기억을 지우고 자기 뇌를 아이언 맨처럼 만들고 싶은 건가? 개중에는 우리 같은 의심병 환자들도 있겠지?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네.”
홀의 조명이 깜빡이더니 어두워졌다. 행사장 직원이 무대 위 강연대로 가서 마이크를 조정했다. 그리고 강희건이 등장했다.
희주는 강희건을 보자마자 해적을 떠올렸다. 떡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격, 길고 탄탄한 하체는 청바지 속에 감춘 대신 깔끔한 피케 셔츠의 단추 3개는 잠그지 않았다. 그가 나오자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터졌다. 왠지 모르게 냉혈한 짐승 같은 면이 느껴졌다. 푸르고 탁하고 차가운 눈빛, 염색하지 않은 천연의 검은 머리, 얼굴 중앙의 넓적한 코, 5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정열과 힘이 느껴졌다. 그를 향한 여자들의 새된 환호성이 귀를 찔렀다.
“반응이 어마어마한데요?”
“매력이 철철 넘치네. 안 해 본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을걸? 모르긴 몰라도 모든 면에서 능숙할 거야. 뭐든 잘하겠지.”
무원은 말없이 희주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
“왜? 아까 걸 그룹에 대한 복수 멘트라도 날리게?”
“아뇨.”
“그럼 왜?”
“저도 잘해요.”
“……뭘?”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