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술, 우리의 기계는 이미 우리 인류의 일부분입니다.”
강희건은 거의 태풍급으로 강력했다. 청중들은 그에게 푹 빠진 눈으로 그가 말하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VIP석에 앉은 셀러브리티들과 유명 BJ들이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손을 흔들고 환호를 보냈다.
한 중년 남성이 무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홀 양쪽에 서 있던 건장한 진행 요원 두 명이 남자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출구 쪽으로 끌고 나갔다. 출구 앞에 서 있던 희주와 무원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불필요한 소란에 말려들 필요는 없었다.
강희건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진행 요원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 달라는 듯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때맞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가 말했다.
“신사분, 절 화나게 하지 마세요. 제가 화나면 당신은 절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영화 헐크의 주인공 브루스 배너의 대사로 지금 이 소란을 정리하죠.”
아까보다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희건이 미소를 지으며 발아래의 사람들을 매력적인 눈빛으로 굽어보았다.
“전부 연출 아냐? 일부러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들어서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연출이든 우연이든 효과는 확실하네요.”
희주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부터 진동이 울리고 있는 걸 애써 무시하는 중이다. 주웅이 보내는 메신저 알람이 계속 울렸다.
며칠째 주웅과의 약속을 깨고 그와 만나는 걸 차일피일 미뤘다. 참을성이 강한 주웅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주웅은 남자에 대한 취향을 떠나 한심한 남자들에게 질린 대다수의 여자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그걸 알면서도 희주는 자주 그의 연락을 무시했다. 희주는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 대신 오늘은 꼭 먼저 전화를 해서 최대한 다정하게 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의 인내심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그러란 법도 없다. 철없는 시절에야 여왕 대접이 당연한 줄로 알았지만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관심과 배려, 집중 모두 상대방의 성의와 희생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부담감이 먼지처럼 차곡차곡 내려앉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완벽하게 마음을 열 수 없는 걸까.
“스타리온의 새로운 아이돌, 뉴키즈원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순서가 찾아왔다. 이 행사에 참석한 이들 중 대다수는 새로운 아이돌을 처음으로 보는 영광을 누릴 생각으로 여길 왔을 것이다. 방금 전의 중년 남자가 일으킨 예상치 못한 소란 덕에 청중들은 더욱 흥분했다.
“뉴키즈원은 새롭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새로울까요? 세상에 아이돌은 넘치도록 많은데.”
강희건은 청중들을 집중 시켰다.
“뉴키즈원은 바로 인공지능 아이돌입니다.”
일순 스크린에 완벽한 외모의 아이돌이 떴다. 5명의 소년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그들은 그야말로 신화 속 남신들 마냥 완벽해 보였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AI였다.
“저게 뭔지 알겠어요. 뭘 하려는 건지.”
“그게 뭔데?”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에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모델을 광고에 내보냈어요. 이름이 뭐더라.”
“좀 이해가 안 되네. 가짜 모델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게.”
“가상이긴 한데 무서울 정도로 리얼하고 매력적이에요. 그리고 새로워요. 생각해 봐요, 연예기획사에서도 매번 신인을 발굴하려고 하잖아요. 대중들은 변덕이 심하니까 계속 뉴 페이스를 찾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가상 아이돌이 등장한 것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 세계의 소녀 팬들이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에 열광하고 우리 오빠라며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야?”
“사실 팬들도 아이돌을 실제로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잖아요. 대다수는 휴대폰, 모니터 속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크게 문제없지 않을까요?”
희주는 다시 스크린 속 뉴키즈원을 보았다. 잘생겼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제각각 매력이 달랐다. 유독 호감이 가는 얼굴의 멤버도 있었다.
“뉴키즈원은 국내 최고 빅 데이터 분석가들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아이돌의 정보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재조합한 결과물입니다. 최적의 멤버 수, 성격, 외모, 안무와 음악 스타일, 팀 내 역할, 매력 포인트, 개인기까지! 뭐가 더 필요할까요?”
강희건은 충격적인 발표가 청중들에게 스며들 시간을 잠시 기다렸다.
“제 말이 농담처럼 들리시나요? 가상의 아이돌을 사랑한다는 게 억지 같으신가요? 하지만 팬 사인회, 콘서트, 굿즈 수집, 라이브 방송, 대화, 채팅, 뉴키즈원은 여러분의 휴대폰 안에서 모든 걸 할 겁니다. 골치 아픈 사생활 문제, 팬들을 농락하는 비밀 연애, 난잡한 클럽 방문 같은 건 절대 안 합니다. 물론 마약이나 약물 문제도 깨끗하죠.”
장난스러운 그의 멘트에 청중들의 환호를 보냈다.
“전 장담할 수 있습니다. 100년쯤 뒤에는 진짜 아이돌 대신 이른바 뉴키즈들이 연예계를 장악할 겁니다. 그들이 영화, 드라마를 찍고 예능에 나와 몸 개그도 할 겁니다. 우리의 기술, 우리의 기계는 이미 우리 인류의 일부분입니다.”
“여윳돈이 있었으면 스타리온 주식을 샀을 거예요. 이미 늦었나.”
무원이 말했다.
“한 천 만원쯤 빌려줘?”
“농담이에요.”
“표정은 진심인데?”
“여러분!”
강희건의 연설이 이어졌다.
“제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시나요? 하지만 구글은 이미 10년 전 가상현실 전문 기업에 5억 달러, 우리 돈 5천 6백억 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했습니다. 조만간 구글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가상세계 속 활동이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실제 감각기관으로부터 전달돼 오는 정보를 차단 시키고, 가상현실 속 정보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거죠. 그러면 더 이상 가상현실이 가상이 아닌 게 되는 겁니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여러분은 가상현실 속에서 신체를 갖게 될 것이고, 실제 몸처럼 움직일 수도 있게 됩니다. 뉴키즈원 팬 미팅에 참석해서 좋아하는 멤버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포옹을 할 수도 있죠. 자, 이제 제 이야기가 좀 진지하게 들리시나요?”
연설의 리듬이 점차 빨라졌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오늘 보도 자료 나온 거 보셨어요?”
“스타리온이 빅에 액수를 밝힐 수 없는 돈을 투자했다는 오피셜 기사? 계약서 사인은 진작 했겠지만 행사에 맞춰서 빵 터뜨렸던데.”
“오늘 기자들이 엄청 몰린 것도 결국 그것 때문이겠죠.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갑자기 요즘 의학계에서 가장 이슈인 뇌 공학 연구소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거.”
“누구 머리에서 나온 플랜인진 모르겠지만 제대로 먹혔네.”
“이미 미국에는 뇌 저장 서비스가 출시됐다는데요? 전 세계 부자들 중 40여명이 비밀리에 그 서비스를 예약했다는데.”
“그걸 믿어? 마케팅일 수도 있잖아. 투자받으려고.”
“그럴 수도 있죠. 근데 뇌 공학자들 얘기는 흥미로워요. 박세하 박사가 개발한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인류를 구원할 10대 도구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예측했어요.”
“구원? 그거 광신도들이나 할 법한 얘기 아냐?”
“브레인 임플란트 칩으로 나쁜 기억을 삭제해서 인간이 우울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만드는 거죠. 사이코패스나 조현병 환자들 컨트롤도 쉬워지겠죠. 공포심도 두려움도 없는 최강의 형사나 군인이 나올 수도 있고요.”
“그걸 전부 믿어?”
“그건 아니지만, 의사들이 말하잖아요.”
“이거 봐.”
무원은 희주가 내민 심포지엄 리플렛을 받아 들었다. 강희건 대표의 강연 타이틀은 ‘호모 데우스: 불멸의 신(神)이 된 인간’이었다.
“네가 읽은 기사, 오늘 강연, 빅의 브레인 임플란트 칩, 의사들의 앞다투어 내놓는 전망.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아? 여론을 만들고 대중을 선동하고.”
“선배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이미 세상에 나온 기술마저 부인하는 건 억지에요.”
강희건은 악마도 울고 갈만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이 강연을 계기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추종자가 될 것인지 궁금했다.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행복을 상상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뭘 더 해낼지 다 같이 지켜보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강연이 끝났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강희건은 그대로 서서 비를 맞듯 박수갈채를 흠뻑 맞았다. 잠시 후, 고개를 살짝 까딱하고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안 믿어져. 다른 종 같아.”
희주가 물었다.
“너 같으면 뇌와 몸 중에 뭘 고를 거야? 예를 들면 너의 뇌를 넣은 불로불사 로봇 몸과 모든 게 리셋된 뇌가 달린 지금의 몸 중에서.”
“선배는 대화가 잘 통하고 친절한 정신과 전문의 애인의 차가운 스테인리스 팔에 안기고 싶으세요?”
“그렇다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정체불명의 뇌를 달고 있는 몸뚱이를 부여잡고 살 수도 없잖아?”
“몸과 마음을 각각 개별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어요. 둘 다 같이 있어야 하나의 인간, 그 사람 아닐까요? 성격 나쁜 정희주의 정신과 주먹 힘 좋은 정희주의 몸이 합쳐져야 비로소 형사 정희주가 완성되는 거죠.”
희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동의해. 난 적어도 몸뚱이가 없는 아이돌을 사랑하진 못할 것 같아. 그래픽 모델이 추천하는 가구에도 흥미를 갖지 못할 것 같고. 어딘지 공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음모론이라고 욕해도 상관없지만, 돈 많은 인간들이 시스템을 바꿀 힘도 없고 가난한 우리 같은 인간들이 시스템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아. 생각해 봐. 200살까지 살 수 있는 실리콘 몸뚱이가 나온다고 쳐. 그걸 우리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우린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싸게 팔 거야. 돈이 썩어 나가는 부자들이나 사겠지. 너나 나나 우린 100살도 못 살고 요양병원에서 외롭게 죽을 운명이야. 차라리 주식이나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적어도 요양병원 들어갈 돈은 있어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