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있는 여자한테 밥 먹자고 할 타입으로 보이진 않는데.”
책상 위에 메모도 사건 파일도 없다. 누가 보면 희주가 자고 있거나 멍을 때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희주는 의자에 앉아 너저분한 책상에 발을 올렸다. 하루 종일 탐문을 다니고 돌아와서 한동안 그렇게 있는 것이 습관이었다.
“팀장한테 말할 거예요?”
무원이 30분째 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는 희주에게 말했다.
“뭘?”
“보성당 사장님한테 들은 거요.”
“아니. 팀장이 몰랐으면 좋겠어.”
“왜요?”
희주는 눈을 뜨고 자신의 책상에 기대 서 있는 무원을 올려다보았다.
“촉이 그래. 팀장이 몰라야 할 것 같아. 그 인간이 뭘 알든, 피해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든 우리가 자기에 대해 모른다고 믿게 하고 싶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날 싫어하니까 나한텐 안 물어봐도, 너한텐 뭐하고 돌아다니는지 물어볼 거야.”
“생각하고 있을게요.”
무원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팀장은 분명 강 대표하고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일 거야. 강 대표하고 조정배는 절친이었겠지. 비슷한 부류니까.”
“보성당 사장님 말을 다 믿어요?”
“난 그 영감님보다 전남편을 믿어. 그 사람이 소개한 사람이니까 믿는 거야.”
“그럼 그 말도 맞아요?”
“뭐?”
“선배더러 휘어잡기 힘든 쪽이니 뭐니 한 거요.”
희주는 뚱한 얼굴로 무원을 응시했다.
“일 얘기 하다 말고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퇴근 시간 한참 넘었으니까 상관없잖아요. 오늘은 애인이랑 데이트 안 해요? 데이트 없으면 저랑 밥이나 먹어요.”
“의외네.”
“뭐가요?”
“애인 있는 여자한테 밥 먹자고 할 타입으로 보이진 않는데.”
“파트너랑 밥 한 끼도 못 해요? 그럼 거절하세요. 그런 타입 별로면.”
다음 날 희주는 대전으로 향했다. 경찰스트레스장애학회 사무실은 대전의 모 대학 부속 건물 안에 있었다. 최준석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다가 희주를 발견했다.
“저도 정년퇴직하면 회장님처럼 살고 싶네요. 될까요?”
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희주를 무시하고 학과 사무실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존경받는 교수님, 어린이들한테는 친절한 보안관, 학회에서는 경찰공무원과 피해자 인권 신장에 앞장서는 분.”
최준석은 갑자기 멈춰 서 노기 띤 눈으로 희주를 노려보았다.
“회장님 정년 퇴임하던 날 기억이 나네요. 자제분들이 감사패 만들어서 찾아오셨죠. 회장님은 그걸 받고 우셨고요. 내가 헛살지 않았다는, 한평생 괜찮은 경찰이었다고 확인받은 기분이 드셨겠어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근데 존경받는 회장님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까요? 조사해 보니, 존경받는 판사님, 검사님도 꽤나 악명이 높았던데. 회장님은 요새 편히 주무시나요?”
신경질적인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드리워졌다. 희주는 학교에서 최준석을 처음 만났던 때보다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용건만 말하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피해자들의 문제는 뭐였습니까? 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죠?”
최준석은 대답하지 않은 채 건물을 빠져나갔다. 희주는 뒤를 쫓으며 계속 말했다. 최준석이 대답을 회피한다는 것이 어떤 신호로 느껴졌다.
“주용훈 변호사는 살해당하기 전에 기습을 당했습니다. 벽돌로 뒤통수를 맞았어요. 범인은 못 잡았고요.”
최준석이 우뚝 멈춰 섰다.
“회장님이 강력팀 팀장이던 시절 만약 부하들이 일탈을 했다면 회장님은 모르셨을까요, 아님 알고도 덮으셨을까요? 예를 들어 형사가 돈 많고 유명한 연예기획사 사장의 사주를 받아서 뒷조사 같은 걸 했다면요.”
“나한테 이러는 거 아주 실례야. 자네 이러는 거 오 팀장도 알고 있나?”
“곧 아시겠죠. 제가 사라지고 나면 전화하실 테니까요.”
최준석의 반응은 예상보다 약했다. 그는 맥없이 희주의 공격을 받아 냈다. 희주는 그가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의 자신감 없는 태도, 분노가 아닌 당혹감이 지배하는 그의 태도에서 그가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감청색 차고 문이 열렸다. 최준석은 차고 안으로 올 초 새로 뽑은 검정색 볼보 XC90을 천천히 주차했다. 한국에서 살 수 있는 차 중에 가장 안전한 차라는 젊은 딜러의 말에 두말없이 구입을 결정했다. 안전함. 차를 운전할 때마다, 평생을 위험 속에서 일하다가 이제야 안전한 노년을 보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텅 빈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내는 얼마 전 출산한 딸 때문에 집을 비웠다. 오전 시간에 가사도우미가 들려 청소와 빨래,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해 놓기 때문에 집은 늘 깔끔했다. 각종 감사패와 경찰 정복을 입고 은퇴 전에 찍은 사진, 딸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박사를 따서 한국에 돌아와 찍은 가족사진이 즐비한 장식장 안과 밖에도 먼지 하나 없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갔다. 가사도우미에게 서재는 청소하지 말라고 일러둔 탓에 서재 문을 열 때마다 약간의 퀴퀴한 체취와 먼지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서재 안에 값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금고를 들였다. 청와대에 들어가는 금고를 만들었다는 유명 금고업자에게 의뢰를 해서 6개월을 기다린 끝에 금고를 받았다. 장식용으로 꽂아 놓은 책을 몇 권 뽑자 책장 안쪽에 넣어둔 가로세로 높이 45cm 크기의 금고가 나왔다.
매일 똑같은 밤이다. 인기척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와 시간을 보내다 혼자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오늘은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자주색 벨벳으로 감싸 놓은 권총을 꺼냈다. 권총은 퇴직 전 구했다. 현역 시절에도 진짜 총을 쏴 본 적은 없었다. 아내는 농담처럼 금고 안에 이혼 서류를 넣어 두었냐고 물었다.
총을 들고 침실로 갔다. 그리고 침대 옆 베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현관문에서부터 서재, 거실, 주방, 부부침실, 딸이 쓰던 2층 방,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창고로 쓰는 방 등 집안 구조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시야 안에 집의 모든 공간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싫었다. 침실에 있으면 2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방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그의 마음 어딘가를 계속 불편하게 했다. 이 집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이 집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게 별로였다. 하지만 아내가 이 동네의 이 집을 고집했다.
그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완벽히 차단하는 고급스럽고 무게감 있는 두툼한 에메랄드 색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행인도 오가는 차도 없는 부촌의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밝은 가로등은 주민들의 요구였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자정을 넘긴 창밖이 이토록 환하고 머리맡에는 권총이 있다는 것이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는 커튼을 닫았다.
전곡항은 썰물 때도 물이 빠지지 않아 요트 천국으로 불렸다. 무원은 엄익수가 알려 준 요트 사진을 들고 조정배의 요트를 찾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드론이 주말 동안 항구를 찾은 사람들과 요트 위를 날았다.
“선배, 봤어요?”
“뭘?”
“방금 우리가 지나친 요트요.”
“그게 왜?”
“얼마 전에 유명한 재벌 2세 요트라고 TV에 나왔는데. 5억이라던가? 아무튼 국내에서 제일 비싸다던데.”
“그거 사 놓고 타러 오기는 하려나.”
“일단 샀다는 게 중요하죠.”
무원은 금세 조정배 요트를 찾아냈다. 요트는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좋았다.
엄익수의 평에 따르면, 조정배는 은퇴 경찰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동료들보다 조금 일찍 옷을 벗은 다음 논현동 한복판, 연예기획사와 성형외과, 명품 편집매장과 웨딩드레스 매장이 공존하는 알토란같은 곳에 보안 전문회사를 차렸다. 그가 설립한 회사는 각계각층 부유층들의 저택에 보안 시설을 설치하는 사업체였다.
형사 시절에 쌓은 인맥은 돈과 술과 여자를 통해 현재까지도 잘 이어져 왔다. 가진 게 많아 지킬 게 많은 사람들은 조정배를 불러 고가의 보안 설비를 자택에 설치했다. 그는 고객의 집을 방문해 정기적으로 직접 설비 점검까지 하는 열정을 보여 줬다. 2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VVIP 고객은 직접 관리했다. 특유의 깔끔한 성격과 경찰 시절에도 명품 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유난스러운 면이 오히려 고객들에게 장점으로 통했다.
조정배의 요트에서 한낮의 샴페인 파티를 끝낸 여자와 남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희주와 무원을 지나쳐 지나갔다. 알코올 냄새와 향수 냄새, 그것들을 모두 합친 돈 냄새가 그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잔상처럼 남았다.
희주는 요트에 올라가지 않고 허리를 숙인 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조정배가 있었다. 그는 요트를 떠난 사람들이 남긴 음식과 술을 혼자 먹고 있었다. 자기 식욕을 제어할 수 없는 사람처럼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기에 바빠 보였다.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듯한 몸짓이었다.
“강남서 강력팀 정희주 경위입니다. 잠시 나와 주시겠습니까?”
조정배는 고개를 들어 희주를 바라보았다. 엄익수가 보여 준 사진에서 본 것보다 더 비대해져 있었다. 그는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다가 원래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잔에 남은 샴페인을 전부 입에 털어 넣고 은색 쟁반 위에 가득 놓인 작은 브로치 같은 핑거 푸드를 쉼 없이 쓸어 넣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걸 다 해치운 다음에야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강희건 대표 잘 아시죠? 유명 연예기획사 대표와 전직 경찰이 형 동생 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요?”
희주는 밖으로 나온 조정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략적 파트너십.”
대답 또한 바로 나왔다. 풍채만큼이나 당당하고 여유로운 태도.
“스타리온 보안 설비를 우리 회사에서 했으니까.”
“현역 시절에는 강 대표를 위해 가사도우미 뒷조사도 하셨죠. 덕분에 강 대표는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고요. 요즘도 그를 위해서 일하시나요?”
조정배는 두툼한 손을 들어 술로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문질렀다. 마치 그 손으로 희주를 후려갈기려다가 방향을 트는 것처럼 손을 높이 들었다가 뒤통수로 가져갔다.
“이덕식 판사님, 주용훈 변호사님과도 형, 동생 하던 사이인가요?”
“고매하신 분들이랑 무슨 대화가 통하겠어. 치상 형 밑에 있는 애군. 그 옆에 달고 온 건 뭐, 애인이야? 날 찾아온 걸 형은 모르겠지?”
“이제 아시겠죠. 저희가 가면 직접 전화해서 알리실 테니까요.”
조정배는 거칠게 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거야. 그리고 우린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덕식의 아내였다.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녀가 한 번은 다시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그녀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마치 남편을 잃은 여자를 연기하는 여배우처럼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있었다.
희주가 만난 수많은 목격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지인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누구나 자기 집 거실에서 경찰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본인이 용의자이든 아니든 간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떠올리고, 혹시 경찰의 질문이 그 일을 캐내기 위한 유도신문은 아닐지 고민한다. 그러다 경찰이 떠나고 며칠, 심지어는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미처 말하지 못했던 기억을 말하기 위해 연락을 했다. 이덕식의 아내도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 전화를 했을 것이다.
희주는 조정배를 무원에게 맡기고 자리를 피해 전화를 받았다.
“……하나 걸리는 게 있어서요.”
남편이 죽어도 꼿꼿하게 앉아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잔뜩 쉰 상태였다.
“오래전 일이에요. 남편이 젊었을 때 TV에도 나온다는 유명인의 초대를 받고 별장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보나 마나 딸아이 또래도 되지 않는 여자를 끼고 진탕 마셨을 게 뻔해서 다음 날 집에 온 남편한테 화를 냈지요.”
강희건. 별장. 여자. 파티. 판사. 그리고 가사도우미. 희주의 머릿속에 단어 몇 개가 일렬로 늘어섰다. 그것들을 합치면 뭐가 나올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남편이 좀 이상했어요. 다신 별장에 안 갈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나오니 저도 더는 묻지 않고 처신 잘하라고, 어디 가서 약점 잡혀서 딸자식 앞길 막으면 참지 않을 거라고 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남편이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자고 힘들어 했어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는 걸 보고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만 했어요. 묻지 않았어요. 솔직히 알 자신이 없더군요.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요.”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게 판사 사모님의 고매한 자존심을 지켜 줘서일까. 여자는 지난번보다 솔직했다.
“사실 남편은 초대를 받고 엄청 들떠 보였어요. 애써 감추려 했지만 집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양반이 별장 주인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아느냐며 제게 자랑했죠. 드디어 자기와 급이 맞는 이들과 어울린다면서요. TV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면서 저 애들이 바로 별장 주인이 만든 애들이라며 그게 마치 본인 일인 양 뿌듯해하기에 어이가 없었죠.”
“별장에 다녀온 뒤로는 다시 강희건 대표를 만나지 않았나요?”
“남편을 초대한 사람 이름이 강희건인가요?”
“정황상 그렇습니다.”
“또 만났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남편이 원하는 대로 그 사람들과 제대로 엮이질 못한 건지, 남편이 초대를 거절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희주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요트 앞에 서 있는 조정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까 요트에서 나온 늘씬한 여자들을 떠올렸다.
“혹시 남편분께서 요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으신가요? 선상 파티라던가.”
“그 일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희주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로 침묵했다. 여자가 긍정으로 받아들이길 바랐다.
“남편은 여자가 있는 술자리를 참 좋아했어요. 얼마 전에는 갑자기 낚시를 시작했다면서 낚시를 가르쳐 준다는 남자를 집에 데리고 왔어요. 친한 동생이라더군요. 그것도 다 나중에 핑계를 대기 위함이라는 걸 알았죠.”
“어떤 남자였는지 기억하세요?”
“물론이에요. 명품 스카프를 하나 가져왔어요. 와이프 것을 사면서 제 것도 하나 샀다고 하더군요. 몸집이 굉장히 커서 왜소한 남편이랑 나란히 서 있는 걸 보면 기가 막혔죠. 차고 있는 시계나 입고 있는 양복, 전부 다 고급이었어요. 남자가 가고 나서 남편이 스카프는 와이프 것이 아니라 애인 거라고, 회사 바로 옆 헬스장에서 일하는 여자를 애인으로 뒀다고 했어요.”
“스카프를 들고 사모님 댁을 찾아간 건 조정배라는 전직 경찰입니다. 강희건 대표와도 물론 친분이 있고요.”
“다 연결이 된 거군요. 호텔에 간 것도…… 우습군요. 어린애처럼 들떠서는 갔을 남편을 생각하니.”
“다시 전화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아뇨. 그다지 고통스럽진 않아요. 다만 내 처지가 딱한 것 같아서 그게 힘드네요. 연애 시절에도 한 번 가 본 적 없는 호텔방에서 남편이 죽었다니. 자식들 마주하기 민망해요. 내 인생 전체가 우스워졌으니까요.”
희주와 무원은 전곡항에서 출발해 논현동에 있는 조정배 회사로 갔다. 목적지는 회사가 아니라 회사 옆 건물에 있는 헬스장이었다. 밖에서도 저 안이 헬스장이라는 걸 훤히 할 수 있도록 전면이 유리창인 헬스장에서 몸매 좋은 남녀들이 트레이드 밀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카운터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다가 희주와 무원이 들어오자 일어났다. 아이라인을 길게 뺀 여자의 눈이 희주를 지나 무원에게 멈췄다. 희주는 무원 뒤로 슬쩍 물러났다. 무원이 가진 장점이 이런 데서 발휘되는 게 흥미로웠다.
“강남경찰서 강력팀 이무원 경사입니다.”
여자는 무원이 경찰이라는 걸 알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원이 조정배 사장과 친분이 있냐고 묻자 바로 이쪽을 보는 다른 트레이너들을 힐끔 보았다.
“……여기 찾아오신 거 사장님도 아세요?”
“아니요. 마음에 걸리시면 사장님과 통화하셔도 됩니다.”
여자는 고양이처럼 등을 구부려 어깨를 움츠렸다.
“됐어요. 여기 찾아오셔서 저 만난 거 그 사람한테 말하지 마세요.”
여자는 앞서서 헬스장을 나갔다. 그리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무원은 희주가 음료를 사러 간 사이, 자신들이 왜 찾아왔는지 설명했다. 살해당한 이들과 관계된 여러 명의 사람들. 그 속에 조정배가 중요한 인물로 존재한다는 것까지.
“사장님이 지난달에 자살 시도했던 거 아세요?”
“네?”
“처방받아 온 우울증 약을 한 번에 먹었어요. 두 달 치였는데.”
희주는 아까 만난 조정배의 눈빛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 누구보다 생에 대한 의지가 넘쳐 보이는 정력적인 사내와 우울증 약이 곧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혹시 직접 발견하셨나요?”
“네. 택배 기사한테 전화가 와서 알았어요. 사무실로 가끔 서핑 보드가 배달 오는데, 비싼 거라 웬만하면 본인이 직접 받아요. 근데 사장님이 전화를 안 받으니까 택배 기사가 저한테 전화를 한 거예요. 가끔 제가 받은 적도 있거든요.”
“그래서 대신 사무실 문을 열어 주셨군요.”
“네.”
“언제부터 약을 먹었는지 아시나요?”
“정확히는 몰라요. 오래됐다고 했어요.”
“왜 먹는지 물어보셨나요?”
“처음 만났을 때 물어봤어요. 겉으로 봐서는 전혀 그런 것에 의지할 것 같지 않잖아요. 지금은 살이 좀 쪘지만 처음 만났을 땐 몸도 좋았어요.”
“근데 우울증 약을 먹어서 좀 놀라셨군요.”
“네. 술도 매일 엄청 마셨고요. 한 번에 와인 서너 병은 순식간에 사라졌죠.”
“이유를 말하던가요?”
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창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헬스장 안에서 보이지 않던 여자의 눈가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자가 아이라인을 세게 그리는 건 그 주름 때문인 것 같다. 속사정은 물을 필요 없지만 여자는 뭘 약속받았을까. 아내와의 이혼 후 제대로 된 집에서 함께 사는 인생 같은 걸 조정배가 약속했을까.
“아주 예전에 뭘 봤는데…… 그게 어떻게 해도 잊히지 않는데요. 옛날 일인데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고.”
그러면서 여자는 자신의 양손을 활짝 펼쳤다.
“이 손에 그날의 느낌이 생생하다고 했어요. 그게 자길 미치게 만든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