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어두운 곳을 좋아해요. 해저에 앉아 있는 난파선처럼."
외과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낀 오른손이 최준석의 목을 잡아챘다. 새벽 3시, 냉장고에서 꺼낸 유리병에 담긴 물을 마시려는 순간이었다.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맥없이 깨졌다. 텅 빈 집에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잠깐 울렸다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두려움에 떨 여유도 없다. 터질 듯 팽팽한 라텍스 장갑이 목을 조르는 순간, 거의 반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목을 죄던 손이 풀어졌다. 그리고 횡격막에 짧고 매서운 주먹을 연타로 날렸다.
“커헉…….”
저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이 밀려 나왔다. 두툼한 팔뚝이 그를 감싸 안은 상태로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등받이가 달린 화장대 의자에 앉혔다. 최준석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화장대 거울을 노려보았다. 침대 옆 베드테이블 위에 권총이 있다. 상대가 권총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양쪽 손목이 의자 뒤로 끌어당겨졌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 그의 양 손목을 의자 등받이에 강력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순식간에 양쪽 손목이 의자에 고정되었다.
최준석은 괴한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부릅뜨고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려 애썼다. 그러자 두툼한 손이 목과 경동맥을 또다시 조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흐려졌다. 손이 점점 목을 파고들었다. 극도의 공포감에 괄약근의 긴장마저 풀릴 것만 같았다. 눈앞과 머릿속이 암전 상태가 되자 목을 조른 손이 떨어졌다.
조정배의 애인이 카페를 떠난 후, 희주와 무원은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조정배도 트라우마 삭제를 했다는데 내 왼손을 걸겠어.”
“동의해요. 분명 최준석 회장을 통해 빅에 접촉했을 거예요.”
“그럼 최준석 회장은? 오치상 팀장은?”
“이건 그냥 제 느낌인데.”
“말해 봐.”
“두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는 부류 같아요. 그저 지나간 과거 취급 하면서 별로 맘에 담아 두지 않을 것 같은?”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 강희건도 마찬가지일 거야. 자기 자신을 미치도록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이 울면서 기억을 지워 달라고 하는 장면은 전혀 상상이 안 돼.”
“하지만 결국 세 사람이 핵심이겠죠.”
“그리고 가장 난공불락이지.”
“결국 죽은 사람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까요?”
“도대체 뭐 때문에 망가진 거지? 같이 잘 먹고 살 살던 사람들이 왜? 이게 전부 우연이라고 생각해?”
“이덕식 판사는 노이로제에 가까운 의심병과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주용훈 검사는 약과 술에 중독된 상태였죠. 그리고 조정배는 파티 중독에 알코올 중독이고, 최근 자살 시도를 했고요.”
희주는 초조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담배 있어?”
“안 피우잖아요.”
“그냥 들고만 있으려고. 있어, 없어?”
“없어요.”
희주는 김이 샌 표정으로 무원을 바라보았다.
“원래 피우지 않았어?”
“선배 쉬는 3개월 동안 끊었어요.”
희주는 놀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안 피우는 인간은 있어도, 중간에 끊을 수 있는 재수 없는 인간이 있단 말이야?”
“참을 만해요.”
“말도 안 돼. 넌 진짜 정상 아니야.”
“선배랑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담배 생각 안 나던데요?”
“형사한테 중독은 권장할 만한 습관이야. 물론 몸은 망가지지만 집요하지 않은 형사는 범인을 잘 못 잡으니까. 잘 나가는 야구선수 중에 도박에 중독되지 않은 인간이 없다는 거 알아? 같은 맥락이지.”
“그럼 선배는 뭐에 중독되어 있어요?”
“분노.”
무원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정말 싫은데, 또 그게 내가 움직이는 동력이 돼.”
“……차라리 담배를 시작하세요.”
그날 밤도 희주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오피스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노래방 간판을 노려보았다. 노래방 간판 불빛 때문에 블라인드를 쳐도 집은 완벽하게 어두워지지 않았다. 노래방 간판은 새벽 3시가 되자 꺼졌다. 며칠째 그걸 지켜보는 중이었다. 새벽 3시. 먼 곳에서 들리는 앰뷸런스 사이렌이 불안하게 들리는 시간. 세하에게 전화가 온 것은 사이렌 소리가 한바탕 지나간 다음이었다.
“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나 해도 될까요?”
“무슨 얘기든 좋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빅을 설립한 직후였죠. 이십 대 초반의 아름다운 미대생이 절 찾아왔습니다. 기억을 지우고 싶다면서요.”
희주는 세하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억 대본을 듣다가 혀를 깨물며 발작했습니다. 그걸 남의 목소리로 듣는 것조차 허락할 수 없었던 거죠. 그녀는 저를 찾아오기 전에, 작업실에서 세밀한 조각을 할 때 쓰는 갈고리 모양의 소형 조각칼을 삼켰습니다.”
희주는 심장박동이 빠르게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거부했습니다. 주치의는 강제 급식을 결정했고, 두 명의 남자 간호사가 그녀를 억지로 눕히면 다른 간호사가 고무 급식관을 목에 넣고 액상으로 된 영양물질을 위장에 흘려 넣었습니다.”
“듣기 괴롭네요.”
“그렇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물리적으로 그녀를 압박했는지 의사로서 이해할 수 없지만…… 부모의 동의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녀는 부모 앞에서 당장 퇴원을 시켜 주지 않으면 혀를 깨물고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퇴원하고, 절 찾아왔습니다.”
“대체 어떤 기억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거죠?”
“우린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그녀는 눈이 하나뿐인 고양이를 특히 예뻐했죠. 그녀가 지우고 싶은 기억을 저에게 말하기까지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뭐였나요?”
강력계 형사 일을 10년 동안 하면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은 사건이 아닌 적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사건들이 뇌리를 스쳤다. 전혀 무뎌지지 않는, 아무리 자주 접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어떤 부류의 사건들이 있다.
“그녀는 열두 살 때 이복오빠와 삼촌에게 동시에 성적 학대를 받았습니다. 정신병원에서 두 남자 간호사가 양쪽에서 그녈 힘주어 누르고 팔과 다리를 붙잡고 두꺼운 고무를 목 안으로 밀어 넣는 그 행위가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희주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 빌어먹은 놈들은 제대로 처벌을 받았나요?”
“그녀는 기억을 지웠고 전 그 이상의 관심은 가지지 않았어요. 한 여자의 영혼이 산산조각 나 버린 사건에 대한 고백을 듣고 그녀의 기억을 삭제한 것까지가 제 몫이죠. 처벌에 대한 건 제 능력 밖의 일이죠. 그리고 전 사법 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철저히 피해자 쪽입니다.”
“제게 이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물론입니다.”
두 여자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경위님을 돕고 싶어요. 피해자들을 위해 불법을 저지를 생각이에요.”
“환자 기록을 오픈하겠다는 건가요?”
“네. 의사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요.”
“만일 환자 기록을 누설한 게 밝혀지면 곤란해질 텐데요.”
“의사로서의 경력은 끝이죠.”
“그럴 필요 없이 저희가 영장을 받아 오면 절차대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의료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저희를 도울 수 있어요.”
“아뇨. 그럴 경우 다른 분들의 정보 역시 노출될 가능성이 커질 거예요. 연구소가 언론에 불필요하게 노출될 것이고 기사가 나가면 빅을 거쳐 간 이들에게 득이 될 리 없어요. 전 그걸 원하지 않아요.”
“차가운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면에서 당연히 그래야 하죠. 차갑지 않고서야 아까와 같은 환자의 경험담을 제정신으로 듣기 힘들 테니까요.”
“제가 경찰이 된 이유는 아이와 여자들을 지켜 주고 싶어서였어요.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은 용감하고 정의로운 창과 칼을 든 기사를 동경했죠. 보통 여자들이라면 기사의 품에서 미소 짓는 공주나 영애에게 감정이입을 했겠지만, 전 기사에게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친절한 기사를 꿈꾸던 소녀가 형사가 되었군요.”
“그런 셈이죠. 사실 기사의 진짜 의미는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지만. 그땐 그림 속 정의로운 기사에게 반했어요.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사람. 선한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 다정하지만 무뢰한에게는 가차 없는 그런 사람. 하지만 진짜 경찰이 된 지금은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전 피해자들만 생각해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결국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요.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떠올렸을 사람들이요. 그게 누굴까요?”
“……가족이죠.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희주는 택시를 타고 빅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종종 희주를 힐끔거렸다. 희주는 허리를 숙이고 양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토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택시에서 내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손바닥을 흠뻑 젖은 티셔츠에 문질렀다. 건물 앞에서 희주를 기다리고 있던 세하는 희주가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장을 섰다. 희주는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드세요.”
세하는 얼음이 찰랑이는 물과 차가운 물수건을 나무 트레이에 내왔다. 그리고 희주가 그 물을 다 마시고 다시 한 잔을 더 청해서 마신 다음 물수건으로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을 훔칠 때까지 자리에 앉아 희주를 바라보았다.
“경위님의 그런 점이 제 마음을 움직였어요. 고작 20여 분 동안 택시를 타는 일이 기절할 것처럼 고통스러운데도 고집스럽게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 점이요.”
세하는 맨얼굴이었다. 이 여자는 여기서 사는 걸까. 희주는 발작을 진정시키는 와중에도 그게 궁금해졌다. 세하의 볼우물 근처 갈색의 작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수영선수처럼 짧은 커트 머리가 살짝 흐트러졌다. 하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상대의 심리를 읽는 여자. 이 여자가 일하지 않을 때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기억을 지우지 않는 건 스스로 해결하고 싶기 때문 아닌가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미칠 지경인데도 일단 그냥 두는 거죠.”
“반만 맞아요. 일단 누가 내 머리통을 연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 돋거든요. 그러다가 뭐 다른 걸 건드릴 수도 있잖아요.”
세하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어떤 사람한테는 남한테 머리통을 맡기는 게 유일한 선택지일 수 있어요. 그게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수사에 협조만 해 주신다면 뭐든 다 약속하죠. 제 머리통을 열게 해 달라는 것만 빼고.”
“아까 제가 조각칼을 삼킨 미대생 이야기를 했죠.”
“네.”
“제가 그 일을 통해 배운 건, 피해자를 도우려는 행위가 도리어 피해자를 지옥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 제가 범인을 잡지 못하면.”
“피해자들은 억울할 겁니다. 자기 머리통을 저한테 맡긴 보람이 없을 테니까요.”
“의사도 그런 표현을 쓸 줄 아는군요.”
세하는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위님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고민 없이 선을 넘을 스타일이죠.”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바로 그 점이 본인과 주위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텐데, 경위님은 신경도 안 쓸 겁니다. 제 말이 틀렸나요?”
“꽤 직설적이네요.”
“불쾌하신가요?”
“솔직해서 좋네요.”
“파트너를 위험에 빠트리고 자기 자신을 던져 버리고 필요하다면 법도 어기고 분명 상관도 속이겠죠. 제가 우려하는 건 바로 그 점이에요. 경위님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어그러지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어요.”
“분명히 범인을 잡을 거예요.”
“그런가요?”
“물론이에요. 반드시 범인을 잡겠어요.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내 파트너 기억하죠?”
“네.”
“파트너를 시켜서 당신한테 점수를 따라고 할 참이었어요. 그 친구는 모르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당신한테서 정보를 빼내라고요.”
“그 방법을 쓰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희주는 세하의 뒤를 따라 3층에 위치한 연구실로 갔다. 파격적인 모던아트 작품을 전시해도 좋을 갤러리 같은 빅의 2층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신경외과 의사의 연구실은 마치 ‘하얀 사막’ 같았다. 희주는 순간 텅 빈 공간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책과 각종 자료가 빼곡한 서재와 집기들이 있는 벽면을 백색의 슬라이딩 도어로 가려 놓았기에 든 착각이었다. 때문에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것은 화이트톤의 책상과 의자, 그 위에 놓인 노트북과 모니터 정도였다. SF영화에서 봤음 직한 극도의 절제된 공간. 이 공간의 주인이 어떤 취향을 가진 인간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극도의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세하는 희주 앞으로 세 개의 얇은 폴더를 내밀었다.
“기억 삭제를 한 순서대로예요.”
희주는 파일을 들어서 확인했다. 조정배, 주용훈, 이덕식 순이었다.
“순서가 의미심장하네요. 제일 먼저 사망한 건 이덕식 판사인데, 가장 먼저 기억을 삭제한 건 조정배라니.”
“그분은 의사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케이스에요.”
“왜죠?”
“기억 삭제에 실패했어요. 두 번이나 두개골을 열었지만.”
“그러면 결국 기억을 갖고 있다는 뜻인가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가 있나요? 성공률이 높다고 들었는데.”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기억을 지운다는 건 사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트라우마는 주로 우측 뇌에 저장돼요. 때문에 기억 대본을 들려주면서 뇌 스캔을 하면 주로 우측 뇌에서 뇌 활동이 포착되죠. 기억은 어두운 곳을 좋아해요. 해저에 앉아 있는 난파선처럼 뇌 가장 깊고 어두운 물길 곳에서 수십 년을 살아남죠. 그러다가 저 같은 신경학자가 그걸 끄집어내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어떤 기억은 제 손길을 거부하죠. 이 케이스가 그랬습니다. 그의 기억은 세상으로 나와 제 손에 삭제되길 거부했어요.”
“도대체 어떤 기억을 삭제하고 싶었던 거죠? 대체 어떤 기억이기에 지워지지도 않을 만큼 뇌에 달라붙어 있었던 건가요?”
세하는 흥분으로 달아오른 희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세 사람은 동일한 살인 사건의 목격자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따로 떨어져 있던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판사와 변호사, 형사가 목격자였다. 그것도 같은 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각각 비밀에 부치고 살았다.
“세 사람의 경험은 각기 달랐으나 결국 동일한 사건으로 귀결됐죠.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여자가 죽는 걸 봤어요.”
희주는 이덕식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희건의 프라이빗 별장 파티.
“주용훈 변호사가 어떤 파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나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용훈 변호사는 가장 디테일하게 기억을 불러냈어요. 20년 전 그날 이후부터 괴로웠다고 고백했어요. 잠이 들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죠.”
“술을 마셔서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려고 했군요.”
“하지만 그것도 실패했죠.”
“그러다가 최준석 회장에게 조언을 구하고 빅을 찾아왔고요.”
“경찰스트레스장애 학회는 한국에 들어온 직후부터 저희와 업무 협조를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제가 가장 먼저 컨택한 곳이었죠. 학회를 통해 지원 요청이 오는 경찰과 소방관, 그리고 해바라기 센터에서 추천하는 피해자는 조건 없이 기억 삭제를 지원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아닌 법조인임에도 수술을 해 준 이유가 뭐죠? 원칙에 안 맞는 거 아닌가요?”
“이덕식 판사는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기부금을 약속했고, 주용훈 변호사는 해바라기 센터에서 무상으로 법률 상담을 맡았어요. 제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제안했어요. 아마도 최준석의 조언을 받았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피차 암묵적으로 비밀에 부칠 일이었으니까요.”
“그 사람들, 돈으로 기억을 지운 거예요. 당신은 그걸 도왔고요.”
“부인하지 않겠어요. 과격한 표현이지만 맞는 말이니까요.”
“기억을 지워도 사실을 지우지 못해요.”
희주는 세 개의 폴더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직 한 사람이 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맞아요. 그리고 그들도 그걸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그 대가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올 거라는 걸.”
세하는 주용훈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기억 대본. 주용훈과의 상담을 바탕으로 하지혁이 작성한 것이었다.
“주용훈 변호사는 강희건의 별장에서 한 여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꽤 오랫동안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구역질을 참으면서도 끝까지 보았다고요.”
“누가 여자를 죽였는지 말했나요?”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하지 않았지만, 죽은 여자가 누군지는 알았어요.”
“누구였나요?”
“강희건의 가사도우미였어요.”
주용훈이 강희건의 별장 파티에 간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차례 그곳에서 비밀스럽고 추잡한 그들만의 파티를 즐겼다. TV에서만 보던 여배우들이 남자들이 원하는 모든 행위에 자기 몸을 제공했다.
주용훈은 죽은 가사도우미가 주방에서 일하는 걸 여러 번 봤다. 그러다가 위스키에 넣을 얼음을 가지러 혼자 주방에 들어온 그에게 여자가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이대로는 강희건이 자신을 죽일 거라며.
“하지만 그는 여자를 돕지 않았군요.”
희주는 무겁게 입을 뗐다.
세 사람은 강희건의 별장에서 목격한 일을 깊은 바닷속에 침몰한 난파선처럼 기억 가장 깊은 곳에 묻었다.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기억은 주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희주는 문득 세하가 궁금해졌다. 이 여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아기에 대한 죄책감과 아기를 죽인 것과 다름없는 남자에 대한 분노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 발작을 해 대는 희주 입장에서는 눈앞의 이 작디작은 체구의 여자가 마치 신(神)처럼 느껴졌다.
“박사님에게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희주는 흡사 백색의 사막 한복판에 앉아 있는 유령과도 같은 표정의 세하에게 물었다.
“〈인 마이 라이프〉라는 비틀스 노래가 있는데 경위님과 들어 보고 싶군요.”
세하는 음악을 재생했다. 3분가량 되는 네 남자의 노래가 끝나자 세하는 입을 열었다.
“커트 코베인의 장례식에서 이 노래가 연주되었죠. 이 노래의 마지막 소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떠났고, 어떤 이들은 살아 있어요. 내 삶에서 나는 이들을 모두 사랑했어요.’”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요?”
희주는 집요하게 되물었다. 대답을 꼭 듣고 싶었다. 저 완벽해 보이는 여자의 마음속에도 난파선 같은 기억이 있을까.
“전 전자에만 동의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전부 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