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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16화

16 정보원

“강력반 형사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지.”

by 김은주

희주는 카페에 들어섰다. 전남편은 여기서 파는 달콤하고 고소한 크림을 커피 위에 올려 주는 비엔나커피를 좋아했다. 그리고 늘 비엔나에도 이 커피를 팔까 궁금하다며 꼭 오스트리아 빈에 가 보자고 말하곤 했다.

정현은 한 소년과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뭔가를 스케치한 종이들이 펼쳐져 있었고, 소년은 정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소년은 종이를 모아 자신의 백팩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의 시선이 희주의 눈썹 위 흉터에 머물렀다가 재빨리 땅으로 향했다. 희주는 카페를 나가는 소년의 왜소한 뒷모습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정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술 과외라도 시작했나 봐? 지능범죄수사팀 월급으로는 부족해?”

정현은 원래 여성청소년과 소속이었다. 그는 미술에 관심과 재능을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따로 만나 진로에 대해 조언을 해 주곤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형사와 문제아가 아니라 삼촌과 조카로 볼만큼, 정현은 진심 어린 태도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럴 때마다 희주는 경고했다.

“넌 분명 배신당할 거야. 걔가 맘 잡고 공부해서 미대라도 갈 것 같아? 그림은 SNS에 올릴 거고, 좋아요나 몇 개 받겠지. 그림을 미끼로 또래 여자애를 꾀어낼 수도 있고.”

그러면 정현은 화내지 않고 나처럼? 이라고 되물었다. 미대를 나와 경찰이 된 정현은 유명한 몽타주 전문가로 활약했다. 프러포즈도 몽타주로 했다. 정현은 희주를 사기 전과 10범쯤 돼 보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사장처럼 그렸다. 희주는 그 그림을 받고 결혼을 결심했다.

정현은 몽타주를 내밀었다.

“아까 통화하면서 그려봤어.”

정현이 그린 것은 식당 여자를 협박한 거구의 형사였다. 짧은 갈색 머리에 구레나룻, 가느다란 입술에 명품 셔츠를 즐겨 입는 50대 중, 후반의 형사. 희주는 몽타주를 집어 들었다.

“지금 맡은 사건은 어때? 진척은 좀 있어?”

“산 넘어 산이야. 현직 경찰이 전직 경찰 비리 수사를 하는데 잘 될 리가 없지. 아무도 입 안 열어. 당연해. 본인도 언젠가는 옷을 벗고 퇴직할 텐데, 누가 전직 퇴직 경찰 협회 회장 비리에 대해 털어놓겠어.”

정현은 퇴직 경찰들의 사조직인 재향경찰회 전직 회장의 자금 횡령 비리를 수사 중이었다. 재향경찰회 거액의 자금이 현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보수단체와 유흥업소 업주 모임 등에 흘러 들어갔다는 익명의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 중이었다.

“변호사에 대해 좀 알아봤어. 이름이 낯익더라고.”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희주 앞으로 비엔나커피를 내려놓았다.

“주용훈은 검사 시절에 뇌물을 받고 몇 건의 일들을 무마했다는 의혹이 있어서 검찰청 내부에서도 조사가 있었어. 하지만 예상대로 흘러갔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때가 되자 검사를 관두고 변호사가 됐어.”

희주는 티스푼으로 커피 위에 구름처럼 얹어진 크림을 떠서 입에 넣었다. 달콤한 크림이 식도를 타고 하루 종일 텅 비어 있던 위로 흘러내려 갔다. 안도감과 편안함이 뱃속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거기까진 일반적인 흐름인데, 변호사는 뭔가 비틀어졌어. 스텝이 꼬이면서 망가지기 시작했어.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좀 돌려 봤더니 다들 비슷해. 술에 우울증에, 거의 폐인 수준이었다는 거야. 그러다가 죽은 거야. 뭔가 있어.”

“그걸 찾아야지.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현은 희주의 눈썹 위 상처와 눈, 코, 입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사건, 손 뗄 수 없는 거야?”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느낌이 그래. 안 좋아. 분명 후유증을 남길 거야. 전직 판사와 검사가 연달아 살해됐고, 돈 많은 어떤 인간과 경찰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일개 경위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일개 경위?”

희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정현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처럼 정신이 온전치 않을 때는 맞는 말을 들어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근데 어쩌지? 난 더러운 걸 보면 못 참잖아.”

“그래. 우리가 같이 살 때도 청소는 네 담당이었지.”

“넌 그딴 거 대충하면 어떠냐는 주의였으니까.”

“난 모처럼 같이 비번인 날 너랑 더 재밌는 걸 하고 싶었어. 도시락 싸 들고 공원에 가거나 한강으로 자전거를 타러 가는 일 같은 신혼부부 데이트다운 거 말이야.”

희주는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정현을 쳐다봤다. 정현은 졌다는 얼굴로 입을 닫았다. 어차피 희주를 말릴 수 없을 거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네가 정직 처분 받았다고 했을 때 다리 뻗고 잤어. 시한폭탄 같은 정희주가 집에만 있다니 정말 속이 편하더라. 근데 다시 현장에 복귀를 했는데 뭔가 재수가 나쁠 것 같은 사건을 맡았다니, 앞으로 발 뻗고 자긴 글렀어.”

“여자 뒷조사 한 경찰을 찾아야 돼. 강희건은 절대 입 안 열거야. 느낌이 그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인간이야.”

정현은 체념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정현이 퇴직 경찰의 비리를 수사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희주는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는 각종 첩보를 수집하는 중이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정보원이 되어주는 익명의 퇴직 경찰들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었다. 희주는 정현이 알려주는 번호와 주소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얼마 찔러 줘야 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믿어도 되는 분이야. 속을 좀 긁는 소릴 해도 대들지 마. 그러면 아마 본인이 아는 선에서 전부 얘기할 거야.”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테이블에 양손을 짚었다.

“커피 다 마시고 가. 언제 또 여길 오겠어.”

정현이 말에 희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희주야, 우리한테 아이가 있었으면 달랐을까?”

“또 그 얘기라면 갈게.”

희주는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난 널 조금만 바꿀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널 그냥 뒀을 거야.”

“일어나지 않은 일로 자학하진 말자.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정희주는 뭔가 트집을 잡아서 이혼하자고 했겠지, 라고 생각해 버려.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니까.”

정현은 피식 웃으며 쿠션이 다 꺼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다른 여자 만날 때 써먹으면 되잖아. 드센 와이프 때문에 맘고생 하다가 헤어졌다고 그래. 어떤 여자들은 그런 말에도 넘어간다고 하니까.”

희주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시고 일어났다.

“조심해.”

정현은 걱정을 담아 말했다.

“너 늙었나 봐. 걱정이 늘었어.”

“농담 아니야. 뭔가 찝찝하면 바로 발 빼.”

“…알았어.”

희주는 맥없이 대답했다. 정현 앞에서는 송곳 같은 까칠함을 오래 내세우기가 어렵다.

“네 직감을 믿어. 정희주 촉 끝내주잖아.”

“공황장애 약 때문에 그 촉이 무뎌진 것 같지만, 말이라도 고마워.”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방법은 그들을 만난 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성 안토니오가 말했어. 네가 마주하는 게 천사인지 악마인지 네 감각이 알려 줄 거야. 그걸 절대 무시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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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와 무원은 2차선 도로 건너에 있는 금은방 ‘보성당’을 바라보았다. 한자로 적힌 보성당 간판의 불이 저녁 7시에 맞춰 들어왔다. 왠지 좋은 신호 같았다.

“무슨 느와르 영화 주인공 같네요.”

무원이 말했다.

“30년 경찰 생활을 마치고 동네 금은방에 앉아서 탐정 노릇을 한다는 거잖아요. 우린 그 재야의 고수한테 한 수 배우러 가는 풋내기들 같고.”

“탐정업도 합법으로 통과된 마당에 나도 퇴직하고 탐정이나 할까?”

보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엄익수가 앉아 있다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눌린 코에 흰 코털이 삐져나와 있고 허옇게 센 머리와 염색한 머리가 뒤섞여 있었다. 희주는 이덕식 집에서 본 시추가 떠올랐다. 나이든 시추 얼굴을 한 엄익수는 회색 여름 양복바지에 회색 골프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별로 호감을 느낄 부분이 없는 늙은 남자에게 희주가 딱 하나 마음에 든 것은 시추처럼 슬픈 갈색 눈이었다. 엄익수는 희주와 무원을 재빠르게 훑어보고는 약간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김정현 경위 소개로 왔습니다.”

엄익수는 희주의 말에 헛, 소리를 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어째 신혼부부처럼은 안 보이더라니.”

그러면서 희주 얼굴을 다시 보았다.

“김정현이랑 갈라섰다는 여자가 누군가 했더니.”

무원이 희주를 힐끔 보았다. 예의 없는 노인네를 향해 희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희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귀금속들이 줄지어 누워 있는 유리 진열대 앞에 앉았다. 엄익수를 닮아 낡아빠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쇳소리가 났다.

“형사 은퇴하시고 금은방이라, 별 볼 일 없네요.”

희주는 참지 않고 되갚았다. 하지만 엄익수는 희주의 도발에 꼼짝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길 건너 골목 안쪽에는 은퇴한 마약단속반 형사가 중고 책 서점을 해. 가끔 만나서 둘이 막걸리 한잔하지.”

무원은 진열장에서 반지 하나를 발견하고 손으로 짚었다.

“이건 뭔가요?”

“경찰 퇴직 기념 순금 반지. 강력팀도 은퇴하면 금반지 해 주지?”

“네.”

“그거 여기서 하는 거야.”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연줄이야. 경찰 연금은 마누라 통장으로 들어가니 마누라가 관리하고, 가게는 내 막걸릿값이나 벌려고 열어 둔 거야. 그러다가 너희 같은 인간들이 와서 귀찮게도 하고.”

“김정현 경위랑 어떤 사이세요?”

희주가 물었다.

“왜? 내가 물이라도 먹일까 봐? 걘 내 팀원이었어. 경찰만 아니었음 사위 삼고 싶은 놈이었는데, 왜 하필 경찰로 만나서는. 다 틀렸지. 지금은 언제든지 열리는 내 지갑 같은 놈이자 술친구야. 니들이 마음에 들어서 협조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둬.”

“저희를 싫어하시든 좋아하시든 상관없어요. 저는 여자 협박한 형사가 누군지만 알면 돼요.”

“조정배.”

너무 쉽게 이름이 나왔다.

“세상 어떤 미친놈의 형사가 현장에서 가면서 기백만 원 짜리 남방을 입어, 시장 매대에서 3장에 만 원 하는 걸 사서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입고 버리는 게 강력팀 형사인데. 안 그래?”

“그렇긴 하죠.”

희주는 책상 밑에 처박아 둔 쇼핑백을 떠올렸다. 그 안에는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검정색 나이키 반팔 티셔츠 3벌이 들어 있다.

“조정배는 그때도 유명했어. 셔츠는 어디 거, 지갑은 어디 거. 우리는 들어도 모르는 명품만 갖고 다녔어. 그래서 전화 받았을 때 바로 그놈이 떠올랐지.”

“솔직히 너무 금방 답이 나와서 맥이 풀리네요.”

“그런 맛도 있어야지. 백날 길바닥에다 버리는 시간이 절반인데.”

희주는 엄익수에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현역 시절 엄식수는 한 놈이라도 더 잡아들이기 위해 자기 인생 절반을 기꺼이 길바닥 위에 바쳤을 위인이었다.

“그때가 좋았지. 마누라가 보름에 한 번씩 내 자리 서랍에 새 셔츠를 채워 줬어. 밥숟갈이랑 이불 한 채 밖에 없던 집안 살림이 좀 피고 나서는 홍삼도 같이 끼워줬지. 마누라는 내가 현역에 있는 동안 집에 안 와도 좋고 애들이 어떻게 크는지 몰라도 상관없는데 동료들이 집에 찾아오게만 만들지 말라고 했어. 어느 날 현관문을 열었는데 나 없이 내 동료들이 서 있으면 그건 분명 무슨 일이 난 거니까. 경찰관 마누라라면 누구나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보낸 마누라한테 연금 통장 정도는 줘도 돼. 그 돈으로 옷을 사 입든 가방을 사서 들든 난 상관 안 해.”

엄익수는 말을 마치고 목에 낀 가래를 내리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 인간 얼마 전에 요트를 샀다고 자랑하던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인스타그램도 할 줄 아세요?”

“할 수 있는 건 다 하지. 내가 남들 뒷구멍이나 캐고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짓도 만만치 않아.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돼. 아니, 남들 하는 것보다 배는 더 해야 좀 쓸 만한 소리가 귀에 들어와. 조정배 요트를 누가 사줬는지 확인해 봐. 조정배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고 다들 부러워했어. 다들 집에서 마누라들이 들들 볶잖아. 박봉에, 집에도 안 와, 애도 안 키워. 형사들이 은퇴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알아? 이혼하자는 마누라 치마꼬리 잡는 거야.”

“용케 잘 버티셨네요?”

“나야 잘 버티지. 그게 내 일이었는데. 진작 김정현이랑 잘 헤어졌어. 어차피 늙으면 갈라설 거. 그놈이 사근사근한 맛은 있는데 여자 휘어잡는 맛은 또 없지. 보아하니 휘어잡을 수도 없는 여잘 골랐구먼.”

“혹시 강희건 대표 본 적 있으세요?”

엄익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 라인 아냐.”

“그럼 그 라인은 누가 잡았어요?”

“맨 밑에 조정배. 그 위에는 지금 니 대가리.”

“오치상 팀장이요?”

“그리고 놈 위에 지금은 팔에 시답잖은 완장 하나 차고 돌아다니는 최준석이 있었어. 그때 최준석이 팀장이었지.”

엄익수의 입에서 여러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낯선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강희건을 위해 여자 뒷조사를 한 건 조정배고 그 위에는 오치상과 최준석이 있었다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별장의 가사도우미 일을 제안한 건 오치상과 최준석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정보원 일은 왜 하시는 거예요? 돈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돈? 돈 때문에 자네 같음 이걸 하겠어? 한때 동료였던 인간들 이름을 파는 이 일을?”

“그럼 왜 하세요?”

“생각해 봐, 나이가 들어서 총도 없고 배지도 없고 마누라한테 버림받은 경찰만큼 딱한 존재가 어디 있어. 인생 무의미해지는 거 순식간이야. 퇴직 경찰들 자살률이 엄청 높은 거 알아? 근데 더 슬픈 건 자살 시도를 저지르는 경찰들에게는 대부분 경고의 징후를 감지할 만한 가족이 없다는 거야. 대다수가 너처럼 이혼을 했지. 난 운이 좋아 살아있는 거고.”

엄익수는 갈색 눈으로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에게서 젊었을 때의 자신을 모습을 찾는 눈이었다. 갈색 눈동자가 빛났다가 다시금 어두워졌다.

“조심해.”

엄익수는 정현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그게 가능한가요? 범인 잡으러 다니면서 조심한다는 게.”

“그게 아니라, 형사들 쑤시고 다니는 거 조심하라고. 은퇴한 입장에서는 갑자기 과거 일, 과거 동료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비상이야.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거니까. 만약 네 윗대가리가 널 불러서 딴 사건을 맡기면 일이 복잡해졌다는 뜻이야. 그리고 켕기는 게 있으면 널 그냥 안 두겠지. 그걸 조심하라는 거야.”

희주는 오치상을 떠올렸다. 오치상은 본청에서 퇴직하고 싶어 제대로 된 한 방에 목을 맨 인간이었다. 범인 검거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달, 본청에서 할 감동적인 은퇴식과 더 높은 액수의 연금 때문이었다.

“악은 가까이 있을 때 더 찾기 어려워.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고, 핵심은 보기 어렵지. 유다가, 선한 이스가리옷 유다가 배반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제자들은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유다가 배반을 했다고? 결코 누구도 걔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우리 인간은 가까운 악을 외면한다고, 본능적으로.”

엄익수는 희주에게도 무원에게도 아닌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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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있던 무원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뭐 해 줄 말씀 있으세요?”

엄익수는 슬픈 갈색 눈으로 무원을 보며 말했다.

“강력반 형사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지.”

“네?”

“형사라는 직업은 말이야, 인생에서 투명 망토 같은 역할을 해. 텔레비전, 영화에서 하도 나와서 형사의 애환과 고뇌는 이제 유치원 애들도 다 알지. 어디 가서 형사라고 하면 어지간하면 다들 술술 불잖아. 게다가 살림도 애 키우는 일도 전부 뒷전으로 미뤄도 누가 뭐래? 형사는 항상 나쁜 놈을 잡느라 불철주야 바쁜 사람이라는 걸 이 세상 사람이 다 안다고. 그러니까 불평 말고 즐겨. 더 열심히 하란 말이야. 한 번이라도 현장에 더 가 보라고. 이 나이쯤 되면 뭐가 제일 후회되는 줄 알아? 결국 뭐라도 더 해 볼걸, 하는 생각에 막걸리를 안 마시고는 버틸 재간이 없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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