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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20화

20 저수지 괴담

“우린 모두 조금씩 미친 것 같아요. 선배도, 나도.”

by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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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하고 뜨거운 열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무원은 보조석 창문 밖으로 상체를 거의 다 내놓고 있는 희주를 힐끔거리면서 운전에 집중했다.

“운전하는 제 생각도 좀 해 주면 고맙겠어요.”

뜨거운 먼지바람이 코점막을 자극했다. 희주는 보조석 시트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난 오늘 어딜 가나 한 소리 들을 운명인가 봐.”

“선배 애인 말이 맞아요.”

“너까지 거들지 않아도 돼.”

“지금 정상 아니에요.”

“알아.”

희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너무 쉽게 이성의 끈을 놓은 건 아닐까. 쓸데없이 폭탄만 던진 것일지 모른다. 앞으로 수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정희주를 자폭시킬 폭탄. 어쩌면 오직 희주만을 터뜨릴지도 모를 폭탄.

…이 정도면 자폭이지.”

“네?”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 마.”

“선배.”

“왜.”

“트라우마 삭제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그 의사 제대로 인 것 같던데. 의사들 별로 신뢰하는 편 아니지만, 박세하 박사는 좀 달라 보였어요.”

“그 핑계로 병가 내고 휴가도 좀 갔다 오고 술도 좀 줄이고?”

“화만 내지 말고 지금 상황을 제대로 보자는 거예요. 정면 승부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고 피해 가고.”

“그렇게 돌아가고 피해 가려다가 판사, 변호사 죽은 거 봐. 물론 그 사람들도 피해자야. 하지만 그 사람들 어떤 여자가 죽는 걸 보고만 있었어.”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거예요. 누가 자기 목숨 걸고 남을 구해요. 특별히 그 사람들이 나쁜 게 아니라.”

무원은 핸들을 톡톡 두들기며 항복 신호를 전송했다.

“그냥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형사가 돌아가고 피해 가면 범인을 어떻게 잡아?”

“선배는 판사, 변호사 억울하게 죽은 거 풀어 주려고 이 일에 집착하는 것 같지 않아요.”

“아니라고는 안 할게. 그 인간들이 죽기 전에 뭔 죄를 지었는지도 중요해. 죽는다고 있던 죄가 사라지지 않아. 더더욱 사과를 받아야 하는 진짜 피해자가 죽은 이 마당에. 난 그 죽은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선배도 잊지 마세요. 우린 이덕식, 주용훈 살해하고 최준석 죽이려다가 실패한 범인 찾는 중이라는 걸. 그게 우선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인간들의 과거를 파는 거잖아. 누가 그들을 죽일 만한지 알아내려고. 잊지 않았어.”

희주는 무원이 자기 때문에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지 못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었다. 그만큼 그와 함께 이 뜨거운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린 모두 조금씩 미친 것 같아요. 선배도, 나도.”

희주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는 무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불평하지 않는 것으로 반쯤 미친 선배를 배려하는 남자. 그와 같이 있는 게 편하다. 차 안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발작하지 않는 건 무원 덕분이었다. 희주는 어느 순간 주머니 속의 약보다 무원을 더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사에는 도움이 돼. 조금 미쳐 있는 게 범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 주니까.”


강희건의 별장 출입문에는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높은 담장과 화물 운송용 철제 출입문이 별장과 농장 부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문 너머 키 큰 나무들이 시야를 전부 가렸다. 농장 입구에는 낡은 인터폰이 설치되어 있었다. 희주가 움직일 때마다 출입문 양옆에 달린 고성능 감시 카메라가 따라서 움직였다. 강희건은 어젯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여기서 눈 돌아가게 화려한 파티가 벌어진다고?”

“밖에서 보기엔 인적도 드물고 가로등도 별로 없고 주변에는 빈 공장 터만 즐비하지만, 저 안은 딴 세상인가 보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감시 카메라도 별로 없었어. 별장 주변엔 아예 없고. 쇠락한 동네라 그렇다지만 서울에서 조금 떨어졌을 뿐인데도 좀 심할 정도네.”

“왜 이런 데 별장을 지었을까요? 주변에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런 데니까 별장을 지었겠지. 비밀 많은 인간들은 프라이버시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젊은 시절 지은 별장인데 좀 의외네요.”

커다란 택배 트럭 한 대가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트럭은 철제 출입문 앞에 잠시 대기했다. 잠시 후, 안에서 출입문이 열렸다. 트럭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두 사람은 출입문에 달린 감시 카메라가 비추지 못할 곳까지 떨어져 있다가 별장 밖으로 나오는 트럭을 세웠다. 대화는 싱겁게 끝났다. 별장 주인 앞으로 온 물건은 ‘서핑 보드’였다. 이미 별장으로 서핑 보드를 실어 나른 것이 올해만 해도 세 번째라고 했다.

“서핑이라. 또 다른 취미 생활인가?”

“그건 모르겠지만, 저 안에 들어가는 건 포기해야 될 것 같은데요? 우리가 경찰인 걸 알면 문을 열어 주겠어요?”

“꼭 저 안에 들어가야만,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는 건 아냐.”

두 사람은 낡은 마을회관 앞에 다다랐다. 마을 회관 입구에는 돌에 조각한 기념비가 서 있었다. 무원은 기념비에 적힌 글을 읽었다.

“마을 회관을 강희건 대표가 세웠네요. 지역 발전 기금도 쾌척했고요. 강 대표 본적지는 여기가 아니던데 고향도 아닌 곳에 왜 이걸 세웠을까요?”

그때 마을 회관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은 희주와 무원을 발견하고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면 심심한 오후에 말을 걸 대상이 나타난 것이 반가운 것일지도. 희주는 후자이길 바라며 다가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신분을 밝히면서 별장주와 관계된 일로 동네를 둘러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희주의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노인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노인을 별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외지인, 그것도 경찰이라는 존재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존재다. 하지만 노인은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노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별장 안에는 오래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저수지가 있었다. 별장이 생긴 뒤로는 출입문을 통해 진입로를 지나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왔다. 저수지는 철문 안쪽으로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별장은 그 저수지 100미터 뒤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별장에서 출입을 막았다. 사유지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껏 수십 년을 살아온 주민들 입장에서는 도의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라며 항의했다. 분쟁이 거듭되자 마을운영위원회 측은 강희건이 마을 회관 건립 기금과 지역 발전 기금을 내놓는 조건으로 저수지 출입을 막았다. 일부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돈이 통장에 들어오자 운영위원회 인사들이 오히려 주민들을 막았다.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몰라.”

노인이 말했다.

“뭐가요?”

“저수지 못 들어가게 한 거.”

“왜요?”

노인은 흡사 나무껍질 같은 손을 들어 여자의 긴 머리 흉내를 냈다.

“거기 저수지에서, 처녀 귀신이 나와.”

“처녀 귀신이요?”

희주는 귀를 의심했다. 노인이 자신을 놀리는가 싶었다.

“그래, 얼굴이 허옇고 몸뚱이가 얄팍하다던데.”

“어르신도 보셨어요?”

노인은 설레설레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흔들었다.

“난 아냐. 하지만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우리 아들이 이장할 적에 거기서 굿을 하려고 했어.”

“왜요?”

“아, 왜긴. 귀신이 자꾸 나오니까. 동네 뒤숭숭해지니까.”

“그래서 굿을 하셨어요?”

“못 했지. 별장 주인 놈이 길길이 날뛰면서 아들을 쫓아냈어.”

“원래 오래된 동네에 있는 강가나 물가에는 그런 얘기가 흔하잖아요. 그거 애들 물 조심 시키려고 어른들이 만든 이야기잖아요.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처녀 귀신도 그런 거죠?”

희주의 말에 노인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라니까. 답답하네. 본 사람이 있다니까. 머리 긴 여자가 물속에서 손을 뻗었다고 했어.”

노인은 진지했다.

“그 뒤로는 아주 더 출입을 안 하게 됐지.”

“주인 입장에서는 그게 진짜든 가짜든 좋았겠네요?”

“거참, 진짜라니까. 경찰이라면서 그렇게 남의 말을 못 믿어서 어떻게 죄지은 놈을 잡을 거야? 난 한평생 법 한 번 어긴 적 없는 사람이야. 내 말은 믿어도 돼.”


“오래된 마을에 괴담 하나 없으면 섭섭하지. 안 그래?”

희주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득 담겨있던 멸치와 막장으로 끓인 시래기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훌훌 마시며 말했다. 희주는 깨끗하게 밥과 국을 비운 다음 아까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복기했다. 그리고 일과 별개로 최근 들어 가장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원은 별 대꾸도 없이 묵묵히 국에 밥을 말아 떠먹었다.

그 사이 낯빛이 불콰해진 남자들이 가게를 나가고 가게 안에는 콩나물을 다듬는 주인 여자와 희주와 무원, 셋만이 남았다.

“동네에서 보던 얼굴이 아닌데.”

주인은 손님들이 다 나간 틈을 타서 혼잣말도 아닌 묻는 것도 아닌 애매한 말투로 물었다.

“네, 이 동네 처음 와요. 처음 왔는데도 이 친구가 밥집을 잘 골라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희주가 시원스레 대꾸하자 여자는 아예 콩나물이 담긴 양재기를 들고 다가왔다.

“어쩐지 외지인 같아 보이더니. 이제는 이 동네 공장들도 다 닫아서 젊은 사람들이 올 리가 없는데, 내가 속으로 그래 생각했다니까. 볼 것도 없는 이 동네에 뭔 일로 왔데. 데이트?”

무원은 눈썹을 한 번 치켜세우고 국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희주는 피식 웃고 아까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저수지 처녀 귀신 얘기 아세요?”

여자는 희주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아니,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동네 어르신한테 들었어요.”

“뭐 좋은 얘기라고 외지 사람한테 그런 얘길.”

“옛날이야기 같고 재밌던데요?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흔한 스토리잖아요. 물에 빠져 죽은 여자가 처녀 귀신이 돼서 돌아왔다.”

“그거, 진짜인데.”

여자는 희주와 무원을 번갈아 보았다.

“에이, 듣고 안 믿었구나. 그거 진짜야.”

여자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희주와 무원이 경찰이라는 걸 알고 놀라워했다. 그 죽은 여자가 두 사람을 불렀는가 보네, 라고도 했다. 이 백반집은 시어머니 가게였다. 여자는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대신해서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물려받았다. 저수지 괴담은 그 무렵 이야기였다. 아니, 사건이었다. 어느 여름밤, 여자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지독히 더운 밤이라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고 잠든 터라 사이렌 소리에 온 식구가 잠을 깼다.

“군대 간 아들이 첫 외박 나온 날이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 우리 아저씨가 옷을 막 주워 입고 나가려는 걸 내가 막 말렸지. 무슨 일인 줄 알고 나서느냐고.”

여자가 말렸지만 여자의 남편은 손전등을 들고 밤길을 내달렸다. 경찰차가 별장 출입구에 서 있었다. 구급차도 한 대 서 있었다. 남자처럼 손에 손전등을 들고 온 마을 주민 네다섯 명이 두런두런거리며 별장 안쪽을 기웃거렸다. 야밤에 싸움 구경이라도 할 줄 알고 반바지 바람에 달려온 남자들은 여자 하나가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 별장 관리인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죽은 여자가 그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라, 저수지에 그 여자가 두르고 있던 하얀 앞치마가 둥둥 떠 있더래.”

처녀 귀신과 앞치마를 맨 채 죽은 가사도우미. 희주는 이 이야기가 20년째 주민들에게 회자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도 그 집으로 출근하는 여자가 있어. 그 집 주인이 여자 없이 혼자 사니까, 안살림 할 사람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었어도 계속 여자들이 오는 거야.”

“여자들이요?”

“응. 가정부. 내가 볼 때마다 다른 여자더라고. 주인 성격이 별난 모양이지? 그게 아니면 가정부가 바뀔 일이 뭐가 있어?”

백반집을 나온 직후 무원은 이 지역 관할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소속과 직급을 밝히고 20년 전 저수지에서 익사한 가사도우미에 대해 물었다. 무원의 전화를 받은 경사는 머뭇거리다가 그 일에 대해 알 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겠다고 했다. 잠시 후, 휴대폰 너머로 큰 소리가 들렸다. 강희건을 성폭행으로 고소했다가 도리어 과거 유흥업소에서 일한 일이 밝혀지자 자살한 가사도우미 말고, 또 한 명의 가사도우미가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20년 전 일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고인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유족이 원했을 수도 있다. 희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거칠게 말했다.

“잘 마무리된 사건을 무슨 의도로 쑤시는 겁니까? 뭐, 이제 와서 방송이라도 내보려고 하는 겁니까?”

희주는 무원이 스피커폰으로 해 놓은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당시 일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담당자가 사건 파일에 기록한 정도의 피해자 신상과,”

남자는 말을 끊고 거칠게 대꾸했다.

“피해자는 무슨 피해자. 혼자 빠져 죽었는데. 익사로 인한 사고라고.”

“네, 저희도 압니다. 그러니까 그 파일을 한 번,”

“다 태워서 없습니다.”

“네?”

“오래된 거라 없다고요. 오래전에 폐기했습니다.”

“돌아가신 분 성함과 유족 연락처라도 알려 주시면,”

“폐기했다니까?”

전화 속 남자는 희주의 말을 한 번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유족이 원하지 않아 조용히 묻고 넘어갔다고 했다.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전화를 받으신 분은 그날 현장을 보셨나요?”

상대가 침묵했다. 희주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날 일을 기억나는 대로 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굳이 저희가 돌아가서 공식적으로 업무 협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할 말 없소.”

“그날 직접 출동하고 사건 파일도 직접 폐기했을 정도면 사건 담당자이셨을 것 같은데.”

“오래돼서 기억 안 납니다.”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희주와 무원은 차를 세워 놓은 공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낡은 소나타 한 대가 달려왔다. 보조석 대시보드 위에 불이 꺼진 경광등이 놓여 있었다. 희주는 차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차가 멈춰 서고 운전석 창문이 반쯤 내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금곡 파출소에 근무하시나요?”

희주의 말에 남자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차를 세운 사람들이 누군지 판단하는 눈치였다.

“저희는 강남서 강력팀 정희주 경위, 이무원 경사입니다.”

“아예, 안상호 경위입니다.”

“2000년에도 금곡서에 계셨나요?”

“네, 첫 부임지였죠. 1월부터 있었습니다.”

“그해 8월 이 마을 저수지에서 여자가 익사한 사건 기억하십니까?”

남자는 다시 한번 희주와 무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의 의도, 목적, 지금 대답이 미치는 영향력과 범위까지, 짧은 순간 남자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스쳤다.

“지금 생각이 나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제가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기억이 나시는 대로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희주는 상대의 망설임을 읽었다. 이곳은 20년 동안 그의 일터였다. 누군가 외지인과 길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소문을 내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런 마을일수록 소문은 빠르게, 아주 작은 것까지도 깊숙하게 돈다. 남자는 마지못해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희주는 연락처를 입력하고 돌려주었다. 남자가 다시 운전석 창문을 올리고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아마도 방금 전에 희주에게 열을 내던 자신의 상관에게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 희주는 먼지를 일으키는 남자의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전화번호 지워 버리겠죠?”

“그렇겠지. 뭐, 상관없어. 뭔가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행운에 기대서 일을 했다고.”

희주가 앞장서서 무원의 차를 향해 걸었다. 무원도 곧 뒤따랐다.

“그래도 문을 다 두들겨 보는 거죠? 그때 호텔에서처럼.”

희주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우연히 진실을 마주할 수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가 점점 마음에 든다는 것. 두 가지 예감 모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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