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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자 Aug 16. 2017

#87

연재소설

싱글 침대 두 개가 세로로 나란히 있었다. 가운데 배낭을 놓았고 입고 있던 등산복을 벽에 걸었다. 벽이라 말하고 싶지만 가벽이었고 방과 방 사이를 구분해 준 얇아도 너무 얇은 합판에 불과했다. 사람이 있다면 적막한 이곳에서 옆 사람에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며 묵었던 모든 롯지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구조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먼저 누웠다. 기주가 화장실을 다녀오고 기주도 침대에 누웠다. 시침 분침 초침만 있는 아날로그시계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더니 시계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과 입에서 하얀 입김이 계속 뿜어져 나왔다. 고도는 낮아졌지만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남체에서도 기온은 달라지지 않아 추위가 심했다. 침낭에 들어가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침낭은 가벼워 움직임이 자유로웠지만 이불은 무거웠다.


기주는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뜨거운 물을 담아온 물병을 만지며 차가워진 손을 녹이고 있었다. 무진은 핫팩을 만지며 빨개진 손을 녹이고 있었다.

기주가 음악을 틀었다. 'Tanti Anni Prima'

무진이 즐겨 듣던 첼로 음악. 집에 혼자 있을 때 무한반복으로 즐겨 듣던 음악. 인트로가 좋아 인트로만 수십 번씩 들었던 음악. 바라나시 가트에 앉아 같이 들었던 음악이었다.


기주는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오롯이 첼로 연주에 빠져 들었다. 무진도 눈을 감고 연주를 깊이 들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지 않았던 무진이 첼로 음악에 깊이 빠져 든 건 학생 때였다.


사진 공부를 하던 시절 선생님은 주제를 던져주었고 4가지 주제 중 무진이 고른 주제는 '죽음'이었다. 2주간의 촬영계획서를 작성하고 모델, 조명, 배경, 세팅, 동선을 계획했는데, 그건 영화의 미장센과 다를 바 없었다. 촬영 계획을 만들긴 했지만 무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촬영 당일까지도 완전히 뒤엎고 새롭게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마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선생님은 말했다.

-'죽음'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을 말해봐.

- 무서움, 검정, 혼란, 지옥, 독방, 광기, 악마


당시에 무진은 머릿속이 백지장 같았다. 생각나는 것은 1차원적인 단어의 열거에 불과했다. 좀 더 멋진 사진 더 나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욕심을 부렸지만 욕심부릴수록 나아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말했다.

-죽음, 죽는다, 죽을 예정이야, 죽을 수도 있어. 죽지 않고 싶어, 또 뭐가 있을까, 음. 살아있다, 죽음은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삶은 항상 선택에 기로에 있잖아. 한 마디의 말, 나의 행동에 따라 쉽게 변하거든.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

정 힘들면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떨까. 시간도 없고 결과물을 만들어 놓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까.

죽어야 할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죽을 예정이야. 무엇을 잘못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 다만, 그 사람이 죽는다는 걸 네가 프레 임안에 만들어 봐. 어쩌면 간단하게 촬영이 될 수도 있어.


무진이 잠시 생각에 빠졌고 어떻게 촬영장을 세팅해야 할지 고민했다. 모델과 모델 앞에 투명한 큰 비닐이 필요했다. 조명은 모델 뒤 상단에 위치하고 ㅁ델 앞 우측에서 모델에게 비춰줄 약한 조명이 필요했다.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대로 촬영장을 만들어갔다. 중요한 것은 모델의 심리상태였다. 곧 죽어야 할 인물이었고 죽음에 체념한 상태며 두려움은 없지만,    세상과 이별하기 직전에 모습이 얼굴에 표현돼야 했다. 억울함은 없지만 눈은 촉촉이 젖어 한 두방을 눈물이 있어야 했는데 무진은 그 점이 가장 두려웠다. 모델에게 어떻게 이 신을 이끌어 내야 할지 말이다.  고민을 이미 알고 있을 선생님은 촬영장에 무진과 모델 그리고 선생님을 제외한 모든 인원을 촬영장에서 나가게 했다. 3명이 전부인 촬영장에 적막함을 깨운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선생님은 무진에게 말했다.

-

감정이라는 거 쉽게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네가 원하는 사진을 표현하려면 촬영장의 분위기를 만들 줄 알아야 해. 사진가가 원하는 콘셉트를 모델에게 전해줘도 현장 분위기가 그에 맞지 않다면 나올 수 없어. 음악도 그중에 한 가지지. 모델과의 교감이 필요하다는 말은 꼭 모델과 이야기를 해서만 되는 게 아니야. 말없이도 할 수 있지. 곡을 많이 알아두면 언젠가 필요한 날 너에게 도움이 될 거다.


그때 촬영장을 울림 있게 만든 곡은 첼로곡이었다.

'Minor Blue'

40분간  그 곡을 계속 들었고, 촬영은 10분도 되지 않아 끝났다.


그 기억이 무진에겐 강렬했다. 첼로 연주곡.  그 후로 무진은 홀로 있을 때나 작업할 때 첼로 연주곡을 듣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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