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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가 말했다.
- 그거 생각 나? 너 술 마시고 정신 줄 놓고 했던 얘기. 아버지 술 드시면 항상 먹을 거 사 오시면서 했던 얘기하고 했던 얘기 또 한다며 근데 네가 똑같이 하고 있다고 아버지 닮아간다고 했던 얘기. 아들이 아버지 닮아가지 누굴 닮겠냐고.
무진은 생각했다. 술이 얼큰히 취할 때면 같은 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술자리가 끝나면 슈퍼에 들려 과자를 잔뜩 샀었다.
-내가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많이 취하면 꼭 그러더라. 똑같아 아버지랑. 요새는 많이 취하면 빵집에 가서 빵 사. 빵 없으면 햄버거도 사고 그래. 먹을 것도 아니면서.
-어련하시겠어. 한두 번이어야지.
그랬었다. 무진은 아버지와 비슷했다. 술을 좋아했고 기분이 좋으면 더 마셨다. 적당히 마셔야지 생각하지만 술자리가 시작되면 금세 잊어버렸다. 한 번은 기주가 부산으로 출장 갔을 때였다. 무진은 거래처 사람들과 한 잔 한다며 기주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초밥집에서 삿케로 일차를 먹고 이차는 선술집에 들어가 청하를 마셨다. 진동소리에 정신이 들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핸드폰을 흘겨봤다. 기주에게 메시지가 몇 개 와있었다. 화장실로 가서 기주에게 전화했다. -취하지 않았어. 오늘은 적당히 마시고 들어갈게.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거래처 사람들을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한 잔 더 하고 싶었다. 근처에 살고 있던 형에게 연락해 한 잔 마시자 했다. 자주 가는 연어 집이 있었다. 생 연어회가 괜찮은 곳이었다. 메시지를 남겼다. 형하고 잠깐 마시고 들어간다고 했다. 기주는 딱 잘라 말했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청하에 시작한 다시 시작한 술자리에 무진은 정신이 왔다 갔다 함을 느끼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무진은 거실에 엎드려 있었다. 부재중 통화목록엔 기주로 가득 차 있었고 메시지에도 기주로 도배돼 있었다.
'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너 때문에 한 숨도 못 잤단 말이야. 올라가서 봐. 끊어!
무진은 할 말이 없었다. 여러 번 그랬다.
-무슨 생각해?
-그냥. 아무튼 저 친구들도 안주거리 풍성하다. 그래. 언제쯤 세상으로 나오시나요?
-생각 같아서는 바로 나오고 싶은데 2주만 시간을 줄려고. 신입은 들어와 있어. 인수인계하고 정리할 거야. 네 팔 가면 트레킹도 해야 되니까 등산 장비도 있어야겠다. 필요한 거 나중에 메시지로 좀 보내줘.
-사장님 저희 갈게요. 삼만 원이죠?
-행복하시고 하는 일 다 잘되길 빌어요.
사장님은 가는 손님에게 일일이 나오셔서 악수를 청하셨고 한마디 말을 남기셨다.
무진은 등산장비를 꺼내 보았다. 필요한 것들은 다 있었다. 사고 싶은 것들이 있긴 했지만 네팔에서 사도 충분했다. 3주의 시간이 흘렀고 며칠 남지 않았다. 그동안 필요한 물품을 기주에게 알려줬다. 배낭, 침낭, 등산화, 몇 벌의 등산복 등 중요한 장비 사는데 200백이 넘게 들었다고 했다. 가볍게 떠나야 한다는 말에 거위털 침낭, 패딩을 값비싸게 사기도 했다. 준비는 끝났다.
2월 5일 기주와 무진은 공항에 일찍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 들려 선글라스를 샀다. 5개월간의 장기 여행이었다. 어디를 가볼지 정하지 않았고 첫날 숙소도 예약하지 않았다. 카트만두에 도착하면 타멜 거리로 가서 찾아보기로 했다. 계획 없는 여행은 해외에 나가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지름길 과도 같았다. 떠나기 3일 전 한 번 만났고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할 거고 나머지는 가서 결정하자고 했다. 은행에 들려 일인당 5,000달러를 환전했다. 한 달에 백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졌다. 안내 방송이 들렸고 곧 비행기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기내 안은 번잡 했다. 네팔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양손에는 짐이 가득이었다. 예상컨대 한국에서 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외국인들도 보였고 단체로 오신 어르신들도 보였다. '7시간을 어떻게 가. 아휴. 자리도 좁고.' 투덜거리듯 툭 내뱉었지만 감정은 입가에 나타난다고 했던가 옅은 미소가 보였다. 중년의 부부는 손을 맞잡고 계셨다.
무진과 기주의 자리는 A, B 41열 비상구 좌석이었다. 일찍 수속을 마친 덕분에 비상구 좌석이 있어 직원이 먼저 권해줬다. 긴 비행시간에 비상구 좌석은 이륙할 때 승무원과 마주 보며 앉아야 하는 어색한 몇 분의 침묵만 넘어가면 꽤나 매력적인 좌석임에는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탑승했고 익숙한 기내 방송이 시작됐다. '저희 항공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며 편명을 말했다. 목적지까지 정성껏 모시겠다는 말과 카트만두까지 예정된 비행시간은 이륙으로부터 7시간이 걸리며 즐겁고 편안한 여행되시라는 말이었다.
토잉카에 비행기가 움직이고 있었다. 창에 비친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에는 빗물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활주로로 이동하는 중에 기내방송이 나왔다. 곧 이륙하겠으니 좌석밸트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라는 멘트였다. 관제탑에서 이륙 허가 났는지 엔지 소리가 더욱 커졌고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