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멀쩡한 샤워기가 갑자기 망가지냐고. 거길 왜 눌러
-수도 잠그다가 눌려진 거지. 볼트가 약해서 빠진 거라니까. 꼭 내가 그런 것처럼 얘기해요.
-거길 왜 누르냐고
-아니 왜 역정은 내고 그러시는 거예요.
생각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어떤 생각을 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무진은 샤워 도중에 그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오랜만에 고향집에 찾아가 며칠 쉬다 갈 생각이었다. 오전에 샤워를 하다 샤워기 수도가 터졌다. 분명 볼트를 꽉 쪼였는데 안쪽 나사선이 뭉개졌나 보다. 다시 수도가 터졌을 때 급하게 수도 계량기를 잠갔지만 그동안 물은 폭포수처럼 터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왜 역정을 내셨을까. 속이 상했다. 무진은 그 생각이 갑자기 났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임시방편으로 테이프를 감아 물이 새지 않게 나사를 다시 조였다. 진정되지 않은 감정을 다스리려 밖으로 나갔다. 무엇이 그토록 감정을 화나게 했을까 상황을 되짚어 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집 밖에선 효자이듯 했지만 집 안에선 언제나 불효자인 걸까. 엄마는 한번 이런 말을 했다.
-평생을 같이 산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달라져 있었다. 말속에 화가 있었고 역정이 있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조화롭게 넘어가지 못하고 수시로 부모님은 말다툼을 하셨다. 어릴 적 부모님의 모습은 항상 밝아 보였는데 혹은 자식이 보는 앞에서 다툼을 하지 않으신 건지 성인이 된 이후로 무진이 가끔 집에 갈 때면 다툼은 반복됐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화목한 가정은 연출된 상황처럼 보였다. 무엇이 달라지게 했을까 살갑게 말하지 못하는 부자지간은 답답한 상황만 이어졌다. 술자리에서 부모님 얘기가 나오면 고생한 부모님 호강시켜드리겠다는 말도 말 뿐인 걸까. 언제 안아 봤는지, 손 한번 잡아 드린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진은 그런 자신이 싫었지만 할 수 없었다.
누나는 살가웠다. 아버지와는 아주 살갑진 않아도 이야기도 자주 하고 엄마와는 속내까지 다 털어내며 얘기했다. 무진은 누나처럼 하지 못했다. 속내를 내비치지도 못했고 말수도 적었다. 사람들과 만나면 말 많던 무진이 집에만 가면 조용했다. 집을 나설 때면 간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수시로 드나들던 여러 가지 감정들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여운이 남았다. 차가운 머리와 더 차가운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고 거울에 비친 무진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얼굴 어딘가엔 감정이 숨어있겠지만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무진은 옷을 갈아입었고 차가운 실내는 뜨거웠던 가슴도 식혀 버렸다. 삭혀 버렸지만 언젠가 찾아올 감정이 두렵기도 했다.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히말라야 설산이 그리워 다시 왔다. 처음 기주와 같이 왔을 땐 모든 것이 새로웠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대한 산맥에 압도되었다. 미련이 남을까 3번의 트레킹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와야겠다 다짐도 했다. 다시 찾은 히말라야는 처음과 달랐다. 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무진의 마음이 달라졌던 것이다. 명료한 기억의 잔상이 머릿속에 그려졌지만 현실은 설산에 불과했다. 설산뿐이었다. 트레커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올라갔지만 좀처럼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불현듯 떠올린 명상을 하리라 마음먹었고 그래서 찾은 센터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기대가 전혀 없진 않았나 보다. 바람이 더 간절해지며 갈망이 수그러졌다 생각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하루마다 수시로 변하는 감정상태를 그 어느 때보다 직관적으로 경험한 이곳 생활이 좋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어려운 시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