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성 기억상실
그렇게 다들 가고 혼자 남은 백광현은 아까 주머니 속에 넣어둔 사진을 꺼내보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저 사진은 기억이 나는데 저기에 현미래가 있었다는 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 장소, 나머지 친구들! 다 기억이 나는데 ㅠㅠ 왜 현미래만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도대체 왜?'
똑! 똑!
"백광현 님~~~ 저녁 식사 왔습니다."
그때 문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식사를 가져다 주셨다.
"네! 감사합니다."
방금 전 빵을 먹었더니 배가 별로 고프지는 않았지만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는 백광현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는 부모님께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교육을 받은 영향이 컸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입으로 들어가는 지, 아무 생각 없이 숟가락 질과 젓가락 질만 반복하고 있었다. 밥 한 공기를 다 비우고, 식기도 내놓고, 소화도 시킬 겸 복도를 거닐고 있는데
‘드르르르륵 드르르르륵’
문자가 왔다.
‘백광현 환자분. 오늘 저녁 6시 ~ 6시 20분 사이에 현미래교수님 회진있으십니다. ’
오늘 저녁에 회진 오신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저녁시간에? 참! 아침, 아니면 저녁에 회진 돈다고 하셨지? 지금 5시 30분이니 시간은 좀 있네. 조금 만 더 걷다가 양치하고 기다리면 되겠네...'
백광현은 시간을 확인한 후 시간 여유가 아직 조금은 있어 조금 만 더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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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진료가 끝이 난 현미래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선배! 잘 지냈어? 뭐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정신과 교수인 박신정 교수였다! 박신정 교수는 예전에 박사 논문 쓸 때 현미래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 정신과 의사 선배였다.
"어이쿠야.. 오랜만이야~ 현교수. 나야 잘 있지~현 교수는 잘 지냈어?"
"나야 뭐 그럭저럭...근데 선배! 그때, 선배 박사 논문이 해리성 기억상실에 관한 거였지?"
"어~! 그랬지. 그때 현 교수가 많이 도와줬었지~ 현교수 아니었음 지도 교수님한테 엄청 많이 혼났을 건데 그때 고마웠어. 근데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건 아닐 거고. 왜?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
“뭔데 그래? 뭐든 물어봐!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다 말해줄게”
“그래. 고마워! 선배. 해리성 기억상실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는 거였잖아? 근데, 좋았던 기억도 지워버리는 케이스도 있었나?"
"음...... 아무래도 그렇지! 흔치 않은 케이스이긴 하지만 있긴 있었어! 해리성 기억상실이 일어나는 원인이 특정한 일이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때 두렵거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리는 거 거든! 근데 과거엔 좋았던 기억이지만 현재는 자신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면 그럴 수 있지! 이럴 테면........."
"이를테면?"
현미래는 목이 바짝 타 들어갔다.
"이룰 수 없는 사랑 같은 거!!!
".........................."
"여보세요! 현 교수! 근데 왜 그래?"
"아~ 아니. 근데 그 사라지는 기억이 특정 사건이나 특정 기간이 아니고, 특정인에 관한 기억 일 수도 있나?"
"그렇지! 국내에선 아직 보고된 케이스가 없긴 한데 외국에선 몇 건 보고된 게 있어! 한 케이스는 아까 말했던 너무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집안 반대가 너무 심해 협박까지 당한 케이스였지? 아마?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경우였어! 그 두 경우에 다른 건 다 기억하는데 그 한 사람, 즉,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만을 지워버렸던 케이스들이었지..... 참... 슬픈 일이지... 그토록 사랑했었는데 그 사람만을 기억 못 한다니? 근데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도 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 기억이 기억하지도 못 할 만큼의 고통이 됐을까? 사랑했기에 잊었노라! 뭐.... 이런 거겠지? 근데 갑자기 왜?"
"아.... 아니야!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근데 두 케이스다 나중에 기억이 돌아왔어? 아님............"
"음...... 해리성 기억상실의 경우 가끔씩 나중에 기억이 돌아 오기도 해~ 근데 이 두 케이스는, 내 기억으론, 둘 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어~너무 힘들었던 거지? 사랑했던 만큼 그 고통도 컸을 테니까....!"
"그래..... 그랬구나..... 역시......... 고마워 끊어!"
"응? 그래.... 잘 지내고~ 가끔 모임에 얼굴도 비춰주고 해~ 다들 현 교수 궁금해 해!"
"그래! 봐서.... 고마워~!"
전화를 끊고 난 현미래는 갑자기 현기증이 나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때 그 일 때문에........ 흑..... 흑.......'
현미래는 죄책감과 슬픔이 밀려와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으면 불쌍한 사람....... 흑.... 흑........'
그렇게 한참을 울던 현미래는 책상 위 전화기를 들었다.
"입원실 회진 돌게요~ 환자 분들께 문자 좀 보내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화기 너머 의아해 하는 듯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정되지 않은 회진은 거의 없는 현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현미래는 오늘 꼭 백광현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는 책상에서 사진 한 장을 챙겨 나섰다.
똑! 똑!
"백광현 님! 교수님 회진 오셨습니다~!"
"아... 네~~!"
백광현 마침 문자를 받고 병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네~ 지금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현미래가 물었다.
"네~ 물리치료 받고 많이 좀 좋아졌습니다~"
"네~ 그래도 다행이네요. 며칠 푹 쉬시면서 치료받으시면 더 좋아 지실 거예요. 두통이나 어지럼증이나 구토 증상, 시야가 흐려진다거나 하는 건 없으세요?"
"다른 건 없고요..... 한 번씩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프긴 한데 조금 있으면 금방 좋아지긴 해요~"
"그건, 뇌진탕 후유증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는 한데, 그래도 증상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하니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또 뭐 다른 증상은 없으셨어요? 아님, 궁금하신거나....?”
“아뇨. 다른 건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궁금한 거도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어요.”
"네. 그럼 푹 쉬시고 내일 아침에 또 뵐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가다 현미래가 간호사분들께 얘기했다.
"오늘 백광현 님이 마지막 회진이었죠?"
"네~ 그렇습니다. 교수님~"
"그럼, 다들 일 보내세요~ 전 백광현 환자분이랑 잠시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아........ 네............."
그러허게 놀라는 간호사선생님들을 뒤로하고 현미래는 다시 백광현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똑! 똑!
'누구지? 뭘 두고 가셨나?'
"네~ 들어오세요~"
문이 스르륵 열리고 현미래가 들어왔다. 현미래의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있었다.
“백광현 환자분.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현미래의 달라진 분위기에 백광현은 잠시 주춤하면서 말했다.
“정말, 제가 기억이 나지 않나요? 아직도?”
“네. 죄송..합니다... 하지만.....진짜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 믿어...그건 아마 과거에 어떠한 사건 때문에 뇌가 광현이 너를 보호하기 지워 버렸을거야. ”
어느새 현미래는 백광현을 친구 대하듯이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눈물젖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광현아! 네가 나를 기억 못 해도 괜찮아. 다 우리, 아니 내 잘 못이니까! 그리고, 그 동안 힘들었을 널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 ㅠㅠ 근데, 그렇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건 좋았던 기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더 이상 네 기억 속에서 날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가지고 있는 우리 마지막 사진이야. 푹 쉬어. 잘 자고. "
그렇게 알 수 없는 말만 하고는 사진 한 장을 건네주고 현미래는 눈물을 훔치면서 가버렸다.
"어..............."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백광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현미래는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였다. 그러다가 현미래가 주고간 사진이 생각나 사진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자기와 현미래가 둘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우리 사랑 영원히~"
라는 글귀와 함께..............
소설 : 봄비 -제13화- 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