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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악어 다리

 숲속에 토끼섬이 있었다. 토끼섬은 폭이 십 미터 정도 되는 강을 건너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귀가 큰 분홍 토끼는 다른 사정 때문에 가족과 함께 토끼섬에서 떨어져 살고 있었다. 화창했던 어느 봄날, 엄마가 당근 수프를 포장하며 분홍 토끼에게 말했다.

 “얘야, 할아버지께 이 음식을 갖다 주고 오렴.”

 요사이 토끼섬에 홀로 사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엄마가 아침부터 음식을 준비했다.

 “네, 엄마!”

 분홍 토끼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곧장 토끼섬으로 향했다. 

 “얘야, 강가에 있는 악어를 조심해야 한다.”

 엄마는 분홍 토끼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다녀올게요. 엄마!”


 토끼섬과 마주한 강가에 도착한 분홍 토끼는 예전과 다른 강의 모습을 발견했다. 강은 바닥의 돌들이 물 위로 머리를 내밀 정도로 수위가 낮아져 있었다. 잠시 머뭇거린 분홍 토끼는 나무로 엮은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기 시작했다. 분홍 토끼가 나무다리를 거의 건너갈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끼야, 우리를 좀 도와줄 수 없겠니?”

 분홍 토끼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악어들이었다. 악어들은 물이 고인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토끼야. 지금 강이 계속 말라가고 있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대로 가면 우리 모두 죽을지도 몰라. 우리를 좀 도와줄 수 없겠니?”

 토끼는 혹시나 악어들이 무슨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강에서 안전하게 떨어진 곳까지 물러난 분홍 토끼는 악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악어들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분홍 토끼는 악어들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께 당근 수프를 갖다 드리고 상의드릴게.”

 “고마워, 토끼야, 꼭 부탁해!”

 악어들은 애처롭게 말했다. 분홍 토끼는 악어들을 뒤로한 채 서둘러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예요!”

 잠시 후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한눈에도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눈이 반달 모양이 될 때까지 웃으며 손자를 반겼다.

 집안에 들어온 분홍 토끼는 엄마가 만든 당근 수프를 할아버지에게 전달했다. 할아버지는 부엌에서 손자가 좋아하는 양배추 쿠키를 접시에 담아 왔다. 분홍 토끼는 쿠키를 먹으며 강에서 겪었던 일을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강에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토끼섬에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안건은 당연히 도움을 요청한 악어들에 관한 것이었다. 토끼들은 자유롭게 토론을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악어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줍시다! 그동안 악어들 때문에 강을 건널 때마다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두 아시잖아요?”

 “맞소, 악어는 우리와는 어울릴 수 없는 동물이에요. 어쩌다 저 강에 악어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때마침 하늘이 도와 강물을 말라버리게 하고 있으니 모른 척 내버려 둡시다.”

 처음부터 악어를 돕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줄을 이었다. 분홍 토끼 할아버지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하지만, 악어도 엄연히 우리 숲속의 동물입니다. 누군가 위험에 빠졌다면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악어가 난폭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은혜를 베풀면 그 보답을 할 것입니다.”

 토끼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악어를 몰라서 그러세요. 악어들이 고마워할 것 같으세요? 저 흉측한 피부를 보세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잖아요. 까칠까칠하고, 시커멓고 또 냄새나고. 암튼 저는 반대입니다.”

 “맞아요! 저도 반대입니다.”

 “옳소! 반대요! 반대!”

 이곳저곳에서 토끼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교장 선생님은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흠, 흠, 여러분, 진정하세요. 저도 여러분들 마음 잘 알고 있어요. 물론 악어는 사나운 동물이에요. 하지만 단정하지 맙시다. 저는 악어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악어들이 우리와 친구가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때 분홍 토끼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나도 교장 선생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에 하나 악어들이 은혜를 갚지 않는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악어의 관계가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다행히 악어가 우리의 친구가 된다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에 있는 악어들이 사라지면 또 다른 악어들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저 악어들을 도와줘서 평화를 만드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토끼섬에서 가장 존경받고 지혜로운 분홍 토끼의 할아버지와 교장 선생님의 설득에 토끼들도 조금씩 마음을 바꿨다. 결국, 토끼섬의 긴급회의는 악어를 도와주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음날 토끼들이 강가에 모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강은 심각하게 말라 있었다. 악어들이 모여 있는 웅덩이는 양이 더 줄어들어 간신히 꼬리 부분만 담글 수 있을 정도였다. 토끼들을 발견한 악어들은 이구동성으로 토끼에게 고마움을 전달했다. 

 토끼들은 곧장 강 상류로 향했다. 아무래도 가뭄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사흘 전에도 제법 굵은 비가 숲에 내렸기 때문이다. 강 상류는 하류보다 훨씬 폭이 좁았다. 그때 맨 앞에서 있던 분홍 토끼가 외쳤다.

 “여기요. 여기 보세요!”

 토끼들은 서둘러 분홍 토끼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엔 썩은 통나무와 나뭇가지들이 쌓이고 얽혀 강을 막고 있었다.

 “이건 비버나 수달이 만든 집은 아닌 것 같구나. 큰비가 내렸을 때 썩은 나무들이 떠내려오다 운이 나쁘게 저 바위들에 걸리면서 자연스럽게 둑이 된 것 같구나.”

 분홍 토끼 할아버지였다. 토끼들은 바로 썩은 통나무와 나뭇가지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무와 풀이 서로 뒤엉켜 단단하게 쌓였던 탓에 협동심이 좋은 토끼들도 한나절은 꼬박 치워야 했다. 

 강을 가로막았던 둑이 말끔하게 청소되자, 강은 금세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강 하류에 토끼들이 도착했을 때 악어들은 이미 좁은 구덩이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었다. 


 분홍 토끼는 며칠 더 토끼섬에 머물렀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분홍 토끼의 간호 덕분에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끼 마을에 큰 변고가 생겼다. 산불이 발생한 것이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어서 피해!”

 토끼들은 삽시간에 번진 산불에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불길은 거대한 악마의 입처럼 토끼 마을을 집어삼키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산불은 그 기세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빠르게 토끼들을 향해 다가왔다. 섬의 유일한 나무다리는 이미 불에 휩싸여 있었다.

 토끼들은 불길에 밀려 뒤로 또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결국 강기슭까지 몰렸다. 앞에는 뜨거운 산불이 거침없이 달려왔고, 뒤에는 깊은 강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수영을 할 수 없었던 토끼들은 불에 타서 죽거나 혹은 물에 빠져 죽거나 하는 두 운명밖에 없어 보였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토끼들은 껴안아 주며 서로를 위로해 주었다. 토끼들의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타들어 가는 나무 소리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토끼들아, 이쪽이야! 빨리 이쪽으로 와!”

 토끼들은 무작정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곳엔 악어들이 있었다. 악어들은 강을 가로질러 일렬로 몸을 연결해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어서 우리를 밝고 강을 건너!”

 토끼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어 다리를 밟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마지막 토끼까지 무사히 강을 건넌 토끼들은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악어들에게 말했다.

 “악어들아, 정말 고마워! 너희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

 악어들은 고개를 강 위로 내밀고 토끼들의 감사에 답했다.

 “너희가 우리를 먼저 도와줬잖아. 우릴 믿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데. 그때부터 너희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어.”

 분홍 토끼 할아버지와 교장 선생님은 뒤에서 토끼들과 악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온 숲을 삼킬 것 같았던 산불도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산불이 완전히 사라지자 토끼들은 다시 악어 다리를 건너 토끼섬으로 돌아왔다. 토끼들은 서로 힘을 모아 토끼섬을 빠르게 복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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