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을 기다리는 건 슬픕니다.
※ 이 글은 가족의 죽음과 그 직후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마음이 괜찮은 시기에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편은 읽지 않고, 다음 편부터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드라마에서 많이 봤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비명을 지르거나, 뛰어가거나, 우는 사람들. 자살 유가족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도 재연 배우가 애절하게 연기했다. 배우는 뛰어가서 이미 차가운 가족을 끌어안고, 울고, 살려보려 애썼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현관문 안전고리가 걸려 있는데,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는 집. 열쇠장수 아저씨가 문만 따주고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갔을 때, 이미 집 어딘가에 엄마가 죽어 있을 걸 알았다. 아빠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수화음을 들으면서 초조해졌다. 작은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어딘가에 가 있을 테니 정리되면 불러달라고 했다. 작은 아빠는 바로 간다고 거기 있으라고, 그리고 119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이제 와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내 속마음은 119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전화를 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엄마가 죽었다'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저기, 사람이 죽었는데요."
"엄마가요."
누가 죽었다는 건지 묻던 119 대원은 엄마가 어떤 상태인지 물었다. '쓰러져있다, 손목을 그었다, 매달려 있다, 숨을 안 쉰다' 같은 것을 듣고자 묻는 말이었을 것이다. 질문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답했다.
"음… 안 좋아 보이는데요."
119 대원은 더 이상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그냥 주소만 물었다. 방에 앉아서 누군가 이 집에 오길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쿵쿵거렸다.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렸다.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었던 걸까?
엄마의 시신이 흰 천에 덮인 채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작은 아빠가 막 도착했다. 그때도 나는 울지 않고 있었다. 대신 이후에 이 순간을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울었다. 어쩌면 엄마가 죽은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오래도록, 가족들 중 내가 유일한 엄마 마지막 모습의 배경으로 자리 잡은 역광의 목격자라는 게 슬펐다. 엄마 아빠는 이혼한 지 이미 10년이 넘은 부부였고, 외동이었으므로 나는 유일한 목격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지만 지나치게 외로웠다.
기다리는 동안 내 방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시신을 본 후 생길 수 있는 트라우마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장면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거나, 꿈에 나타나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을 겪진 않았다. 대신 다른 생각이 한동안 따라다녔다. '혹시 살릴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극적인 장면처럼, 발견한 그 순간이 사실 숨이 끊어지기 전이었고 내가 조치를 취할 틈이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닐 거다. 아니란 걸 아는데도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
방에 앉아있는 내게 경찰 아저씨가 물었다. 엄마에게 짐작 가는 사유가 있냐고. 엄마가 사귀던 분이 얼마 전에 죽었다고 말했다. 엄마가 죽었다고 말하는 건 어려웠는데, 그 아저씨가 죽었다고 말하는 건 쉬웠다. 그분도 스스로 돌아가셨다. 엄마가 얼마나 취약하고, 위태롭고, 누군가 필요한 상태였는지를 직접 겪고야 알았다.
많은 유족들은 경찰의 절차를 위한 질문이 힘들었다 말한다. 마치 피의자로 취급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유족들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다고 했다. 내게는 행운이 있었다. 경찰 아저씨는 "지금은 안 좋아 보이니 나중에 이야기하자"라며 방에 있는 나를 두고 다시 나갔다. 그게 그날 내 마음을 헤아려준 어른의 유일한 말이었다. 아빠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각자가 받은 충격 속에 우왕좌왕했다. 그 경찰 아저씨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다시 생각났다.
유서가 없는 경우 조사가 길어지는 것 같다. 엄마는 세상에 남아있는 딸을 위해 유서를 남겨두었다. 이후 경찰서에 다시 방문했는지, 아닌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아빠랑 같이 경찰서 문을 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흐릿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키우던 토끼의 죽음 이후는 그토록 생생한데, 중학교 3학년이 된 나는 위험한 건 빨리 잊었다.
긴 기간 트라우마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몇몇이 트라우마였구나라는 걸 안다. 트라우마는 괴로운 기억이 떠올라 힘든 게 아니라, 그 과거를 다시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목격 그 자체보다 누군가가 오길 혼자 기다리던 순간을 자주 반복해서 경험했다. 연인과 싸운 후 상대가 일부러 연락을 안 받거나 답장을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답장을 기다리면서 상대가 사고를 당한 건 아닐지 전전긍긍하고 화가 났다. 10년쯤 지나자 전전긍긍하더라도 화가 나진 않았다. 5년쯤 더 지나자 전전긍긍도 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죽고 혼자 남겨지는 꿈을 종종 꿨다. 이제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내 기다림은 금요일의 마음이다. 나 역시 주말을 기다리지만 금요일은 기쁘지 않았다. 장례식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월요일에 학교에 등교했다. 그러지 않았어야 한다. 금요일에 엄마를 보내고 토요일에 발인하고, 일요일에 집을 치웠다. 바로 그다음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고, 아무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 역시 아빠와 친척 어른들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왜 장례식이 3일이 아니라 2일 만에 끝나는지, 왜 이렇게 조용하고 몇 명만 빼고 아무도 안 부르는지, 왜 아무도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부르라고 하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내가 둘이 살던 집을 정리해야 했다. 짐 정리는 내가 했지만 사망신고나 엄마의 지인 명의로 되어있던 전세 계약 같은 것들은 아빠가 처리했다. 나는 어렸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이 나의 몫이었다. 다행히 곧 방학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누워서 웃으며 TV 예능을 봤다. 그때 울지 못했기 때문에, 1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렇게 쓴다. 다들 충분히 애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펫로스로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토끼를 키우고 싶다고 떼를 썼다. 엄마는 돈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게 토끼를 사줬다. 시장에서는 저렴하고 큰 집토끼들을 팔지만, 나는 비싸지만 더 작은 애완용 토끼를 가지고 싶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던 게 틀림없다. 작고 예쁜 애완 토끼를 사주었다. 토끼를 고를 때 몇몇 토끼가 나를 보고 폴짝폴짝 뛰었다. 뛰는 토끼들 뒤로 구석에 웅크린 털뭉치가 보였다. 귀는 검고 얼굴은 흰데, 눈 한쪽은 검은 무늬가 있는 얼룩 토끼였다. 웅크리고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 그 얼룩 토끼를 골랐다. 토끼는 금방 죽었다. 그때는 많이 울었다.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인 건, 그 작은 얼룩 토끼였는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다녀오니 축 늘어져 가만히 누워있던 작은 얼룩 토끼를 떠올리며 나도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오래 받은 후에야 엄마 이야기를 하며 울 수 있게 되었다. 상담을 받으면서 아내의 자살 직후 딸을 데리고 와서 오랜 기간 치료를 받게 한 다른 자살 유가족 이야기의 회복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한국의 자살률은 그대로지만, 16년 전보다 조금은 나아지긴 한 것 같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중요하다.
엄마가 죽고 10년쯤 지나자 '원스톱서비스'라는 게 생겼다. 자살 유족에게 지자체에서 초기상담과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경제적 지원 및 행정 절차 도움 등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한다. 유족이 직접 신청해야 하는 것 같아서 좀 아쉽지만, 그래도 예전엔 없었고 지금은 있다. 나는 여전히 금요일이 슬프지만 그래도 조금 덜 외로워졌다.
브런치북 『그 흔한 생존자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연재됩니다.
지금은 1부 「처음 겪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제게 위로와 응원이 되었던 말들을 전합니다. 글의 제목은 예고된 목차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