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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Nov 26. 2023

#60 목소리 - 시간을 뛰어넘는 영원의 달콤한 영역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를 읽고

<<다정한 서술자>>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우연히 가게 된 제주도에서, 함께 한 일행이 안내해 준 책방에서 아름다운 표지와 제목에 이끌려 사 들고 온 책이었다.


책을 열자 놀라운 이 펼쳐졌다. 어릴 적 소공녀 세라를 만났던 일, 아라비안나이트의 셰에라자드를 만났던 순간의 떨림을 끌어올려주었다. 어디서 나를 기다렸던 걸까? 이야기 속에서 느꼈던 떨림을 에로틱한 경험이라고 말해 준 사람은 '올가 토카르추크'가 처음이었다.


내 경험은 올가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이름을 받다. 올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그 공간을 'mundus adiumens'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공동의 저장소에서 끌어올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다정한 서술자'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을까?


올가: "내가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날 그리워할 수 있어요?

올가의 엄마: "때로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어.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되는 거란다."


<1960년대 후반 폴란드 서부의 시골 마을에서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 그러니까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이 주고받은 이 짧은 문장들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졌고, 살아가는 동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나라는 존재를 세상의 평범한 물질적 속성이나 인과 관계, 확률의 법칙을 초월한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의 달콤한 영역 가까이에 배치했습니다. 그때 나는 어린아이의 감성으로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세상에는 지금까지 내가 상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가 존재한다고. 그리고 설령 "나는 (거기에) 있지 않다.(Jes tem nicobecna)"라고 말하더라도 그 문장의 첫머리에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이상한 단어인 "Jestem",  즉 "(나는) 있다"라는 단어가 놓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2001년 6월에 둘째를 낳았다. 그전 해 2000년에 그 결혼을 접고 싶었다. 큰 아이만 답삭 들고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곳은 가난하고 심지어 무기력하고 오직 생존본능만이 무거운 안개처럼 시야를 막고 음울하고 낮게 깔려 있었다. 어쩌다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계속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손가락을 물어뜯고 싶었다.


나는 이유를 알 때까지 생각해야 되는 사람이었다.


얼떨결에 둘째 아이가 찾아오자 그 혼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 아이를 보면서 갖게 되는 양가감정은 내 도덕성과 인간이 갖는 존엄성을 훼손할 만한 가공한 위력을 지녔었다. 나는 내가 벌여놓은 일에 저항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몸은 병을 불러왔다. 큰 아이는 친정엄마에게 맡겨 놓고 일 년을 누워있었다.


둘째가 나이가 들고 말을 알아들을 무렵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는 별에서 왔어,,, 하늘에서 엄마와 아빠가 누나가 서로 다투는 걸 보고 아, 내가 빨리 가야겠다 하고 우리 집으로 쑤웅하고 날아온 거야..."


죄책감을 덜고자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가진 모든 사랑과 지혜를 어설프게 엮은 이야기였다. 아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다정한 서술자를 만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귀여운 둘째는 휴대폰에 이렇게 저장되어 있다.


"별에서 온 그대"





올가의 에세이에서 소개된 플라톤이 쓴 <<국가론>>의 한 대목이다.


<어쨌든 모든 영혼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했고, 제비 뽑기의 순서대로 라케시스에게 갔다. 이 여신은 각자의 영혼에 신령(즉 다이모니온)을 붙여 주었는데 인생의 수호자로서 영혼이 선택한 운명의 실현을 돕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나서 신령은 영혼을 클로토에게로 인도하여 우주의 축을 돌리는 그녀의 손을 통해 각자 선택한 운명을 확인하도록 했다. 영혼이 클로프를 만지고 나서 신령은 운명의 실을 짜는 아트로포스에게 영혼인도했고, 여신은 영혼이 선택한 운명을 되돌리지 못하도록 실을 잘랐다. 거기에서 영혼은 뒤돌아보지 않고 필연, 즉 아난케의 왕좌로 걸어갔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절규는 당연한 외침이다. 크게 소리 질러야 한다. 운명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올가는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작가가 되고, 크워츠코 계곡에 있는 집을 사고, 폴란드 남부의 유명한 성지인 밤비에지체에 갔다가 턱수염이 난 여성, 다시 말해 성녀 쿰메르니스 혹은 빌제포르타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고, 그 성녀가 과거루부터 자신, 그러니까 수도사를 불러내고, 내가 그 수도사를 브로우모프에 위치한 베네딕트 수도원에 배정하여 그로 하여금 마치 내가 우리 집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 보듯 크워츠코 계곡의 풍경을 청문 너머로 바라보게 만드는 순간까지 집요하게 기다린 것입니다.

이런 식의 진술이 이성적인 논증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결국 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오늘의 주제에 접근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보다는 우리 주변과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그리고 자신만의 다이모니온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외딴 시골로 이주해서 자연과 함께하는 삶, 그리고 고독이 우리 상상력을 키우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활동과 자극에 대한 한없는 갈망이 때로는 고유한 글쓰기에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또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중앙, 혹은 주류로부터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된 여행들. 내가 선택한 다양한 작업과 활동,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과 동물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이 모든 것이 내게, 나의 삶에, 그리고 나의 글쓰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당신의 운명은 무엇인가요? 당신에게는 다정한 서술자가 있나요?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잠시 인간세계로 공부하러 온 신들일지도 몰라요... 당신 안에서 당신에게 이러쿵저러쿵 속삭여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를 만난 적이 있지요? 없다고요... 아니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신이고, 신은 반드시 이야기를 하고 있답니다.


<문학은 놀라운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 특별한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우리를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이끌고 다른 방식으로는 누리지 못했을 새로운 경험에 동참하게 해 준다. -- 모든 종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이처럼 불가사의한 '읽기'능력을 획득했고, 덕분에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일정 시간 동안 정신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 어떤 인물의 가장 미묘하고 복잡하고 세밀한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또 다른 누군가의 앞에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 게다가 그 모든 게 실존 인물의 삶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건과 상황이 최적의 상태로 조합되는 순간에 깨어나서 자기 힘을 드러내는, 머나먼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비활성 유전자와 같은 휴면상태의 무엇입니다. 아니면 힐러리 맨텔이 묘사한 것처럼 지하 토굴로부터 솟아나는 목소리, 죽은 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표지, 기억, 집단 무의식,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유전자에 각인된 오래된 경험의 지층들. 어쨌든 그것은 스토리텔링에 능숙하며, 이야기와 그 파편들의 생성 과정에서 야기되는 모든 위험을 스스로 감지할 줄 아는 목소리입니다.>


<내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나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용어를 만들어 봤습니다. 도움을 주는 세계, 문두스 아디우멘스(mundus adiumens). 그 세계가 내 손을 잡고 나를 마치 마약의 황홀경에 빠진 듯한 경이로운 상태, 유쾌하지만 동시에 집요하며 통제하기 힘든 정신적 증세로 나를 몰아넣습니다. 그러한 상태는 중독성이 강합니다. 우리가 소설 속을 배회하는 여정에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다 지나갔다는 안도감을 맛보는 순간이 그토록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정신의 이러한 상태는 분명 축복받은 상태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는 평소에는 그토록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던 '나'라는 존재가 소설 속에서 여행하는 동안에는 조그맣게 몸을 웅크린 채 의식과 무의식의 격렬한 실재에 휩싸이고, 언어와 이미지의 바다에 기꺼이 몸을 담급니다. 그러고는 미로 속 어딘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목표물에 도달하기 위해 그것을 휘감은 실의 끝자락을 부지런히 쫓아갑니다.>


<신화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의인화되어 살아 움직이며, 생명의 맥박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기계적이고 무작위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열정과 헌신을 요구하는 세계, 다양한 존재들로 가득 찬 세계입니다. 또한 쪼개지거나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현실이기에 주체와 대상, 신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은 미묘한 대응 관계와 의미심장한 유대의 끈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는 혼돈과 혼란, 이것이야말로 작가에게 가장 큰 보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학적 인물'이라 불리는 이런 추상적인 존재를 향한 나의 감정을 사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상의 인물 혹은 설계된 인물에 대해 애정이 싹텄다는  사실 그 자체만 놓고 보아도 문학적 인물이 이미 구성을 완료해 자신의 경계를 명시했고 인간으로서 자질을 획득했으며, 존재론적인 지위를 확보해 창작자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셰이코의 기이하고 별난 사고방식은 내게 성공을 담보한 우호적인 상황(즉 행성의 배열)에도 어두운 면이 있을 수 있으며, 사실상 '성공'이나 '실패'와 같은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당신의 운명을 휘감은 실을 따라서 쫓아가고 있나요?

오늘을 살아가는 그대여! 괴로운가요...?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해요.

아, 글을 쓰는 그대여! 힘이 드나요...?

그렇다면 설탕필요한 순간이군요.


올가가 다정하게 말해주네요.


<때로는 이 대목을, 때로는 저 대목을 넘나들었고, 이미지에서  대화로, 설명에서 메모로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며 플롯을 만들고, 캐릭터를 설정하고, 혼돈 속에서 이야기를 완성했습니다. 이럴 때 꼭 필요한 것은 지칠 줄 모르는 낙관주의입니다. 이는 종종 과대 평가되는 재능이나 성실성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자~~~ 이제 내 안의 다정한 서술자를 만나러 가요. 힘이 드는 오늘, 우리의 운명은 서술자가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는 여행 중 우리를 잠에서 깨우기 위해 만든 장치일 수 있어요. 믿어보아요, 내 안에서 속삭이는 서술자의 빛나는 직관과 다정한 토닥임을 말이에요.


이미 당신의 행복은 다 준비되어 있어요. 정말이에요. 당신과 함께 운명 너머의 그곳, mundus adiumens로 떠나고 싶어요. 이제 가방을 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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