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달리기를 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
- 요가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루키는 자주 달리는 이야기를 했다. 에세이에서 인터뷰에서 소설에서도 종종 달리는 장면이 그려진다. 1987년 그가 <<노르웨이의 숲>>을 발간하고 유명해진 그때, 36년 전 우리나라에는 달리기 문화가 없었다. 아니, 운동문화가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몸을 많이 쓰고 살던 시절이었고 가난했던 터라 굳이 배 꺼지게 운동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활동적인 어머니들은 에어로빅 같은 걸 하셨고 남자들은 헬스를 조금씩 한 것 같다.
지금은 운동이 젊은 세대에서 중장년 층까지 꼭 필요하다는 의식이 일반적이다. 육체보다 정신적 고통이 많은 시절이라 운동이 필수인 것 같다. 그 '스트레스'라는 게 형체도 없고 원인도 애매하고 혹여 이유를 안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 경험으로는 운동이 가장 좋은 약이 되었다. 뛰다 보면 숨이 차서 헐떡거린다. '아... 악... 죽지 않겠냐...' 이런 생각이 들면서 조금 전에 그렇게 걱정되던 아이 생각이나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일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냥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와 훅훅 뱉는 호흡 소리만 남았다. 간혹 허벅지나 종아리가 당기기도 했지만 주로 호흡이 거칠게 가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순간을 견디고 계속 뛰다 보면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호흡과 나만이 세상에 있었다.
숨은 조금 거칠지만 머릿속이 텅 비고 몸도 텅 빈 듯하다. 하늘 위 구름을 보면서 저 구름처럼 생각이 일어나고 걱정을 만들고 사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았고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상한 상태를 경험한다. 이런 순간을 에고가 사라지는 경험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 비일상적인 경험은 강렬하고 대체불가한 것이라서 다시 운동화끈을 묶고 밖으로 가게 만든다. 그냥 기분이 들떠서 좋아지는 일들과는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책 속에서 하루키는 100km 뛰던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왜 100km를 뛰고 싶어 졌을까...?
나는 요가 자세 중 드롭백을 하고 싶다. 물론 컴업도 하고 싶지만 우선 드롭백부터 성공시키고 싶다. 예전에는 '저런 곡예를 왜 하지... 내가 왜?... '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런 쓸데없는 짓을...' 뭐 이런 야무진 오해를 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드롭백이 하고 싶어 졌을까...?
20대에 하루키 에세이를 읽으면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던 30대 초반에 남편이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왜 그따위 짓을 하냐고 화를 냈다(그때 마라톤하던 중년이 사망하던 사고가 있었다). 걱정이 많던 나는 혼자 아이 키우는 상상을 하고 펄쩍 뛰면서 말렸다. 덕분에 남편은 20km 하프만 뛰었고 풀코스는 여태 못 뛰었다. 그때 뛰게 해야 했는데!
드롭백을 하려면 머리를 뒤로 꺾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어려움이 시작하는데 나는 머리 뒤쪽 근육을 잘 쓰지 못한다. 그리고 양쪽 날개뼈 사이의 근육을 잘 모아서 머리를 받쳐주어야 하는데 당최 힘을 쓸 수 없다. 발바닥은 바닥을 잘 밀어내면서 골반를 받쳐주어야 한다. 특히 엄지발가락은 바닥을 지지하면서 허벅지 안쪽 내전근을 타고 올라가서 힘을 써주어야 한다. 꼬리뼈 아래쪽 뒷골반은 열심히 계속 가운데로 모아야 한다. 뒷골반이 기준점이 되어 천골을 타고 척추의 흐름이 시작된다. 척추는 유연한 커브를 그리면서 뒤로, 아래로 부드럽게 하강해주어야 한다. 이때 척추는 머리통의 무게와 양쪽 팔의 무게를 견디어야 하는데 이게 만만치 않다. 우리 몸 중 머리가 가장 무겁다. 그리고 머리가 골반과 수직 라인이 아닌 채 골반을 앞으로 밀면서 뒤로,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흔히 할 수 있는 몸짓이 아니다. 팔 또한 그렇다. 팔을 위로 뻗기도 힘든데 뒤로 보내서 바닥을 짚어야 하다니! 몹쓸(?) 동작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자. 머리는 항상 심장보다 위쪽에 위치한다. 심장이 머리로 피를 보내려면 힘차게 중력을 거슬려 혈액을 보내야 한다. 중요한 머리가 가장 위쪽에 있어서 몸은 열심히 일한다. 네발기기에서 직립보행에 성공한 대가라고 할까? 그래서 시르사사나(물구나무서기)가 요가의 왕이라고 하는 것 같다. 드롭백을 할 때 머리를 목에 딱 붙이고 골반을 살짝 밀고 허벅지 안쪽을 꽉 모으면서 팔을 위로, 뒤로 뻗는다. 서서히 내려가면서 목을 뒤로 떨군다. 심장보다 머리가 아래쪽으로 위치한다. 팔도 난생처음 뒤쪽 방향으로 심장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심장과 혈관은 생각할 것이다. 오늘 혈액 보내기 좋다. 그런데 허벅지와 복근, 골반저근, 횡격막은 생각할 것이다. 오늘 왜 이런 걸 어려운 걸 시키냐..
이런 힘든 자세를 6개월 동안 연습했다. 얼굴이 아주 좋아졌다.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지인들도 그렇다고 한다. 살이 붙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얼굴 소근육들이 변하고 있다. 후굴을 하면 심장에서 얼굴 쪽으로 혈액이 툭 떨어진다. 낙하하듯 얼굴 쪽으로 혈액이 툭 몰리면 몸은 조금씩 다른 일을 한다. 투덜대던 허벅지 안쪽 근육들도 변하고 있다. 걸을 때 사용하는 엉덩이 근육이 달라지고 있다. 평생 써보지 못한 허벅지 안쪽 근육, 골반저근, 갈비뼈 주변근육을 쓰고 있다.
이건 대! 단! 한 일이다. 근육을 움직이는 건 뇌의 신경망이라던데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근육을 쓴다는 건 쓰지 못하던 뇌를 사용하는 일이다.
하루키의 하루는 똑같다고 한다. 오전에 달리고 오후에 글을 쓴다고 한다. 거의 매일 달린다고 한다. 그가 말했다. 소설은 진입장벽이 낮은 예술분야라서 시작하기는 쉬운데 오래 지속하는 게 힘들어서 십 년을 유지하면 아주 잘하는 거라고... 예술이란 게 워낙 어렵고 '적당히'라는 게 통하는 분야가 아니라서 하루키는 작가라는 직업을 잘 유지하는 수단으로 달리기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는 영리한 사람 같다. 달리기는 기술이나 기교보다 성실히 매일 같은 시간에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실함과 반복이 더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중년층에게 적합한 운동이기도 하다.
요가하는 사람들을 요기라고 한다. 요가선생님들은 나이 들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요가는 자기 신체의 한계점에서 고통을 견뎌야 한다. 산통과 비슷한 느낌이다. 가끔 힘든 수련을 한 날은 '애를 또 낳았다'라며 깊은 숨을 토한다. 그런 고통을 견디어 낸 사람의 노년은 몸도 마음도 가볍지 않을까?
즐거움이란 게 맛난 걸 먹고 좋은 사람이랑 짝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고 친구를 만나는 게 전부인 세상도 있었다. 중년이 허망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렇다. 그 재미있던 것들이 다 시들시들하게 느껴진다. 나는 떨어진 낙엽처럼 공기 중에 흩날리는 것 같다. 열심히 살았고 잘 살았는데 왜 이런지 의아하지만 까닭 모를 눈물이 흐르는 순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지금껏 하던 것 말고 다른 즐거움을 찾아야 되는데 그게 여간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 이렇게까지 하고 살아야 되나(드롭백까지 하고 살아야 되나, 100킬로까지 뛰고 살아야 되나...)라는 생각이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번번이 끌어내린다.
꼭 해야 되나?
그렇지! 꼭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잔소리할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경우도 많고, 잔소리가 무서운 나이도 아니다. 내 맘대로 해도 말릴 사람도, 말려 줄 사람도 없다. 그게 더 무섭다. 오직 나만이 나를 말려 줄 수 있다. 오직 나만이.
그런데 말리는 나와 말려지는 나는 도대체 하나인가 둘인가? 왜 이렇게 한 몸 안에서 요동을 칠까...
이런 물음을 선문답처럼 잡고 하루를 버틴다. 그런 날 원장님 핸즈온으로 드롭백을 하고 우르드바를 하고 숨을 헐떡이며 매트에 등짝을 댄다. 머리는 고요해졌다. 귀에 꽂히는 최성수의 노래(힘들다고 원장님이 틀어주셨다)는 '가슴'으로 들어온다. 텅 비어서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라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순간 알아차린다. 그 순간, 찰나는 짧고 강렬한 불꽃처럼 왔다가 가버린다. 아쉽기 그지없다. 그 순간을 붙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매트를 말고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고 밥을 먹는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사실을 그 반짝이는 순간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매 순간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가 반짝이지 않아서 슬픈 게 아니라 매 순간 그럴 수 없음이 아쉬울 뿐... 우리 모두는 언제나 반짝이고 있다. 그걸 잊지 않으려고 다시 달리러, 드롭백을 하러 간다.
영리한 하루키처럼 달리기도 하고, 요가도 한다.
#하루키#달리기#드롭백#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