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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Mar 17. 2024

# 해우소 이야기

 지난 2월 넷째 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산에 다녀왔다. 산중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휴대폰 볼 틈이 없었다. 일요일에는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거창하게 먹었다. 좋아하는 버드와이져와 삼겹살을 양껏 먹었다. 먹자마자 침대에 누워 폰을 오른손에 잡고 지켜 들었다. 왼손으로 혹은 오른손가락으로 위로, 위로 화면을 밀었다. 화면은 빠르게 위쪽으로 사라지면서 새 글과 사진이 나타났다. 잠시 뒤 속이 울렁거리고 미쓱거렸다. 이런 적은 없었다. 폰을 침대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이 어지러웠구나!!!'


 늘 하던 일이라서 감각이 둔해졌지만 눈과 몸은 고통스러운 게 분명했다. 우리의 공허와 우울은 초 단위로 넘겨지는 휴대폰 화면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산속 하루는 이랬다.

 4시에 일어난다. 적당히 세수를 하고 4시 30분 새벽 예불을 드린다. 예불은 한 시간 넘게 이어진다. 집에서는 백팔배와 경전 읽기와 서원을 낭독하는데 오분향예불문과 반야심경까지 한다. 도반과 함께 해서 집중이 잘 됐다. 예불 각자에게 주어진 새벽 일감을 하는데 나는 부엌일을 많이 했다. 그날 장만해야 할 음식재료를 다듬었다. 그리고 문수방에서 아침공양을 한다. 문수방은 슬레이트지붕을 얹은 60-70년대 시골집구조였는데 방 바깥쪽에는 툇마루가 붙어있다. 툇마루는 걸을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났는데 성치 않은 내 관절 같았다. 그 마루를 통해 왼쪽으로 백화암, 오른쪽으로 보현방이 있었다. 문수방에는 잠시 일을 도와주러 온 객(客)들이 잠을 잤고 보현방은 절에서 상주하는 행자들의 거처였다. 행자들은 각자 자신의 연꽃을 품고 백일 또는 49일 동안 머물고 있었다.

 아침 공양 시간에 흰머리 곱게 세신 비구니노스님께서 상석에 앉으셨다. 할머니 생각이 나서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행자들은 스님 옆에서 다정히 말을 건넸다. '내가 할머니에게 저렇게 했나'라는 생각에 눈물을 글썽였다. 잠시 쉬었다가 주어진 일감에 따라 점심공양을 준비하거나 도량(수련원 전체)을 정비했다. 점심 공양 후에는 이 일정이 반복되었다.


  

 도량에 도착한 수요일 오후였다. 코로나 검사를 하고 짐을 풀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은 숙소에서 계단 20칸 정도를  내려가서 왼쪽으로 6-7m 걸어가야 했다. 푸세식이었는데 바닥은 사람키 두 배정도로 깊었다. 벽은 나무를 잘라 얽기 설기 엮어놓았다. 엉덩이를 까고 쪼그리고 앉았다. 시선이 가는 자리에 자그만 창이 있었다. 잎을 떨군 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들이 수묵화처럼 펼쳐졌다.


'아! 역시 이 맛이야...'


하는 감탄과 동시에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차가운 산 바람이 엉덩이를 때렸다.


'아이코,,,'


용변을 보기 힘들었다.



 

 씻고 기도하고 먹고 일하고 다시 씻고 잠을 잤다. 문수방에서 요를 깔고 그 위에 개인 침낭이나 이불을 덮고 잤다. 18명에서 20명이 같이 잤다. 첫날은 옆사람이 신경 쓰여 한숨도 못 잤다. 먹는 것이 달라져서 배에 가스가 많이 찼다. 참기 힘들어서 한밤중에 살금살금 화장실로 갔다. 쪼그려 앉으니 엉덩이가 너무 시렸다. 아랫배에 힘주고 앉아 있는데 눈물이 찔끔 나왔다. 용변 보는 일이 고난과 시련이었다. 실패하고 얼어버린 엉덩이를 감추고 천천히 방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방 다른 이가 깰까 봐 살금살금 걸어갔지만 누군가는 잠이 깼을 것이다.

 

 목요일 오전 10시 장화를 신고 두꺼운 비닐 작업잠바를 걸치고 제설작업을 했다.  우리 조는 문수암에서 대웅전 가는 길을 뚫어야 했다. 4명이 한 조는데 젊은 남자 행자가 앞장서서 눈을 밀어냈다. 우리는 그 옆을 밀어서 사람이 지나가기 좋게 길을 넓였다. 눈은 25cm 넘게 쌓였다. 보슬한 백설기 같았는데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눈이라고 했다. 백설기 같은 눈은 눈사람은 잘 만들어지고 삽질은 힘들었다. 오전 내내 수련원의 모든 사람들이 길을 만들었다. 삽질을 하면서 '악' 소리가 저절로 났다. 이러다가 허리가 끊어지나 생각했다. 눈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련원 입구 큰 나무가 무게를 못 견디고 넘어지면서 전봇대를 덮쳤다. 전봇대는 뚝 부러져 두 동강 나버렸다.


 씻고 먹고 자는 모든 일상이 불편했다. 힘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첫날 비닐 장판 위를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헛돌았다. 둘째 날 눈을 치우는 삽질에 허리가 버텨주면서 방바닥을 밟는 걸음마다 힘이 들어갔다. 몸이 가벼워지니 가슴은 저절로 활짝 열였다.

 저녁에는 모여서 공부를 했다. 그곳은 마음이 저절로 열리는 공간이었다. 도저히 할 수 없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가슴 아픈 트라우마가 도반 사이에서 울다가 웃으면서 흘러나왔다. 그날을 더듬어보면 저릿하게 아프다가도 알아차리고 슬쩍 웃을 수도 있었다.





 머릿속 생각은 늘 무언가를 쫓아가느라 바쁘다. '이걸 해야지! 저건 안 돼! 이건 좋은 거야, 저건 나쁜 거야!' 동시에 무언가에 쫓긴다. 일을 할 때는 일에 빠져버린다. 내가 일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끌고 한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허전하고 무기력하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돈다. 생각은 자꾸만 무언가를 그려낸다. 그 생각들이 나를 잡아챈다.


 그곳 수련원에서는 생각이 멈추는 순간을 자주 만났다. 감정이 멈추고 생각이 멈추고 오직 감각만이 느껴졌다. 감각은 감각일 뿐 거품처럼 확장되지 않았다. 그 찰나, 그 고요는 지극히 평안했다.

 내가 머물던 수요일 밤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계속 눈이 왔다. 신이 있다면, 그분이 있다면 나에게 선물을 보낸 게 틀림없다.  툇마루를 밟으며 그림 같은 산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산을 바라보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가장 좋은 날이었다.




 



 

 #일요일 #해우소# 설경#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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