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별 Mar 18. 2024

#2024. 3.18. 일요일 낮 맥주.

어제는 일요일이었다. 토요일에 일정을 빡빡하게 짜서 할 일을 다 했다. 빨래도 했고 집 청소도 했고 장도 봐서 냉장고도 채워놓았다. 쉴 준비가 되었다. 


냉장고 문을 여는데 남편이 사놓은 호가든이 보인다. 시간은 일요일 오후 2시, 맥주 마시기 좋은 시간이었다. 호가든은 보리에 밀을 섞어 만든 맥주이다. 밀맥주 중 블랑과 호가든이 맛이 좋다. 블랑은 과일맛 꽃향이 난다. 꽃이 활짝 피는 4월, 블랑을 마시면 정원에 핀 꽃을 먹는 것 같다. 맥주와 꽃이 한 자리에 있으면 천국의 맛이다. 봄 내내 블랑을 마신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그 향이 물린다. 그럴 때는 버드와이져를 마신다. 버드와이져는 라거 계열 보리맥주라고 한다. 맛이 깔끔하다. 탄산수에 맥콜(80년대 보리 음료)을 조금 넣은 맛이다. 음료수인 척하는 맥주인데 캔보다 병이 제맛이다. 병을 손에 잡고 병째로 마시면 간지가 철철 흐르는데 요새는 자꾸 흘려서... 듀라렉스 160ml 물 잔에 따라 마신다. 물 잔 가장자리가 얄쌍해서 입술이 닿는 감각이 좋고 흘리지 않는다.  


나는 수음체질이라고 들었다. 차가운 걸 먹으면 변이 묽어지면서 먹은 걸 허무하게 흘려보내야 한다. 살을 찌울 수 없는 몸이다. 단점은 뭘 먹어도 장에서 흡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몸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자주 드는데... 버드와이져를 좋아하지만 계속 먹지 못한다. 몸이 힘들다. 운동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달리기 속도가 느려지고 요가 아사나를 완성하지 못한다. 


버드와이져는 애인 같은 맛이다. 오래 만나면 위험하다. 반면 호가든은 배우자 같다. 30년 넘게 봐서 뜨뜻미지근하고 '또, 또 저런다'는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하지만 자식 이야기를 할 때, 친구 흉을 볼 때, 밖에서 만난 사람에게 마상(마음의 상처)을 입었을 때 칭얼거릴 수 있는 안전한 대상이다. 호가든도 그렇다. 블랑은 목구멍에 걸려 안 넘어가고 버드와이져는 배가 아플 때 '그래, 내가 갈 곳은 너밖에 없구나'하고 찾는다.


어제 일요일 오후 2시 호가든 큰 캔을 따서 천천히 마셨다. 햇살은 따뜻하고 마음은 조용했다. 맥주가 천천히 온몸으로 퍼졌다. 기분도 조금씩 들떴다. 침대에 대자(大字)로 누워서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몸을 맡겼다. 


 올해도 봄이 오는구나.

 나도 봄이다. 

 너도 봄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2024. 3.16, 봄 토요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