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언니 A는 25살에 크로키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스타일이 아주 좋고 차분한 언니는 엄마 얼굴을 닮았었다.
첫눈에 알아보고 엄마를 강하게 투사한 것 같다.
삶은 투사...
언니와 함께 한 일은 아주 아주 많다. 함께 한 이야기도 아주 아주 많다.
함께 명상을 했고 함께 절 봉사를 했고
함께 남편 흉을 봤고, 시댁 이야기를 격의 없이 했다.
언니는 독보적인 습관이 있다.
'시간치'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기다리게 한다.
늦게 나와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미안해하지도 않다.
그냥 아무 일 없는 얼굴로 나온다.
명상을 하러 갈 때도 언니 집 앞에서 기본 10분에서 20분까지 기다린 것 같다.
누가 기다릴 때 마음이 불편하지 않나 봐...
나는 은근히 잘 견디는 편이다. 내가 늦는 건 싫지만 상대가 늦는 건 그런가 보다 하는 편이다.
남편과 연애할 때도 타지에서 오는 남편을 잘 기다렸다.
여동생이 아직도 안 나갔냐면서 나를 좀 한심하게 보던데... 왜 그렇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요사이 드는 생각은 이렇다.
인간관계는 약간의 기싸움이란 게 있는데 나는 그걸 일찌감치 포기하는 스똬일...이구나...
호구와 생각 없음의 경계를 넘나 들고 있구나...
이마에 열이 오른 이유는 이렇다.
언니가 경주에 봉사를 가야 되는데 고속도로 운전하기가 무섭다고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언니의 운전이 좀 와일드하고 안전감각이 나와 달라서였다.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책방 모임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역시 언니는 시간 약속을 하지 않는다. 오전에 출발하자로 통화를 맺는다. 스타일 아니까 그냥 내가 그 전날 카톡 했다.
'언니~~ 우리 내일 몇 시 출발이에요?'
'응.... 9시 즈음...'
'음음... 9시에서 9시 30분쯤...'
약이 살짝 오르기 시작했다.
'어이구... 대기하다가 부르면 나가야 되는...'
어찌어찌 일은 진행되었고 오랜만에 참가한 경주 봉사는 행복했다. 잘 가꾸어진 꽃밭도, 키가 훌쩍 자란 느티나무도 좋았고 함께 먹은 국수는 일품이었다.
몇 주 있다가 화요일에 시간이 생겼다. 경주 봉사를 신청했다. 다행히 A언니는 신청하지 않았다. 속으로 좋아했다. 그런데 아침에 카톡을 보니 나는 A언니랑 같은 차로 편성되어 있었다.
오전 7시 50분에 동네 맥도널드에서 만나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텀블러에 담고 은행 ATM기에서 현금을 찾고(운전 봉사자에게 차비를 드린다)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전 날 비가 내려 맥도널드 야외 의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같이 가기로 한 B언니는 벌써 나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기다렸다. 잠시 뒤 전화를 받은 B언니는 A언니가 좀 늦는다고 전한다. A언니가 자기 가게에 들렀다가 온다고 한다.
화가 조금씩 오른다. 왕복 20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 있었다. A언니는 약속시간에 집을 출발해서 자신의 가게로 향한 것 같았다.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나는 B언니에게 매장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고 말했다. B언니는 안된다고... C언니가 왔다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냐고 단호하게 말했다.(카톡 하면 되는데... 전화해도 되고...)
이 쪽 봉사는 처음인 나는 얌전히 말을 들었다. 20분을 서서 기다렸다. 기분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저쪽에서 하얀 차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문을 내린 언니는 우리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보통은 주차구역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봉사자들을 태운다. 언니는 드라이브쓰루 차가 빠져나가는 라인에 차를 턱 하니 세우고 우리를 쳐다봤다. 우아하게... 당황한 우리 세명은 허둥지둥 차에 오른 (뒤에서 누가 빵빵할까 봐)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 나... 맥도널드... 한 바퀴 돌았닷!!!"
맥도널드 정문 앞에서 세 명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언니는 우리를 못 찾았다고 말문을 뗀다. 늦게 나타난 사람의 첫마디는 아주 강렬했다. 그리고 늦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 나 졸렬해지고 싶다.'
약속할 때마다 기본 20-30분씩 늦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자기 볼일을 다 보고 아주 편하게 사람을 만나러 나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힘들다....
#시간 약속#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