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랑

통증

by 보리별

어릴 때부터 통증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 운동회를 하면 달리기는 꼴등이었다. 아버지가 '*희는 껑충 껑충 이상하게 뛴다'고 놀렸다. 보통 6명이 달렸는데 1,2,3 등은 경품으로 공책을 받았다.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들은 학년 계주에서도 상을 받아서 공책을 가득 들고 의기양양했다. 6학년 때 딱 한번 3등 안에 들어서 공책을 받았다. 몹시 기뻤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무줄놀이를 잘 못했다. 동작을 따라할 수 없었다. 우리 시절에는 고무줄을 못하면 살짝 이상한 아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자치기도 많이 했는데 땅에 구멍을 살짝 파고 작은 작대기 하나 올려고 긴 작대기로 작은 작대기를 쳐올려서 멀리 보내는 놀이였다. 한 번도 작대기를 띄우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몸이 이상해서 경대병원을 갔다. 병명을 알 수 없었고 가끔 이런 아이들이 온다고 했다. 몸에 힘을 주기 어려웠다. 운동장에서 조금 뛰면 힘이 빠져서 교실로 돌아오곤 했다. 병원 약이 과했는지 정신이 몽롱했다. 나와 세상 사이에 얇은 막이 있는 기분이었다. 원인을 모른다는 병은 불안을 키웠다. 의기 소침해면서 혼자 공상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병이 재발한 건 대학 4학년 때였다. 13살과 23살, 이 병은 10년 단위로 생기나...라는 생각을 했다. 걸을 수가 없었다. 15분을 걸으면 힘들어서 누워야 했다. 책상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다들 졸업하고 일을 하는 시절에 속절없이 앓았다. 방에 이불을 펴고 자고 또 잤다. 끙끙 거리며 앓다가 2년 정도 동네 화실에 다녔다. 그때 사진을 보면 얼굴이 허옇게 떴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대학 친구들 모임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날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집에 고립되어 있으니 우울감이 있지 않았을까...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니 세상을 보는 눈도 사람을 보는 안목도 없이 세월만 보내 시절이었다. 막연한 공상과 통증에 대한 두려움, 두 세계를 넘나 들었다. 그래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둘 낳았다. 둘째를 31살에 낳았는데 다시 몸져누웠다. 1년 정도 누워만 지냈다. 큰 아이는 친정 엄마에게 맡겨 놓고 둘째 아이 우유만 간신히 주었다. 내 병이 베체트라는 걸 알게 된 거는 서른 다섯 즈음이었다. 여동생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그 병이라고 했다. 증상은 달랐지만 같은 병이었다. 덤덤한 척했지만 무서웠다.


어쩌다 우연히 요가를 하게 되었다. 둘째 아이가 9살이었다. 매트 위에서 땀 흘려 몸을 쓰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2010년에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한국나이로 예순다섯이었다. 병실 베드 앞에는 환자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었는데 '나이 63세'라는 숫자가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할아버지도 일흔이 넘어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당시 90세가 넘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끔 '나도 오래 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아는 지인에게 한의원을 소개받았다.

베체트라고 이야기하니 "이름 붙이니까 베체트지"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독특한 진료방식이었다. 치료받은 지 일주일 만에 어깨가 편안해졌다. 의사는 식단을 강조했다. 그리고 달리기를 하라고 했다. 식단은 밀가루, 식용유, 진간장을 끊는 방식이었다. 식단과 운동을 병행하면서 몸은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운이 좋아서 좋은 의사를 만난 덕분이었다.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작동했다. 우리는 내가 해내야 할 일(성과), 혹은 주변 사람들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하지만 '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과 사람과 나라는 사람도 '몸'을 기반으로 하는 것들이다. 몸에서 시작돼서 몸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식이요법을 하면서 제일 힘든 것은 두 가지였다.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와 통증이었다. 먹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증상이었고 통증은 의외였다. 통증은 이상하게 전개됐다. 매일 아팠다. 식단 하기 전 통증은 전신을 누가 무겁게 누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온몸에 힘이 없는 상태였다. 식단 할 때 통증은 누가 중강도로 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살짝 툭 치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대차게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묵직한 모래주머니로 툭 툭 때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소나 짐안일을 할 때 몸이 가벼워서 움직임이 편안했다.


이걸 뭐라고 이해해야 되나...

몸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내 몸이지만 처음 느끼는 어떤 감각이었다.


식이요법 이전, 몸에서 통증이 생기면 생각은 이렇게 일어났다. '시작이다. 이번엔 또 얼마나 갈까... 걸을 수 있을까... 몸져누우면 어떻게 하지...' 마음은 두려움을 건너 공포에 휩싸인다. 몸은 딱딱하게 굳고 긴장된다. 통증의 시간이 길어지면 점점 무력해지면서 마음은 울적해진다. 눈동자는 조금씩 풀린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는다. 몸과 마음은 이런 반응을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침몰하는 배처럼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식이요법 중에는 이랬다. 무거운 것이 몸을 두드리는 듯한 통증이 일어난다. '아... 아프다... 애들 아침은 줘야지...' 몸을 일으킨다. 억지로 발을 뗀다. 생각이 더 커지지는 않는다. 아침을 차려주고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빨래거리를 세탁기에 넣는다. 외출하는 날이면 외출 준비를 하고 집에 있는 날이면 청소기를 돌린다. 그러다가 생각한다. '아, 오늘 일어날 때는 힘들었는데 움직이니까 훨씬 몸이 풀리네' 그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움직임의 세계로 들어섰다.


최근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나는 늘 목이 뻣뻣하다. 후굴 동작을 할 때도 경추 쪽의 뻣뻣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움직임에 지장 줄 정도는 아니다. 운동도 해내고 일상도 잘 한다. 지난주 월요일 밤 10시에 치킨집에서 여가원회식을 했다. 회원 중 한 분이 드롭백과 컴업을 성공한 기념이었다. 치킨과 맥주라니... 이게 몇 년만인가? 치킨을 양껏 먹고 맥주도 평소 주량(300cc)을 넘겼다. 1000cc정도 마신 것 같다. 다음날 일어나니 목이 뻐등뻐등했다. 오전에는 목이 좌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할 일을 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 수요일 오전에도 목이 풀리지 않았다. 수요일 오전 수련에 참가했다. 서서 하는 후굴을 쉬는 시간 없이 10여차례 했다. 목이 조금 풀렸다. 목요일 아침에도 목은 여전히 깁스를 한 것 같았다. 통증이 있어도 부정적인 마음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목이 내 염증을 잡아주고 있는 걸까?'


번개처럼 지나가는 생각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통증에 대한 생각이 변한 거였다. 통증은 나를 힘들게 한다는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그 생각이 옳은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수용하고 있었다.


뇌는 몸에서 가장 중요하잖아

지금 몸은 월욜에 먹은 술과 치킨에서 생겨난 염증을 밀어낼 힘이 없어.

그래서 목 아래쪽에서 뇌로 염증이 올라가는 걸 막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작업이 통증을 일으키고 있지 않을까.

통증은 신호야.

가장 소중한 뇌를 보호하는 작업이지, 최전선에서 목이 충실하게 임무를 하고 있구나


이런 뇌피셜이 쏟아졌다.

이게 맞는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생각 이후 틍증은 고마운 존재가 되어갔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심각한 장애가 아닌 경우 이렇게 생각하는게 속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4일이 지나니 목은 편안해졌다.


그래서 내린 오늘의 결론은 이렇다.


통증 자체가 아니라 통증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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