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고, 많고 싶지 않고.
평소에 사람을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니다.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라는 선택지가 감사할 정도로 혼자 있는 게 편하고 또 좋은 사람이다. 집에 혼자 있을 때의 루틴은 거의 똑같다. 책 읽기, 영화 보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 청소 하기. 내게 '뭐해?'라고 물었을 때, '뻔해. 맞춰봐'라고 답하면 상대가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을 정도이니 말이다.
주로 하는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해석하고 분석하고 아주 깊이 들어간다는 것. 단 한 명의 타인이라도 옆에 있을 때엔 할 수 없던 생각들이 혼자가 되면 이때다 싶어 쏟아져 나온다. 마치 헨델과 그레텔이 그랬던 것처럼 그 생각들을 주워가며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을 향해 발걸음을 하나 둘 내딛는다. 꽤 오랜 시간 그 길을 걷고 또 걸었고 익숙해졌다.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회사 면접 과정에서 들었던 말.
"술 안 마시고 이런 이야기 하니까 이상하다"
커피를 마시며 한 지인에게 들었던 말.
'내가 너무 버거운 이야기를 하는 걸까' 생각했다. 이전에는 딱히 깊거나 무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물론, 다수와 있을 때엔 적당히 가벼운 이야길 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사실 그렇지 못했던 소수의 경우가 떠오르긴 한다.) 그러나 누군가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더 익숙하고 깊고 긴 문장들을 내뱉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내뱉다가는 '아차'하고서 이야길 멈춘다.
진지충이라는 단어를 보거나 들을 때면 불편하다. 그게 나와 타인 중 누굴 향하는지는 상관없다. 언제부터 진지함이 웃음거리가 되었을까. 나는 왜 진지함을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걸까. 언제부터 우리는 벌레가 된 걸까. 생각은 끝이 없고, 여전히 얼마나 진지해야 하고 진지하면 안 되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되려 진지하지 않기 위해, 정적이 어색해서 흔히 말하는 '아무 말 대잔치'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실컷 가볍고 더 가벼운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 그리고 다 꺼내놓은 뒤엔 진이 다 빠진다.
그래서 예전에는 요란하게 이야기를 주도하는 편이었다면 요즘엔 듣는 편에 가까워졌다. 침묵이 익숙해졌고 천천히 상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 이야기를 듣고선 그 주제에 맞추어 대답하고 질문한다. 덕분에 한결 가볍다면 가벼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많은 대화들이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카카오톡을 잘하지 않고, 띄엄띄엄 일상을 주고받는 이도 두 명 정도이다. 종종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다 '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종일 주고받아야만 하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주 보고 하는 대화는 비언어적 요소가 있어 덜 하긴 하다.
여전히 나의 진지함과 진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수많은 타인을 사랑한다. 타인이 되어 나와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길 나누게 될까. 그럼에도 우린 종종 적당히 가벼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가끔 노력하지 않고도 완만한 계곡에 물 흐르듯 적당한 속력과 깊이로 대화할 수 있을까.
때론, 그저 가벼운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