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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Mar 16. 2022

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8

후회는 없...다?!

부부가 둘 다 직장을 다니다 하나는 휴직하고 학교를 다니고, 하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한다고 하면, 백이면 구십이 똑같은 반응이었다.


“우와. 대단하네요.”

“돈은... 누가 벌어요?”

“부러워요.”


사실 이제 와 생각하면 꼭 대단하거나 부러울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당시 우리에게는 그게 자연스럽고도 절실한 선택이었다. 그 과정이 예상보다 힘들었을지언정, 지금도 후회는 없다.(있다 해도 어쩔 건가...)


딱 하나 후회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돈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이재에 그리 밝은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책 없이 무모하지도 않았다. 애초 계획은 한 명이 공부할 때 다른 한 명이 회사를 계속 다니며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남편은 물론, 나조차도 내심 돈을 계속 버는 쪽은 내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3편에도 썼지만, 내가 통번역대학원에 바로 합격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일단 자랑, 맞습니다. 그런데 자랑보다도... 언제라도 쌓아놓은 실력은 생각지도 못한 결정적 순간에 발휘된다는 교훈 쪽이 더 맞겠네요. 궁금하면 3편으로...)


놀라긴 했지만, 남편도  합격을 기뻐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기 상황도 비관했을 것이다. 당시 남편의 일과는 혹독했다. 아침 6 30분에 좀비처럼 나가서 회사 셔틀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평균  10-11시에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이런데 신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일과 시간이 이렇다 보니, 남편은 당연히 거의 매일  끼를 회사에서 해결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식구[食口] 먹을 ,  구로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정의에 따르면 당시 남편과 나는 가족이지만 식구는 아닌 사이였다. 지금은 너무  끼니를 께하는 식구가 되었으나 결혼 3년차였던 우리는 특별한 약속 없이 함께 끼니를 먹은   번이    정도였다.


신이 나서 휴직 후 계획을 세우는 나를 보며 남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는데도 남편 부서는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안쓰러웠다. 눈에 띄게 한숨을 쉬며 “좋겠다.”를 연발하는 남편에게 결국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 벌어 먹여 살리라고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 아침에 나가서 밤에 오는데 계속 회사를 다니면서 유학 준비하는 건 무리지. 그러면 관둬. 단, 보너스 받을 때까지만 버텨.”


끝이 보이는 괴로움은 훨씬 견딜 만하다. 남편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한숨도 한결 줄었다.


이 아름다운(?) 선택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딩크족이었기 때문이다. 기간은 조금 달랐지만 각자 회사를 다니며 벌어놓은 돈이 있었고, 서로를 빼고는 부양할 가족이 없었다. 당시에는 (그리고 그 후로 오래도록) 애를 낳을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었다. 애가 있었으면 동시에 직장 때려치기+공부하기 콤보를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유학 중에도 정기적으로 양가의 지원을 따로 받지는 않았지만, 양가 부모님께 돈을 보내드려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학비(와 생활비 약간)는 장학금으로 해결한다고 하는 주변의 카더라 통신도 마음의 부담을 줄여주는 요소였다.


그러나 명심하자. 장학금은 맡겨놓은 돈이 아니다.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하는 거다. 그리고 외국에서 학비와 생활비는 생각보다 매우 많이 든다. 더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여기까지.


우리의 선택은 그때도 지금으로도 경제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통장 잔고에 무심히 찍히는 숫자만으로도 알 수 있다. 후회는 없다. 그러나 적극 추천 역시 못 하겠다. 유학생활을 하며 만났던 다른 유학생 부인들을 떠올리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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