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화제였고 개봉 이후에도 여러 외화들에 밀리지 않고 흥행 중이다. 배우들의 힘도 있겠지만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고 있는 것이 더 클 것이다. 올해 한국 영화는 여성 감독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눈에 띄는 활약을 하였다. (<벌새>,<우리집>,<메기> 등)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라 올해의 작품에 들어갈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대중성과 화제성 측면에서 그 흐름의 정점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점보다는 안정적인 출발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나 주제 대신 영화 자체만 놓고 본다면 다소 도식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고정관념과 가부장적인 사회를 보여주는,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대사들과 행동들이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여러 단편 에피소드들을 나열하고 봉합해 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힘주어서 말하는 부분도 의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작품 자체의 단점들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점에서 나오는 '공감대'다. 이 영화를 외국인이 본다면, 한국이 저렇구나 하고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이 영화를 가볍게 보고 넘길 순 없을 것이다. 단순히 단편 에피소드들의 묶음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깨진 유리 조각들 같이 기능하기도 한다.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겪어온 사회의 모습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별 생각 없이 영화를 관람하다가 움찔하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왜 저러지 싶은 장면이 나와도 저게 우리가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주인공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특성이 있는데, (토니 스타크나 아나킨 스카이워커 같은 특수 혹은 특이한 이름 제외)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기억이 났다. 영화 속 인물들이 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것의 현실성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지영의 어머니인 미숙이었다. 지영은 어린 시절에는 고리타분한 고정관념들에 얽혀서 살아야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개개인과 시대가 변화하는 과도기에 살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미숙은 이미 고리타분한 시절을 다 살아내고 자신의 딸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며 지켜보고 옆에서 조력자가 되어주는 한편, 누구보다 딸을 아끼기에 딸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더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성애로 호소하는 것이 아닌, 기성세대로서 새로운 기성세대가 될 딸의 모습을 보며 '잘못된 것은 고쳐져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인물이어서 더 인상 깊었다.
이 영화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 감독의 여성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영화는 답습의 늪에 빠진 것처럼 항상 똑같은 이야기에 주인공 역의 배우와 간단한 설정만 바뀌어서 나오고 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이야기들은 다양하다. 그것이 극 현실적이든, 상상에서 나오든 우리 주위의 이야기들이 반영된 영화들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82년생 김지영>이 화제가 되고 흥행하고 있는 것은 한국 영화가 이야기의 다양성이라는 부분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될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사진: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