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 카우리스마키, 헬싱키, 빈티지 러브 (가벼운 영화 일기)
포스터부터 맘에 드는데 2023년 연말에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두 번 봤던 작품을 오랜만에 또 극장에서 보게 됐다.
‘가을 멜로 기획전’이었는데 이런 가을 멜로가 각 국가마다 있다는 게 재밌는 부분이다.
한국 소설 중에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라는 책이 있는데 군대에서 읽으면서 이건 멜로로 만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만약 만들어진다면 딱 이런 톤이었으면 좋겠다!
헬싱키, 빈티지, 로맨스라는 세 가지 단어를 골라서 내걸었는데 이게 또 굉장히 잘 선택한 단어들이다.
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해서 항상 다뤄오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는 아주 큰 영화는 아닐지라도 그 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과 인물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감정을 최대한 건조해서 격앙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장점인데 이 인물들의 마음이 잘 느껴지는 희한한 작품이다.
노동 영화라고 대단하게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나오는 영화도 아니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고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니 그렇게 불리는 듯하다.
사실 영화 속에서 직업이나 일은 현실에서보다 과소평가받고 잘 다뤄지지 않기 일쑤이다.
어쩌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도 만들어주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대충이나마 파악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인데도 말이다.
북유럽 특유의 건조한 감정 표현이 참 부담스럽지 않고 좋았다.
한국 영화였으면 ‘OㅁO’ ‘O0O’ 이런 표정들 몇 번이고 나오고, ‘미쳤구나’ 같은 단어도 나올 법한 내용이지만, 별 거 아니란 듯이 툭 반응해 주고, 위로의 한 마디 툭 건네주고, 이런 게 마음에 들었다.
아, 물론 한국 특유의 그 감정선과 정감 넘치는 반응들도 좋긴 하다만, 이런 내용에는 이 톤이 더 어울린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같은 구도와 색감이 영화 내내 눈을 사로잡는다.
잔잔하면서도 크게 튀지 않고 너무 선명하거나 강렬하지 않은 파스텔톤이 영화 내내 인상적이다.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듯 최소한의 움직임과 반응만 보이는 인물들까지, 어쩌면 한 영화의 일관성은 이런 식으로 테두리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영화 내내 두 인물에게 고유의 색이 있는데 남자의 무채색과 여자의 빨간색이다.
남자는 포인트 색이라고 해도 네이비나 브라운 정도로 어두운데 여자에게는 항상 빨강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남자도 노란 셔츠도 입고 멋진 재킷도 입으면서 점점 색깔을 입어간다.
두 사람이 노란 은행과 빨간 단풍처럼 보이기도 하고, 서로의 색을 입어가는 계절인 가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면 꽃도 노랑과 빨강의 조화로 집이 온통 노랑과 빨강이 된다.
영화 속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라디오로 계속 전달된다.
처음 관람할 때는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고민했었는데 세 번째 보고 나니, 이건 시대적 배경인 동시에 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도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 삶의 안과 밖으로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새로이 품게 되는 희망, 사랑, 소망‘이랄까?
(그중에 최고는 망사… 드립임)
여자는 의도치 않은 일에 계속 휘말린다.
유통기한 지난 식품을 챙겨가고 챙겨주다가 걸리고, 카페 사장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체포되고, 공장에 취업해서는 길 잃은 개를 집으로 데려와 기르게 되고, 남자에게 번호를 주었지만 연락이 오지 않고, 남자가 사고를 겪는 등 본인의 의도와는 매번 다르게 흘러가게 된다.
반면 남자는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크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그는 일하면서도 술을 숨겨놓고 마시다가 적발되고, 또 다른 공사장에서도 음주를 걸리고, 여자에게 번호를 받았지만 그 쪽지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쪽지가 낙엽처럼 날아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화관 앞에서 저녁마다 기다리고, 어릴 적 알코올 중독으로 죽은 가족 때문에 알코올을 싫어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술을 끊으려고 노력하고, 오해가 생기고 그러다가 기차에 치이는 사고까지 벌어진다.
이렇게 두 남녀는 의도치 않게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견디기도 해야 하고, 자신이 계속해서 저질러오고 삶에서 반복해 왔던 잘못을 바로잡기도 해야 하는 사람들로서 각자의 전투를 치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각자의 전쟁을 치르다가 전장에서 만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자체로 두 사람에게 힘과 활력이 되어준다.
낙엽이 떨어져도 나무는 또다시 잎을 틔울 것이고, 봄이라는 계절을 기다릴 것처럼.
두 사람은 인생에서 힘든 일이 벌어져도 다시 따뜻해지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기 때문에!
영화에 삽입된 곡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중독성 있는 노래인데 실제 가수가 본인들 노래를 부른 거였다! 뒤에 보이는 여자 듀오 밴드의 노래인데 이거 어떻게 읽는 거예요…?
영화에서 다뤄지는 영화관과 영화가 나오는 사랑 이야기라니, 시네필이라면 한 번쯤은 관람해야 할 영화이지 않을까 싶다. (+박하경 여행기 3화 구교환 편)
유사한 제목의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 도 참 좋은 영화이니 추천!
극 중에 두 사람이 같이 관람하는, 실제 감독끼리 친구이기도 한 짐 자무시 감독의 <데드 돈 다이>도 나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엽기 좀비 영화이니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