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의 날
연휴를 앞두고 동료와 급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멕시코 음식점에 들러 먼저 생맥주 두 잔을 시켰다. 금요일만 일하면 쉰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고 하필이면 맥주가 맛있었다. 한 잔 더?라고 나를 유혹하는 동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휴니까 두 잔 정도는 뭐. 그런데 너무 안일했나. 한 잔 더?가 두 잔이 되었고, 마침내 내 주량인 세 잔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샘 데낄라 먹어봤어요?"
"데낄라? 아뇨?"
데알못이었던 나는 동료의 유혹에 또 넘어가고 말았다. 한 모금 홀짝이자 약국에 파는 순도 100퍼센트 에탄올 용액을 마신 것처럼 알콜 맛이 확 느껴졌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에잉쯧. 데낄라 그렇게 먹으면 안 돼요. 데낄라는 한 입에 털어 넣는 거야!"
동료의 말에 나는 잔에 있는 데낄라를 원샷했다. 그리고 마무리로 레몬을 짜서 마시자 마치 이곳이 멕시코 칸쿤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이 올랐다.
데낄라 원샷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원래 계획으로는 술도 깰 겸 천변을 걸으려고 했다. 그런데 또 하필 가는 길에 분위기 좋은 바가 있었다. 동료의 유혹(칵테일 한 잔?)에 나는 언제들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망설임 없이 바 안으로 들어갔다. 동료가 마티니를 추천했다. 예쁜 칵테일 잔 안에는 술과 그린 올리브 함께 들어있었다. 마티니는 두 모금을 마시자 바닥을 보였고, 언제나처럼 동료의 한 잔 더? 유혹에 이성이 마비된 나는 또 다시 속수무책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맥주 세 잔, 데낄라 한 잔, 마티니 세 잔. 태어나서 술을 제일 많이 마신 날이었다. 아니, 사실은 잔 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 도수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마신 데낄라와 칵테일의 도수를 생각하면, 소주 두, 세 병 쯤 되지 않을까. 평소에 생맥주 두 잔이 최대인데 어쩌자고 술을 그렇게 마셨는지. 마티니 세 잔을 마시고 나니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화장실로 달려가기를 세 번. 갈 지자를 그리며 악착같이 화장실로 달려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길 한 가운데서 실수라도 했으면... 정말 상상만해도 아찔하다.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동료는 길바닥에 누워있었다. ㅠㅠ 똑똑하고 유능하고, 늘 친절하고 상냥했던 동료가 반말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바 사장을 향해서였다.
"너, 너, 너. 나 좋아하냐?"
사장이 말했다.
"아... 아닌데요..."
"거짓말. 나 좋아하잖아! 너 나 좋아하지!"
이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게다가 이제는 하도 진부해서 술 취한 st 여자의 전형적인 클리셰라고 욕할 장면. 그게 현실 기반이었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누워있는 동료를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야외 의자에 앉은 내 상체가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개를 들려고 했는데 누군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누르는 것 같았다. 사장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경찰 두 명이 출동했다.(바쁘실텐데 정말 정말 정말 죄송하고 선생님들은 누가 뭐래도 민중의 지팡이!)경찰은 누워 있는 동료를 결국 일으키지 못했고, 동료의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상체를 접은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있던 중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이 분은 어떡할까요?"
"저 분 보다 상태는 좀 나아요."
"저기요. 집이 어디세요. 집이 어디세요!"
여자 경찰관이 내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파... 파파파.... 팔단지요."
생각과 다르게 혀가 마구잡이로 꼬이고 있었다. 그리고 암전.
잠시 뒤 눈을 떠보니 나는 경찰차 뒷 자석에 앉아 있었다. 또 다시 상체가 숙여졌고, 나는 앞자리 조수석에 달린 머리쿠션에 얼굴을 박았다.
"사장이 젊은데 참 사람이 좋네."
"그러게요."
"ㅈ, ㅈ하송햡나더... ㅈㅎㅇㅁㅏㄹ 죠ㅐ송햠ㅁㅣ다..."
그리고 또 암전.
"선생님! 일어나세요!"
다시 눈을 떠보니 익숙한 건물들이 보였다.
"ㅈ, ㅈ하송햡나더... ㅈㅎㅇㅁㅏㄹ 죠ㅐ송햠ㅁㅣ다..."
"팔단지 여기 맞으시죠? 집 다 왔어요. 몇 동인지 알려주시면 데려다 드릴게요."
"ㅇㅑ납ㄴㅣ댜... ㅈ하송햡나더..."
나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아파트 입구에서 내렸다. 악착같이 집에 기어 들어가 바로 기절. 눈을 떠보니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남편이었다.
"일어났어? 뭔 술을 그렇게 마셨어?"
"으... 으응... 미안..."
"편의점에서 여명이나 포카리 스웨트 하나 사 먹고 출근해!"
"으... 으응..."
뒤늦게 아침 원서 읽기 무단 결석을 했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톡방에 들어갔다. 언제 보냈는지 용케 아침 원서 읽기 모임에 모임 참가를 못한다고 톡을 남겨놓은 상태였다. 얼마나 제 정신이 아니었는지 오타의 개수가 말해주고 있었다. 도저히 출근을 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술병 났다고 병가를 낼 수는 없었다. 겨우 씻고 준비를 마친 뒤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자 마자 뱃속에서 어제 마신 술들이 탈출을 하겠다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변기를 부여잡았다. 한바탕의 혈투 끝에 밖으로 나오면 내 위장은 아직도 술이 남았다고 야단이었다. 그렇게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위액까지 모두 토해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하찮고 멍청하고 한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1, 2교시를 어찌어찌 마치고 3교시는 전담시간이라 아이들을 전담실에 올려보내고 보건실에 들어가 잠깐 누웠다. 천장이 핑글핑글 돌았다.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게다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 붓다니 너 정말 돌았구나... 그렇게 잠깐 누워있다가 일어나 편의점에 가서 숙취해소제를 샀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숙취해소제를 토했다. 복도에서 만난 선생님들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차마 술병이 났다 말은 못하고 그냥 속이 좀 안 좋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토하기를 반복하니 서서히 정신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수업을 별 탈 없이 마치고 아이들 밥도 먹이고 추석 안전지도까지 한 뒤에 아이들을 집으로 보냈다. 더이상 속이 울렁거리지 않게 되자 이 당연한 상태가 너무 감사했다. 정신을 차리고 어제 일을 복기하는데 문득 술값은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졌다. 가방을 뒤지니 영수증 한 장이 만져졌다. 마티니 일곱 잔, 98000원. 하하... 너 정말 돌았구나...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5468923456348957번째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