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묵상일기 01.
01.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2019.11.13일 하와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수 없었고 다만 취약한 약점들을 빨리 없애달라는 기도뿐이었다. 각성이 너무 쉽게 되어 잠이 오지 않거나 해야 할 일들 때문에 압박감이 올 때, 두렵고 불안할 때 기도하며 이것들을 제발 없애달라고 회복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이런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려웠다. 뭔가 주님 앞에서 받아들이는 내 모습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이 주님께 순종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원하시는 것이 없으셨다.
요 며칠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여전히 각성이 되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밥 먹는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짐 싸는 것, 남편의 일을 돕는 것, 내 시간보다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에 포커스를 두느라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더욱 불안감을 가중했다.
이제는 그런 나를 객관적으로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나에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 컸지만 도리어 집중할 수 없고 계속 생각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동적 사고처럼 꼬리를 물며 머리를 굴리고 있느라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도 비참하였다.
나는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부터 시작하여 ‘왜 잠이 오지 않느냐.’ 하며 내면에 나와 대화를 해보려고도 하였고
예수님의 딸인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나의 불안을 안고 있다.”라고 수십 번씩 되내었지만 상황은 악화만 될 뿐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최근에 내가 해왔던 하나님 안에서의 회복의 과정들이 혹시 나만의 쇼(show)가 아닐까부터 시작하여 결론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이어졌다.
마치 주님은 현존하시고 함께 하시며 나를 사랑하시지만 내가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뭔가를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였는데 이는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나의 노력적인 신앙.’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비행기 안에서 잠이 오는 나와 마주하며 나의 베스트 책인 ‘너는 나의 보석이란다.’라는 세리 로즈의 책을 어김없이 읽고 있었다.
주님은 나에게 ‘넌 나의 기쁨이다. 그 사랑을 회복하자.’ 고 하시는 목소리가 들어왔지만, 나는 그것이 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마주하고 싶지 않지? 를 생각해보면서 기도해보았다.
나는 결국 그런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만 얻어 낼 수 있는 거라고 여태까지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혹은 주님이 특별하게 주신 은혜로 또는 정말 납작 엎드려서 울음만 터트리는 그 시점이어야만 주님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평상시에 모던한 감정의 상태, 혹은 아픈 상태, 지쳐있는 상태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주님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도를 해야 하며 찬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했고 받아들여야 했다.
주님은 나에게 책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너의 몸, 마음, 영혼을 지었고 성격도 그렇게 불안하게 강박적으로, 각성된 상태로 지었다. 주류의 사회 구성원, 통상적인 모던한 사람들의 특성으로 만들어 놓지 않고 에이레네 너를 이렇게 부정적인 에너지가 익숙하도록, 그렇지만 안에서는 늘 유목민의 삶을 꿈꾸며 자유하기를 바라는 너의 욕구들이 있는 상태로 지었다. 그렇게 질투도 많은 상태로, 비교의식이 많고 열등감에 휩싸인 그 거적대기 같은 삶으로, 다른 사람보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하기 어러운 에너지로 널 지었다.’
내 몸을 사랑하지 못하게, 수치스러운 경험들. 타인에 포커스를 맞추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나로,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나로, 그렇게 정말 불안 덩어리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그래 놓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이다.
내가 볼 때 전혀 ‘보시기에 좋은 모습’ 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불완전하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변화하시기를 원하시고 이 상처가 회복되어 더 나은 사람으로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하시기를 원하시고 바라시며 그렇게 나를 만들어 가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변화시키도록 뼈 빠지게 노력하라고 시키고 만약 내가 노력에 맞닿지 않으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있는 내 모습 그대로.
그냥.
보시기에 좋았더라.
끝.
그냥 나를 그렇게 지으시고 좋아했고, 이를 그저 기뻐했다고 하신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그 각성되고 불안한 모습을 내가 만들었단다. 나는 에이레네 너의 그 모습을 좋아하고 내가 불안해하고 나 만으로 기뻐하지 않는 순간에도 네가 각성되어 잠을 못 자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나를 믿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네가 나를 향한 사랑의 여부, 헌신의 여부, 순종의 여부와 상관없이 너는 나의 영원한.... 기쁨이다. 그 사실을 누렸으면 좋겠다.’
입술로 조용히 읊조려본다.
“각성된 너의 모습과 네가 나를 믿지 못하더라도 넌 나의 영원한 기쁨이다. 너는 나의 그 모습을 기뻐하며 사랑한다. 네가 나를 보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난 너의 그런 모습조차 기쁘고 사랑한다.”
주님이 내 모습 그대로 그저 두시는 것이다.
혹 다른 뜻이 있으셨다면 주님이 이 각성을 거둬가셨겠지.
그냥 지금 자도록 허락해주셨겠지. 늘 불면에 시달렸을 때 기도하며 잠을 겨우 청할 수 있었을 때처럼.
그러면 각성과 불안이 찾아올 때, 주님께 뭔가를 잘못하고 있고 순종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내가 생각하는 ‘샐프케어’ 를 하며 자신을 닦달했겠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그대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보기보다 불안에 떠는 나를 스스로 혹사시켜서라도 빨리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했겠지, 그것이 아니면 나를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제발 이 불안 좀 가시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겠지...
이제는 ‘나 비록 여전히 주님 모든 문제 다 해결안 해주셔도 돼요 그저 나를 영원한 기쁨이라고 말해주시는 그 음성 그 신뢰가 내 안에 꽉 차도록 해주세요... ‘
하지만 신뢰가 꽉 차지 않아 주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영원한 주님의 기쁨과 사랑은 여전히 잔잔하게 아니 깊게 이럴 때일수록 더 완전하게.
더 깊이 파고드시는 그 사랑을 누려야 함을, 아니 절대 불변하지 않음을 입술로 계속 고백하는 연습을 스스로에게 해야만 했다.
입술로 내뱉지 않더라도 기억하려고, 그 마음을 회복시키려고 하신다는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의 그 사랑은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내 노력의 여부에 따라 부어주심이 있고 없고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이것이 신앙의 성숙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노력 여부, 회복력, 열정,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무작정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의 상태가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스스로 여기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 같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 같고 자신의 연약함에 꽉 갇혀 당신을 찬양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울부짖고 있는 그 모습을 더욱 예쁘게 보시고 사랑하신다.
그 은혜는 마치 뿜어내는 피를 막을 수 없듯 그렇게 찾아 들어오신다.
로마서 8장 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