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바 Nova Aug 12. 2021

착한 아이콤플렉스에걸린 성냥팔이 소녀

안데르센 명작선 성냥팔이 소녀 재해석



다른 해 보다 유난히도 매서운 바람에 얼굴을 쏘는 것 같은 12월 겨울의 어느 날, 거리를 걷고 있는 저는 성냥팔이 소녀예요. 성냥을 팔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것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즐겁고 좋아요. 몸과 마음이 부서져도 괜찮아요. 사람들이 다정하게 미소 한번 지어주면 그걸로 됐어요.  


전 그들이 좋아하는 착한 소녀거든요.   


휘황찬란한 장식들을 한 트리 옆에 구멍가게를 운영하시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저를 말없이 손짓으로 부르고 있네요. ‘혹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어요. 담배를 피우고 계셨지요. 단번에 알아차렸어요. 성냥이 필요하신 거죠. 절반 정도 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네요. 오늘내일 어떻게든 버티려면 저에게도 성냥이 필요해요. 하지만 아저씨가 필요하다니 드릴 거 에요. 요즘 코로나 때문에 가게도 잘 되지 않을 텐데 담배라도 피우면서 마음을 푸셔야지요. 남은 절반으로 어떻게든 버티면 되니 괜찮아요. 


아저씨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요.  


터벅터벅 걸어가다 곧 정신이 잃을 것처럼 외투 없이 누워있는 한 남자아이를 보았어요. 몸을 어떻게든 흔들어서 깨웠지요. 아마도 어제 무료급식소를 간 사이에 누군가에게 그새 외투를 뺏긴 것이겠지요. 아 그렇지. 제가 입고 있던 빨간 망토가 마침 있네요. 비록 왼쪽 어깨가 곧 찢어질 것 같지만 그거라도 입는다면 따뜻하게 몸을 보호해서 정신을 잃지는 않겠지요. 남자아이에게 망토를 건네주고 절반 정도 남은 성냥을 모두 주었어요. 성냥이 없이 저는 어떻게 버텨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요.     


크리스마스의 화려한 조명과 불빛들이 온 길가를 덮고 있네요. 3시간쯤 배회했을 거 에요. 초록색 지붕에 눈이 가득 덮인 집이 보여요. 창문 사이로 노란색 불빛이 비치네요. 아. 여러 명의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요. 집을 향해 다가가니 가족들이 오순도순 식탁에 모여 앉아 있네요. 맛있는 케이크, 로스트 치킨, 과일, 과자와 사탕들이 가득해요. 주변에 오색빛깔의 아름다운 양초와 불빛들이 그들의 행복을 비춰주고 있네요. 


좀 더 가까이 창문 앞까지 다가갔을 때 집주인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어요. 어라. 그리고 보니 아까 성냥 절반을 드렸던 배불뚝이 아저씨네요. 반가워서 손 흔들며 인사했더니 아저씨는 바로 고개를 휙 돌려버리고 모른 척을 하는군요. 


초록색 지붕의 집에는 다른 창문도 있어요. 분홍빛과 노란빛이 함께 섞인 불빛이 비치네요. 분명 분홍색 유니콘이 그려진 벽지로 온통 꾸며진 방일 거 에요. 창문 사이로 비친 어떤 한 남자아이가 보이네요. 어라. 아까 제가 망토를 벗어준 그 아이예요. 소리를 지르며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네요. 분명 집이 없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아마도 저 혼자 착각을 한 것인가 봐요. 

컴퓨터 옆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돌리니 쓰레기통에 한쪽 어깨가 찢긴 저의 빨간 망토가 쓰레기들과 함께 섞여 버려져 있네요.  


그들에게는 외투 하나쯤 잃어버리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닐 테지요. 이미 저를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에요. 


바람에 날리는 눈발들이 무정하게 가슴을 짓이기며 지나가요. 가족들의 웃음 속에서 날개 잃은 가녀린 한 마리 새의 울음소리 따위 무참히 파묻혀 들릴 일이 없겠지요.    


이제는 성냥도, 망토도, 바지와 신발도 저에게 없어요. 그저 누르스름한 회색 민소매 원피스만 함께 있네요.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맨 발로 걸어야 하지요. 아마 동상이 걸렸을 거 같아요. 감각이 전혀 없거든요. 얼마나 걸었을까 오들오들 손과 발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데 호호 불어 보아도 소용이 없게 되었지요. 


추운지도 모르겠고 아픈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저를 지킬 수 없게 된 걸까요? 아. 이제 어떡하죠? 


나눠주고 또 나눠주면 다가올 봄처럼 몸도 마음도 따뜻해질 줄 알았어요. 

다만 그들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아지랑이와 같은 사랑과 속삭임이 필요했을 뿐이었죠.   


남은 건 얇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서운 눈덩이들만 꾹 눌려 앉아 있네요. 아려오는 눈물들이 벌겋게 튼 볼 살 위로 주르륵 쏟아져 내리고 있어요. 아프고 따가워서 감각 없는 손을 들어 닦아보지만 소용이 없네요. 가슴은 뜨거워지고 숨이 쉬기 어려워져요. 서러움 한 가득 뜨거운 용암이 명치 쪽에 쏴아아 하고 쏟아지고 있어요. 닦아 낼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흘러 주체할 수 없네요.  


아! 정작 눈물을 닦아 주고 마음을 헤아려줄 누군가가 없다니요.  

공허한 그림자들만 찢긴 옷 사이사이로 어둠과 함께 외롭게 스며들고 있네요.   


그래요. 

이젠 적어도 이렇게는 살면 안 되겠어요. 

지금이라도 나를 돌봐주려고요. 


초록 지붕의 집과 정 반대편에 있는 길이 제 눈앞에 펼쳐지네요. 

새롭게 그 길을 만들어가야겠죠. 


깜깜한 어둠들만 빼곡하게 길을 채우고 있어요. 


가지고 있는 성냥을 몽땅 다 주고는 타인의 길만을 비춰주며 매일 그들의 따뜻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주었었죠. 그러니 저만을 위한 길은 보이지 않고 답답한 무서운 어둠들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네요. 자신을 비춰줄 수 있는 등불이 보일 리가 만무한 것이겠지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지금이라도 발견한 게 어디인가요. 


이젠 다른 사람이 아닌 저만을 위한 성냥을 피우려고요.     



작가의 이전글 2. 감옥 탈출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