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체력이야

by 고유

회사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 있다. 당시엔 망설임 없이 "일 잘하는 사람이요"라고 답했는데, 이후 며칠 동안 그 질문을 곱씹게 되었다. 나는 어떤 동료이고 싶은가. 일 잘하는 사람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로, 일 잘하는 동료로 충분한가. 질문들이 꼬리를 물다가 회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 함께 일 하고 싶은 사람, 닮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떠올리면 '다정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회사에서 예민한 사람들을 종종 목격한다. 자신에게 손해 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날카로워지는 사람. 내 편으로 규정한 소수에게만 관대한 사람. 이들은 '회사는 일만 잘하면 되는 곳 아닌가요?'라는 검과 '친절하면 호구된다'라는 방패를 양손에 꼬옥 쥐고 회사라는 전쟁터로 출근하는 사람 같다. 그들에게도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친절했다가 된통 당해본 경험이 만든 방어기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일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함께 일 하고 싶은 동료로 꼽고 싶진 않다.


'회사는 일만 잘하면 되는 곳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 전에, 회사가 단순히 일만 하는 곳인지 생각해 본다. 회사는 다른 나이와 출신, 각자가 고유한 경험과 가치관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필연적으로 부딪히고 양보하고 쟁취하며 일상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우정 비슷한 것을 나누기도 하고,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견디고 또 못 견디는지 선명히 알아가는 자아 성장을 경험하기도 한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만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닌 것처럼, 회사는 일 하는 곳이지만 일만 하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양심적이며 선의를 선의로 갚을 줄 안다. 친절은 친절로 돌아올 때가 많고, 평소 다정한 사람의 부탁은 선뜻 들어주고 싶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리하여 다정한 사람은 기꺼운 도움을 많이 받고, 도움을 많이 받을수록 일은 잘할 수 있다. '친절하면 호구된다'라고 믿는 것보단 그냥 친절한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그러니 이왕이면 다정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일에서건 관계에서건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고 싶다.


그런데 자주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다정함은 마음가짐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PM을 맡은 적이 있다. 잘 해내고 싶어서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밤늦게 퇴근해서도 기획안을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식사 시간도 아까워 대충 끼니만 때웠고, 주말에도 출근하며 열심이었다. 피로가 쌓이는 게 느껴졌지만, 일에 몰입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장은 다른 데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쉬엄쉬엄하라는 선배들의 애정 어린 안부 인사가 귀찮아지고 주변의 소음에 취약해졌다. 특히 사람과 대면하는 일에서 날카로워졌는데 미팅을 진행할 때 의도와 달리 내뱉는 말이 딱딱하고 조급해졌다. 아무리 적극적이고 활기찬 사람들이 모여도 딱딱하고 방어적인 한 사람이 그 자리를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드는 걸 곱절로 어렵게 한다. 미팅의 윤활제가 되어야 하는 PM이 되려 미팅을 더욱 어렵게 만든 꼴이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정함은 태도의 영역이라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서랍에서 꺼내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다정함은 단순히 웃거나 친절히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마음을 담고, 관심을 기울이는 행동이다. 몸을 쓰는 것만큼 마음을 쓰는 것에도 에너지가 쓰인다. 그래서 다정함이 보관된 서랍을 열기 위해선 체력이 필요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운동도 하며 에너지의 총량을 늘려야 한다. 각자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은 다르므로, 체력이 떨어지거나 애초에 에너지의 총량이 작으면 분산시켜둔 에너지를 긁어모아 우선적인 목표에만 쏟아붓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선순위 외에 모든 것에 쉽게 예민해진다.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 의하면 인류가 번성한 것은 똑똑해서가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보다 잘 협력하고, 서로 돌보았기에 더 큰 생존 가능성을 얻었다. 우리는 다정해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다정하기 위해서 나를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직장에서의 생존을 위한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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