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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Nov 11. 2020

숨겨진 불편함이 모습을 드러낼 때

영화<인 디 에어> 트럼프, 코로나, 낯선이의 불편함에 관하여

우리 주변의 불편함은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반대로 사회의 변화가 우리 안에 숨어 있던 불편함을 밖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미국이 오랜 세월, 인권과 복지에 대한 진보의 역사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조금씩 써 나가고 있을 때 백인 중산층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의 권리가 박탈당했다는 피해의식이 자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민자, 성소수자,  아시아의 수출 강대국들로 인해 자신들의 노력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상받아야 할 시간이 자꾸만 뒤로 미뤄지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들은 미국 시민으로서 그런 생각이 기존의 가치관과 대립하는 것에 도덕적 갈등을 하며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트럼프는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이를 백 퍼센트 활용했다. 4년 전 대선 캠페인에서 트럼프는 이들에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자신이 맨 앞에 서서 당신들의 권리를 찾아 주겠노라고, 당신들이 경제적 부의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새치기해 들어온 주변 것들을 물리쳐 주겠다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졌다. 그것이 트럼프가 말했던 'Make America Great Again'의 진정한 의미였다.


4년이 지난 지금, 민주주의의 전통과 사회 정의를 지키는 위대한 미국의 시민이라고 자부하던 백인 중산층들은 마음속에 감춰 두었던 '이기적인 불편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트럼프는 이들이 힘들게 지켜왔던 양심의 저항선을 무너뜨려 주었다. 트럼프의 시대가 저물고 있지만, 억눌러왔던 본심이 드러난 백인 중산층의 보수화와 양극화는 한동안 멈추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을 보면서 드는 나의 생각이다.




코로나로 온통 뒤덮여 고통받았던 2020년의 시간 역시, 말하지는 못했으나 사회의 변화가 늘 존재해 왔던 우리의 불편함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 불편함은 부끄러운 것은 아니나 사회적 압박에 의해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기 전파를 줄이기 위해 회사 구내식당 테이블마다 칸막이를 설치하고 한 칸씩 건너 앉은 것이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취지는 감염 예방이었으나 사실 상 다른 이유로 모두들 테이블 칸막이를 내심 환영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꼰대 아저씨들과 마주 앉아 재미없는 얘기를 듣지 않아도 되며, 동료들과 속도를 맞추느라 눈치를 보며 허겁지겁 먹을 필요도 없어졌다. 테이블의 칸막이와 다른 부서의 낯선 사람들 속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도 말 걸어오지 않는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으로서 자유와 마음의 고요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내년에도 이 칸막이가 계속 유지될 것인지 모두의 관심사다.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표정과 억지 미소에 대한 압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와졌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동의와 긍정의 신호를 보내야 할 때는 나처럼 눈이 작은 사람들은 잘 떠지지도 않는 작은 눈을 억지로 크게 뜨거나, 어느 때보다 크게 고개를 끄덕여야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우리의 표정을 편안하게 유지할 수 있다. 작은 회의실에서 서로의 입냄새를 감내해야 하는 이른 아침 회의도 마스크 덕분에 조금은 상쾌해졌으며 회의 자체도 많이 사라졌다.


비대면 판매를 이유로 일부 패스트푸드점과 편의점에서는 키오스크에서 직접 주문하고 계산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의 특수한 상황 덕분에 우리는 키오스크에 더 빨리 적응하게 되었다. 주문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타인의 존중과 인정을 즐길 수 있는 외향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복잡한 메뉴를 막힘없이 한 번에 쭈욱 뱉어내도록 강요하는 패스트푸드 매장 직원과 본인 뒤로 길게  줄 서있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두려워하는 내성적인 사람들의 경우라면, 빨리 대답해야 할 압박 없이 차분하게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반가운 변화다.


이렇게 드러난 우리의 불편함은 이제 일상 속에 받아들여져 빠르게 정착하고 있으며, 코로나 이후에도 계속 우리의 욕구로 남아 또 다른 사회 변화를 유도할 것이다.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 <인 디 에어>는 해고 전문가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다. 예전 출장 중 비행기 안에서 처음 봤던 영화인데 개봉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져주는 영화라 몇 번쯤은 다시 봐도 괜찮다.


영화에서, 직접 해고하는 것이 불편한 미국의 여러 회사 중역들은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 분)과 해고 대행 서비스를 계약하여 자신들의 직원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 회사 중역들이 느낀 불편함이란 업무적으로는 해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소송과 자살 등의 복잡한 문제를 피하는 것이며,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해고당하는 직원과 얼굴을 마주하고 본인이 그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장본인이 되어야 하는 감정적 부담을 말한다. 이런 불편을 피하기 위해 이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해고 서비스 대행 회사는 직원인 해고 전문 에이전트들이 해고 통보를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통에, 그 많은 출장 경비를 감당해야 하는 비용의 불편함을 겪는다. 그러던 차에,  명문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 나탈리는 '화상 인터뷰'를 통한 온라인 해고 통지 프로세스를 제안하게 되고 회사는 이를 냉큼 받아들인다. 기존에 라이언 빙햄처럼 전국을 돌며 직접 대면 해고 통보를 했던 직원들은, 이 새로운 프로세스로 인해 본인들도 해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불편함을 마주해야 했다.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싫고, 가족과 결혼에 얽매이는 것도 불편한 주인공은 비행기 안을 자신의 고향이라 여기며 일 년에 300일을 넘도록 출장을 다닌다. 전통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서 살아야 하는 불편함을 '선택'한 대신, 지금껏 6명밖에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천만 마일러가 되는 꿈을 꾸며 지낸다. 비행기 기내를 고향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항공사, 호텔, 렌터카의 VIP 멤버십은 순간순간 확인할 수 있는 정체성과 자존감이었을 것이다.


남자 친구에게 문자로 이별 통보를 받고 분노한 신입사원 나탈리 역시, 정작 본인도 사장에게 문자로 퇴사를 통보한다. 그녀가 제안한 화상 해고 시스템은 명문대를 나온 똑똑한 엘리트여서 제안할 수 있었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불편한 본인의 성향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제안이었다.


이처럼 이 영화 속에서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타인(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현대인이 타인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진다.


낯선 사람이 본능적으로 공포와 불편함의 대상인 이유는 그들이 내가 쌓아온 사회적 유산과 내 삶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페르소나를 입고 만나야 할지 미처 정하지도 못한 채, 내 정체성이 공격받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수많은 고객 중 한 명이 되어 버리는 '순간의 익명성'. 그 순간에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즉각 응답하도록 강요받는다.


"다음 분이요! 음료는요? 사이드 메뉴는요? 드시고 가시나요?"


이 순간 나는 정보를 쏟아내야 하는 기계로 전락한다.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하는 전화 역시 비슷하다. 우리는 늘 전화 대기 상태이며 벨이 울리면 답해야 한다. 점점 더 전화보다 메시지를 선호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관계는 내가 투입한 노력만큼의 결과를 보장받지 못하는 불확실성과 비효율성의 영역이다. 비대면, 초대면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처한 우리는, 일상적인 타인과의 관계는 더욱 거리를 두게 될 것이다. 대신, 몇몇 선택된 확실하고 친밀한 관계에 더 집착하고 의지하게 될 것이다.


이번 위기가 인간의 고유한 습성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동물로 남을 것이고, 여전히 만나고 교류하며 함께 모여 어려움을 나누고 싶어 할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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