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앤디의 이너콘서트
Dec 15. 2020
신입사원 시절, 우리 부서는 늘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가득했다. 가끔씩 울리는 전화 벨소리가 정적을 깼으나 이내 전화받는 직원의 낮은 목소리 뒤로 사라졌다. 그 분위기는 계엄 사령관과도 같은 담당 임원 탓이었다. 그 임원 방에 불려 들어가는 날이면 옆 동네 앞 동네 사람들이 줄줄이 소환당하고, 상관없는 팀장들까지 불려 들어가 고초를 겪곤 했다.
하루는 계엄 사령관의 외근이 있던 날이었다. 덕분에 모두들 행복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무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밝고 따뜻했던 그날 아침의 햇살이 기억날 만큼, 평화로웠다. 담당 임원이 자리를 비운 사무실에서는 이제 영업 1 팀장이 가장 선임이었다. 1 팀장은 나이가 가장 많은 선배이기도 했지만 보고의 달인이라 불릴 만큼 언변의 센스가 있는 분이었다.
오랜만에 여유 있는 분위기를 타고 1 팀장은 옆에 앉은 다른 팀장들에게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앞쪽 줄에 앉은 차장님들은 손뼉까지 치며 재밌다고 웃어댔다. 그런데 정작 다른 팀장님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기획팀장은 인터넷 뉴스를 보느라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고 듣지도 않았고 반대편 영업 2 팀장은 아니 선배님은 웃기지도 않는 그런 걸 농담이라고 하냐, 감이 너무 떨어진 것 아니냐며 면박을 줬다.
난 그때 1 팀장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일그러진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느라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불안했다.
무슨 대화가 있었냐 싶게 다시 건조한 침묵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10분쯤 지났을까. 내 자리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낮고 긴장된 목소리의 대화가 잠시 오고 가더니, 이내 고성이 뒤엉킨 말싸움으로 번졌다.
"김 선배! 이번 달에 팔지도 않을 물량을 왜 다 싣겠다는 거에요? 우린 쇼티지(Shortage; 공급부족)라구요!"
"그건 당신 사정이지. 우리 매출에 신경 끄라고. 공장 가서 사정을 하든 시장에 가서 사 와서 팔든 당신들이 알아서 해!"
부품 공급 문제로 생산이 지연되면서, 납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영업 2팀은 물량을 제때에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참이었다. 2 팀장은 하필이면 그런 순간에 눈치도 없이 물량을 양보해 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꺼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1 팀장의 농담을 받아주지 않은 게 무슨 대수냐고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먹다짐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쌍욕이 오간 뒤 2 팀장이 자리를 뜨면서 싸움은 끝이 났다. 사람들은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 유치하게 삐져서 싸운 거라고 했지만 난 알았다. 자기 농담을 무시하며 존경을 표시하지 않은, 그 모욕에 대한 응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2]
요즘은 트렌드가 많이 바뀌었지만 2000년대 토크쇼 형태를 표방했던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면 여러 출연자들이 둘러앉아 폭소를 유발하는 개인적인 일화를 얘기하거나 성대모사, 노래 등의 개인기들을 많이 보여줬다. 제작진들은 출연진들의 표정과 리액션에 맞춰 자막을 넣고 열심히 웃음소리를 덧입혔다.
나도 한 때 그런 프로그램들을 좋아했는데, 볼 때마다 한 가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출연자들의 리액션이었다. 너무 과하다, 가식적이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너무 고통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출연자들의 표정은 얼핏 웃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웃기지 않은 것에도 웃음을 쥐어짜 내야 하는 격한 노동의 피로감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그나마 얼굴의 미세 근육들이 발달한 사람들은 나았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출연자들은 다른 선배 출연자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들의 리액션 수준을 정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음향 싱크가 맞지 않는 것처럼 미세하게 엇박자로 웃거나, 웃어지지 않는 긴장된 굳은 얼굴은 한 채로 웃겨 죽겠노라 냅다 박수만 치기도 했다.
물론 긴장하거나 어색해서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리고 TV 속 출연자들 각자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들은 주어진 역할에 따라 해야 하는 말을 했고 공감 없이 웃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난 뒤 그들은 웃음의 노동에 따른 각자의 출연료를 받았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가짜로 웃더라도 우리의 뇌는 실제로 웃는 것처럼 인식하고 엔돌핀 분비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밝혀냈다. 반대로 화난 표정을 짓거나 짓지 않는 경우도 유사한데, 보톡스를 너무 많이 맞은 어느 연기자가 표정 연기는 잘할 수 없었지만, 화난 표정이 만들어지지 않아 실제 생활에서도 화가 줄어들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실험의 결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억지웃음을 쥐어 짜내는 연예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 가짜 웃음은 계약에 의해 강요된 노동이며, 영혼을 다 토해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집요한 착취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 방송 녹화 중에는 의식하지 못했을 지라도, 어쩌면 그중 한 연예인은 일을 마치고 돌아간 새벽 자취방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공허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더 크게 웃을수록 통장의 잔고는 풍성해지고 자신의 내면은 점점 시들고 외로워져 갔을 것이다.
웃음은, 우리의 진심과 영혼에 그토록 가까이 맞닿아 있다.
"(라디오) 손님들이 다녀간 빈자리에 남아 나는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내 내면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중략) 나도 저 버스에 타고 떠나야 하는데, 타고 떠나버려야 하는데 그러나 나는 정류장에 남아 있는 대가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중략) 집에 돌아오면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었다. 쉬익 쉬익, 기분 나쁜 바람소리가 들렸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3]
우리는 늘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목말라한다.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단계설을 보더라도,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는 맨 윗 단계에 있다. 제일 아랫 단계에서는 그런 욕구가 없다기보다는 배고픔과 두려움에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우리는 배고플 때도 인정받고 싶어 한다.
특별히 내가 성공한 사람이 아니어도, 또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조건을 갖지 못했더라도,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경청하거나 잘 반응해 줄 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밝은 표정과 함께 내 이야기가 재밌다고 웃어주는 사람들 앞에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아, 나는 인정받고 있구나!
웃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진심 어린' 존경의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웃음은 나의 정서를 육체의 반응으로 끌어내어 표현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나의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반응하는 적극적이며 사회적인 의사소통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 웃음을 웃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경청은 했다는 의미이니 최소한의 존중은 남아 있는 것이다.
태생 자체가 회사 내에서 정치 같은 건 못하겠다거나,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사표를 쓰겠다고 하는 나 같은 뻣뻣한 사람이 그래도 어떻게든 회사에서 가늘고 길게 버텨내려면, 회사 영감님들의 시답잖은 개그에도 가끔은, 격하게 웃어줄 줄 알아야 한다. 그 웃음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다음과 같은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내가 말대꾸를 하는 것은 당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생각이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에요. 난 당신을 존중한다구요. 보세요, 이렇게 당신의 이야기에 웃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에 한 번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너무 많이 웃어주면 우리도 예능 프로그램의 연예인들처럼 영혼이 말라버릴 수 있으니. 그래도 회식이라도 하는 날에는 박수도 쳐가며 잘 들어주자. 한 때 초롱초롱한 눈 빛의 신입사원이었을 김 부사장, 박 상무, 신 팀장. 그들이 바친 수 십 년의 세월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며 통 크게 한 번 웃어주자.
그 한 번의 웃음이 회사 내에서 나를 능력 있는 인재로 만들어 주지는 않겠지만, 내 웃음에 인정을 받은 어느 팀장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단비처럼 작은 도움을 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직장 상사로서가 아닌 사람을 향해 진심을 담아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