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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크 Oct 22. 2023

나만 괴롭히는 상사

정말 피곤하다.

“그거 뭔데? 저기 저거, 응? AC열에 52행 눌러봐.”

또 시작이다.


한눈에 봐도 과체중인 우리 팀장님은 성격이 급하다. 몸집에 비해 빠르게 걷고, 빠르게 말씀하신다. 보고를 할 때도 “그래서?”를 많이 외치시고, 회의를 할 때도 본인 생각을 어필하기 바쁘시다.

(대강 느낌 오는 분들이 벌써 있을 거라 믿는다.)


정신없이 엑셀로 데이터를 만들고 있던 어느 평화로운 오전. 지나가던 팀장님의 레이더망에 내 수식이 걸린다. (“작은 눈으로 얼마나 그런 건 잘 보시는지!” 같은 팀이셨던 옆팀 과장 J가 내게 말했었다.)


팀장님은 셀 한 개를 보고 여러 말씀을 우다다다 쏟아내신다.

“이거 이렇게 해서 되겠어?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이거는 그 그 저기 지난번 그 파일처럼 만들면 되잖아?

(그건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만)

이렇게 해서 나온 숫자는 뭐라고 설명할 거야?

(지난번에 논리는 만들어 드렸잖아요ㅠ)

아무튼 체크해 놓고, 있다 다시 보자."

(또.. 또요?)


팀장이 멀어진다. 앉은자리에서 한숨이 나온다. 


업무 특성상 엑셀을 많이 다루는 편이다. 다른 회사에서 온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우리 팀에서 관리하고 있는 파일들은 상위 몇% 안에 들 만큼 복잡하다고 한다. 그 뜻인즉슨, 엑셀 파일도 많고, 탭과 셀은 더욱 많은 데다가, 수식도 무척 복잡하다는 뜻이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파일의 모든 숫자를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줄 요약: 내가 눈알 빠지게 보고 있는 숫자의 양은 정말로 엄청나게 방대하다.

그런데 팀장님은 ”1개“의 셀을 보고도 저렇게 얘기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직 봐야 할 내용만 오조오억개인데 말이다)



그날 오후.

회의실이다. 바쁜 모두를 데리고 굳이굳이 팀회의를 소집하셨다. 안건은, 일명 “내 데이터 하나하나에 대한 신뢰도.” 방대한 데이터에 대한 모든 설명을, 일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일개 사원이 할 수 있을 리는 사실상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팀장님한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 번 탭의 몇 번째 행
이번 탭의 몇 번째 열 
삼 번 탭의 몇백 번째 셀

끝도 없는 팩트체크가 들어간다.

모두가 슬슬 피곤해하지만 팀장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간다.


때론 정확하게, 때론 애매한 대답을 내놓는 나. 가끔 아예 대답 못 할 거리도 있다. 회의실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지난번에 한 번 해보지 않았나? 대답을 왜 제대로 못하는 거지?”

실무자들은 모두 말이 없다. 한 술에 배부르면 다들 쉽게 하겠지. 애초에 그럴 일이 아닌데. 모두 알고 있지만 침묵을 지킨다.


“H과장, 파일 전반 검토 다시 같이 해줘.”

어제도 밤늦게서야 집에 가신 과장님은 피곤하다는 눈빛을 가득 담아 힘없이 “예”라고 대답한다. 


“우리 팀엔 도대체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회의실의 침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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